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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초기 동아시아에서의 국제위생사업 - 유니세프와 일본의 관계를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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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일원조활동과 한반도구제부흥계획 1949-1951 년

유니세프는 1946년 12월, LNHO 보건부장을 약 15년간 역임한 라이히만에 의해 설립되 었다. 설립 직후에는 유럽 전쟁피해국에서 원조재건활동을 중점적으로 실시하였으나 1940년 대 후반 이후 아시아까지 활동을 확대하여 1950년대 이후 그 규모는 유럽을 웃돌게 되었다.

아시아에서는 1948년 4월 중국에서 최초로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식량지원 이외에도 공중위 생에 참가할 인재들을 육성하였다. 동남아시아각국에서도 1948년 여름, 수직감염증대책을 실 시하였으며32) 1949년 8월에는 탈지분유와 원면의 공급을 중심으로 한 대일원조활동을 시작 하였다. 분유는 학교급식용으로, 원면은 의류로 가공되어 아동들의 발육에 기여하였다.33)

다른 한편 유니세프의 활동은 냉전기의 동아시아국제관계와 무관할 수 없었다. 1950년 6 월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한반도구제부흥계획(Plans for Relief and Rehabilitation

of Korea)을 입안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유니세프도 그 일환으로 의류지원계획을 입안하였

다. 같은 해 11월, 유니세프는 원면가공을 일본 정부의 비용 부담으로 실시하겠다고 타진하였 다. 당시 일본은 국내 배급만으로도 힘겨운 상황이었으나 일본정부는 참가를 결정하였다.34) 그 이유로는 첫째, 유니세프에서 이미 많은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참여가 ‘유니세프의 기분을 흡족케 한다’는 예의상 이유, 둘째, 본격적인 추위가 다가오는 탓에 조속한 대응이 필요했다는 인도적 배려를 들 수 있다.35) 하지만 그 밖에도 일본의 참여를 독려하는 요인이 있었다. 연합 국총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GHQ)는 이 공헌이 유니세프에 대한 기부로 간주되었 을 때의 중요성을 지적하며 일본정부의 기여를 넌지시 권유하였다.36) 미국의 입장에서 본건 은 유엔의 전문기구와 일본의 관계를 긴밀하게 만들어 일본을 서방 측 진영으로 편입시키기

32) UNICEF, UNICEF in Asia: a historical perspective , UNICEF, 1988, pp.4-15.

33) 상세한 점에 대해서는 졸저 「국제연맹에서의 기능적 국제협조 계승과 발전- 전후초기 유니세 프의 대일구원활동에 대한 일고찰-(国際連盟からの機能的国際協調の継承と発展--戦後初期ユ ニセフによる対日救援活動からの一考察)」(일본국제정치학회 편『국제정치(国際政治』160호, 2010년).

34) 국립공문서관 소장 「제2차 요시다내각·각의자료철·쇼와25년11월의 1」, 1950년 11월 2일, 각의 자료.

35) 국립공문서관 소장 「공문류집 제75편·쇼와25년·제97권·외사」, 1950년 12월 8일, 관방섭외과장 의 보고서.

36) 국립공문서관 소장 「공문류집 제76편·쇼와26년·외사1」(사료C), 1951년 2월 20일, 외상의 청의.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이 한반도구제부흥계획은 표면적으로는 ‘긴급하면서 인도적 문제’이며 ‘본건을 정치적 개입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인식되었다.37) 하지만 실제로는 계획 책정 과 정을 거치면서 냉전의 전개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가령 경사리에서의 계획 책정 단계에서 동서 양진영은 대북대응을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서방 측 각국들은 북한이 한국 의 의약품을 약탈한 점, 유엔에 도전적인 자세를 드러낸 점, 치안의 악화 등을 이유로 북한 으로부터 지원요구를 청취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항해 소련과 동유럽 위성 국가들은 남북 골고루 지원요구를 청취하여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8) 결국 소련 측 의 주장은 받아들여 지지 않은 채 유니세프의 지원활동도 주로 한국에서 전개되었으나 유 니세프는 북한을 위한 활동 자금을 준비하고 있었다.39) 국제정치동향에 흔들리면서도 실제 활동에서는 극력 중립성과 자립성을 추구하는 자세는 2차 세계대전과는 대조적인 모습으로 이 점은 전후 체제 하의 진전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2) 유니세프 ·WHO 와의 호혜관계 강화 1951-1958 년

