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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중국에 있어서의 지적협력과 ‘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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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지적협력 국내위원회 총회에서의 일본과 중국 국민문화, 지역, 국제적 문맥

-회의에도 보고서로 제출된 니시무라에 의한 ‘지적협력과 국민문화간의 특징인 상호이해’, 이들 세 논문이 수록되어있다. ‘학예협력위원회’ 위원장인 가바야마 아이스케[樺山愛輔]가 서문에서 말하였듯이 이 소책자가 작성된 배경에는 일본이 유럽이나 미국과 지리적으로 격 리되어있고 그렇기 때문에 문화를 상호간에 이해하는 일이 매우 곤란하며 따라서 일본은 특히 ‘지적협력과 국민문화의 특징인 상호이해’를 추진하고자 하는 동기가 있었다31). 이러 한 일본측의 지적협력 이해는 ‘학예협력위원회’ 설립이래 일관적으로 유지되어왔다. 즉 쉽 게 말하자면 일본에게 지적협력이란 유럽이나 미국이라는 서양에 대해 일본문화를 소개하 고 ‘바른’ 일본 이해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32). 따라서 상호이해가 문제가 되었다고 하더라 도 일본문화의 발신과 소개, 서양측의 일본문화 이해가 중요한 것이었지 일본의 지적협력 의 개념은 일방통행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본의 지적협력 인식을 반영하여 이 소책자에서도 일본문화의 특징을 모색하고 그것을 서양측에 소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된다. 실제로 히라이즈미와 하세가와 의 논문은 ‘일본문화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한편 가바야마 는 스스로 일본문화의 특징에 관해 일치된 견해는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어디까지나 문제가 되어 탐구되는 대상은 일본문화의 특징이었다33).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문화의 본질과 그 중요성을 논할 때 ‘아시아’나 ‘동양’과 같은 지역개념이 사용되 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히라이즈미는 중국이나 인도와의 문화협상을 염두에 두고 또 하세 가와는 중국의 문화적 유산의 계승자로써 ‘동양’에서의 일본문화의 대표성과 특수성을 논하 였다34). 이 점에서 특히 히라이즈미의 논리는 명확하며 일본문화는 중국문화와 인도문화의 31) Ayske Kabayama, “Introduction”, Intellectual Cooperation and the Mutual Knowledge of National Cultural Genius. ‘학예협력위원회’는 1926년에 출범한 이래 야마다 사부로가 위 원장을 맡아왔다. 그러나 1936년 국제문화진흥회내에 이관됨에 따라 위원장은 국제문화진흥원 이사장인 가바야마 아이스케가 겸임하게 되었다. 야마다는 위원으로써 ‘학예협력위원회’에 남음 과 동시에 국제문화진흥회의 이사를 맡았다. 이처럼 이 시기의 ‘학예협력위원회’는 국제문화진 흥회의 강력한 영향 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2) 예를 들어 ‘학예협력위원회’는 발행된 팜플렛에서 위원회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이 나라위원회가 가장 중요시하고 많은 노력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국 문화의 소개이다. 오늘날까지 자칫하면 동양문화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적었던 구미인들에 대해 그 진실을 알리 는 것은 국제협력에 있어 당장 급선무이다’ (학예협력위원회 편 <학예의 국제협력> 국제연맹협 회, 1928년, 18‐19페이지). 이러한 일본의 지적이념(‘학예협력’)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졸고

‘국제문화교류의 내셔널리즘—전전기 일본에서의 <학예협력>사업을 중심으로’ <차세대아시아논 집> 제1호(2008년 3월) 11‐3‐페이지, 를 참조.

33) Kabayama, “Introduction”, Intellectual Cooperation and the Mutual Knowledge of National Cultural Genius.

34) Kizoshi Hiraiyumi, “The Contribution of Japanese Culture to the World”, Intellectual

위대한 유산을 보존한 ‘동양문화의 보고’(“treasure house of Eastern culture”)35)라 규 정하고 결론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요컨대 현대의 일본문화는 지극히 복잡한 상황에 있다. 한편으로 서양문화의 영향을 받은 문화요소에서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음으로써 일본문화는 세계의 진보에 공헌해왔고 앞으로도 더욱 크게 공헌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진정한 의미의, 서양의 선의에 보답하는 세계에 대한 공헌은 오히려 동양, 특히 일본의 전통이나 특징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36)

이와 같이 동일화와 차별화의 논리를 교묘하게 사용하며 ‘동양’이라는 지역개념을 경유 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일본문화의 의의가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문화’론은 ‘동양’

이나 ‘아시아’의 문화적 대표자로써의 일본을 안이하게 전제로 하는 지극히 일본중심적인

발상으로 독선적인 논의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한편에서, 이미 살펴보았다시피 제

2차 지적협력 국내위원회 총회에서는 국제지적협력사업에서의 ‘국민문화’의 의의가 확인됨

과 동시에 ‘지역’의 문화적 자립화가 현저하였다. 따라서 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국내위원 회 총회라는 국제적인 장이 이러한 일본의 문화적 독선론을 표출할 기회를 준비하여 또 그 것이 다른 지역주의적 언설과 병렬화됨으로써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받아들여져 정당화되어 버렸다는 점일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문화의 특징의 실체성을 의심하지 않고 그 본질을 탐구한 히라이즈미, 하세가와에 비해 회의에도 제출된 니시무라의 논문은 이색을 띈다. 왜냐하면 그 논문에서 니시무라는 지적협력이 얼마나 실천되어야 하는지에 문제를 한정시켜 일본문화의 내실에 관한 논의는 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적협력을 철저하게 ‘방법화’함으로써 문화본 질주의적인 논의를 회피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37). 어쨌든 니시무라가

Cooperation and the Mutual Knowledge of National Cultural Genius, Tokyo, 1937, pp.1‐13. Hasegawa Nyozekan, “The Characteristics of Japanese Civilization”, Intellectual Cooperation and the Mutual Knowledge of National Cultural Genius, pp.33

‐48.