1950년대 전반 이후, 부흥지원활동이 일단락되자 일본은 유엔가입국을 비롯한 외교과제 를 내다보고 유니세프·WHO와의 호혜적 관계를 강화하고자 도모하였다. 예를 들어 1952 년 9월, 일본정부는 유니세프의 대동남아지원계획과 관련하여 통상산업성(通商産業省)이 10만 달러에 상당하는 제품을 구입하여 유니세프가 지정한 모든 정부에 인도하기로 결정하 였다. 당시 일본정부는 배상액을 최대한 줄이는 동시에 경제협력으로의 유도를 목표로 동 남아시아각국과 전후 배상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유니세프의 대동남아지원계획에 참여하는 일은 배상협상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40)

그리고 당시 유엔가맹문제는 긴요한 외교문제였다. 일본은 1956년 유엔에 가입하였으나 그에 앞서 1951년 5월, 일반 가입국의 자격으로 WHO에 가입하였다. 당시 WHO의 가입 방법으로는 일반 가입국과 준가입국이라는 두 종류가 있었는데 독립 이전의 일본과 독일은 WHO헌장 규정 상 일반 가입국 자격의 가입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본 외무성은 준가입국은 WHO의 총회에서 투표권이 없으며 그 밖의 권리에서도 일반 가

37) UN Doc., E/SR. 420, 20/10/1950 . 38) Ibid.

39) UNICEF, op.cit., UNICEF in Asia, p.19, p.36, pp.42-43.

40) 국립공문서관 소장 「공문류집 제77편·쇼와27년·제128권·외사11」, 1952년 9월 13일, 오카자키 외상·다카하시통상산업상의 청의.

극동위생사업의 전개와 일본의 국제기구외교 국제연맹에서 국제연합으로

-입국에 비해 못하다는 이유로 어디까지나 일반 가입국으로서의 가입방침을 견지하고 있었 다.41) 게다가 일본은 WHO에 가입했을 때의 이점으로 ‘이러한 종류의 국제협력이 보건 분야에 미치는 실제적 이익은 대단히 크다. 뿐만 아니라 평화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현재 우리나라의 국제사회 복귀를 앞당긴다는 점에서도 보건기구 가입은 극히 바람직하다는 점 은 논할 필요도 없이 명백하다(밑줄은 필자)’42)는 점을 들고 있다. 다시 말해 유엔의 전문 기구와의 관계 강화는 유엔 가입으로의 지름길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셈이다.

실제 이러한 인식은 그 후의 유니세프와의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유니세프집행이 사회(Executive Board)는 26개국(당시)의 대표들로 구성된 유니세프의 최고기획기관이 다. 일본은 1954년 8월에 열린 경사리에서 1955년 1월 1일부터 3년간 이 이사회의 의석을 확보하였다.43) 당시 일본은 전후 외교구상을 실현하는 데 유엔 및 유엔과 상호보완관계에 있는 다자간국제기구를 활용했다는 사실은 선행연구에서 이미 밝혀진 바 있는데44) 유니세 프도 이러한 다자간국제기구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었던 셈이다.

맺음말

국제연맹의 사회적 국제 협력 사업은 연맹이사회의 지휘·감독 하에 있었던 탓에 국제정 치동향에 따라 큰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반성 아래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경제 및 사회 적 국제 협력 사업에 자립성을 부여하고 국제정치동향에 좌우되지 않는 국제협력을 촉진하 기 위한 방안이 모색되었다. 이로써 국제 위생 사업은 유엔 산하에서 한층 자발적인 활동 주체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가운데 국제정치동향과 밀접하게 연관되면서 도 기능적 협력 면에서의 역할을 강화시켜 나갔다.

유니세프의 대일원조활동은 분명 미국의 냉전전략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미국은 유엔의 전문기구에 의해 전후 최초로 전개되는 본격적인 대일재건지원을 중시하며 유니세프의 활 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였다. 냉전이 점차 격화되는 가운데 유니세프의 인도를 목적으로 한 국경을 초월한 활동계획은 일본을 서방측으로 편입시키면서 재건을 촉진시킨다는 미국 41) 외무성 전후외교기록, 마이크로필름 B-2351, 1950년 7월 25일, 외무사무차관에서 후생사무차관. 42) 사료C, 1951년 1월 25일, 요시다외상이 요시다수상에.

43) 국립공문서관 소장 「쇼와29년·임면각의결정인사·제7권」, 1954년 12월 13일, 각의결정인사. 44) 이노우에 도시카즈「전후 일본의 아시아외교 형성(戦後日本のアジア外国の形成)」『일본정치학

회 편『연보정치학 일본외교에서의 아시아주의(年報政治学 日本外交におけるアジア主義)』이와 나미서점, 1999년). 134쪽, 「전후 일본의 외교구상(戦後日本の外交構想)」(일본정치학회 편

『연보정치학 오랄히스토리(年報政治学 オ-ラル・ヒストリ)』이와나미서점, 2004년)76-79쪽.

의 정책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 유니세프의 활동은 비교적 중립적이고 자 립적으로 수행되었다. 게다가 전후 외교형성기 일본은 유니세프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그러한 관계는 일본의 유엔가입, 대아시아외교에서도 일정 역할을 수행하였다. 국제 위생 사업이 냉전의 동향에 좌우되면서도 기능적 협력의 역할을 유지했다는 점은 전후의 활동체 제가 가져온 산물이라 말할 수 있다.

국제 위생 사업은 지역에 따라 과제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지역을 기본적인 활동 단위 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WHO의 서태평양지역사무소는 필리핀의 마닐라를 거점으로 일 본, 필리핀, 한국, 중국 등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약 30개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근의 국제 위생 사업은 재원과 스태프의 규모에서 볼 때 개발도상국에서의 아동문제와 에이스 퇴치에 중점을 두고 있다.45) 하지만 동아시아지역의 국제위생협력 자체는 중요성과 과제의 모든 면에서 쇠퇴 기미를 보이고 있다. 국제 위생 사업을 통한 기능적 국제협력의 가능성을 향 후 지역 내 국제관계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이는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의 중요한 과 제 중 하나라 말할 수 있다.

45) UNICEF, UNICEF Annual Report 2009, UNICEF, 2009, p.43.

远东卫生事业的发展与日本对国际机构外交 - 从国联到联合国

-远东卫生事业的发展与日本对国际机构外交 - 从国联到联合国

-安田佳代 (東京大学)

<目 次>

前言

一、国联的卫生事业

二、国联卫生组织在东亚地区的事业发展

(一)国联卫生组织远东支部新加坡传染病情报局 (二)在东亚的地区事业发展与日本

(三)国联对中国的技术援助,1928年~

三、战后初期东亚地区的国际卫生事业——以联合国儿童基金会与日 本的关联为中心

(一)对日救援活动与朝鲜半岛经济复兴计划,1949~1951年 (二)与联合国儿童基金会和世界卫生组织之互惠关系的强化,

1951~1958年 结论

前 言

第一次世界大战结束后,与国际联盟(以下简称“国联”)的设立同时,名副其实的社会 性国际合作事业在东亚开始展开。1)当时的东亚存在诸多促进国际卫生合作的要因,如传 染病的蔓延和传染病情报的不完整等。因此,国际卫生事业给东亚地区确实带来了卫生 改善的效果,其效果不只停留于此,而且还与地区内的国际关系密切相关。本文首先以

1) 关于国际联盟的社会性国际援助事业,研究成果众多。关于阿片限制之合作,如 後藤春美

『アヘンとイギリス帝国―国際規制の高まり1906‐43年―』(山川出版社、2005年);关于知识之 国际合作事业,如 斎川貴嗣「国際連盟知的協力国際委員会と中国-戦間期国際文化交流にお ける認識の転回-」(早稲田政治公法研究会、『早稲田政治公法研究』、85号、2007年)。

比较概括性的论文,如 Susan Pedersen, “Review Essay: Back to the League of Nations”,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Vol.112‐4, Octobe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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