35) Kizoshi Hiraiyumi, “The Contribution of Japanese Culture to the World”, p.4.

36) Ibid., p.13.

37)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시아’의 실체성에 관한 논의를 회피하고 그것을 주체형성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도록 제안한 다케우치 요시미[竹内好]의 ‘방법으로써의 아시아’다(다케우치 요시미 ‘방법으로써의 아시아’ <일본과 아시아> 쓰쿠마쇼보, 1993년, 442−470페이지[초출은 1961년]). 이러한 방법은 1980년대에 시작되는 베네딕트 앤더슨에 대표되는 내셔널리즘의 구 성주의적 검토와도 통하는 것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니시무라의 논리를 다케우치나 앤더슨

1937년 지적협력 국내위원회 총회에서의 일본과 중국 국민문화, 지역, 국제적 문맥

-그 논문에서 국제지적협력방법에 대해 이론적으로 검토하고 일반화시키고자 한 것은 틀림 없다. 그때 니시무라는 국민문화의 특징인 상호이해로써의 지적협력에 대해 보편적인 방법 과 특수한 방법이 있다고 말하였다. 이를 니시무라는 문화인류학과 민속사(folk history)의 관계에 비유하여 문화인류학은 인류의 공통성을 대상으로 하고 민속사는 인류생활의 여러 가지 모습, 구체적으로는 국민적 특수성을 대상으로 한다고 설명하였다38). 그러나 “공통성 의 인식이 특수성의 인식에 선행하기 때문에 문화인류학의 개념은 민속사 연구에 필요조건 이다”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듯이 니시무라는 보편적인 방법이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39). 이처럼 니시무라는 어디까지나 인류의 공통성(세계문화)을 바탕으로 하여 그 바 탕 위에서 특수성(국민문화)의 상호이해를 시도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또한 니시무라 는 국민문화의 특징을 상호간에 이해하기 위한 활동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결론으로써 다 음과 같이 말하였다40).

“얼핏 보면 이러한 것은 국민적 사업의 범위를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약에 실제로 지적협력과 국민문화의 특징인 상호이해가 효과적으로 실천된다면 현재 세계를 뒤덮고 있는 의심, 질투, 공포와 같은 악감정은 사라지고 세계의 모든 민족은 상호이해를 바탕으로 평화와 안정을 누릴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세계는 가족>이라든지

<인류는 모두 형제>와 같은 종교가나 철학자의 꿈이라 생각되어온 개념이 결코 실현 불가능한 공상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이념임이 알려질 것이다. 41)

이와 같이 세계평화라는 지적협력의 보편적 측면과 국민문화의 상호이해라는 특수적 측 면이 일치, 조화될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니시무라에 의한 국제지적협력 의 방법론은 보편(세계)/특수(국민문화)의 이원론적 구성을 기초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사이를 매개하는 것으로 ‘지역’이 설정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국민문화의 특수성에 치우친 논리를 전개한 히라이즈미, 하세가와가 더 자주 지역개념을 참조하고 있었다는 점 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히라이즈미, 하세가와가 사용한 지역

과 같은 이론적 지평으로 논하는 것은 시대착오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38) Shinji Nishimura, “Intellectual Cooperation and the Mutual Knowledge between National Cultures”, Intellectual Cooperation and the Mutual Knowledge of National Cultural Genius, Tokyo, 1937, p.15‐16.

39) Ibid., p.16.

40) 니시무라가 제시한 구체적 활동은 ①서적, 잡지의 교환, ②각국국민문화를 대표하는 ‘표본’의 교환, ③유학생 교류, ④강의의 호환(Ibid., pp.26‐30).

41) Ibid., p.31.

개념은 세계에 대한 일본문화의 의의를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될 뿐이었고 다른 국내위원회 가 제출한 ‘지역’의 논리와 같은 선상에서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전혀 ‘지역’을 고 려하지 않았지만 국민문화의 특징인 상호이해로써의 지적협력을 방법으로써 검토한 니시무 라의 논리야말로 국민문화의 의의와 국내위원회의 역할을 중시하는 인식으로 선회하였던 제2차 지적협력 국내위원회 총회의 일반적 방향성과 더 일치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다음으로 중국의 대응을 살펴보자. 중국은 이 국내위원회 총회에 리스청[李石曽]과 옌 지츠[厳済慈]를 파견하였다42). 그러나 일본과 비교하면 중국의 대응에 눈에 띄는 점은 보 이지 않는다. 실제로 번역권에 관한 구체적인 제안을 하고 특별히 소책자까지 편집한 일본 과는 대조적으로 중국에서는 리스청의 보고서 ‘지적협력조직의 활동을 각국에 주지시킬 시 의 국내위원회의 역할’(Part played by the National Committees in making known in their own countries the Activities of the Intellectual Co‐operation Organisation) 이 제출되었을 뿐이었다. 이것은 당시의 일본, 중국 각각의 ICIC 및 국제연맹과의 관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즉 일본은 1933년에 국제연맹을 탈퇴한 이후에도 전문기관들과의 협력관계는 유지해갔으나 차츰 국제사회와의 대화채널이 닫혀졌기 때문에 이 국내위원회 총회의 장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알리고자 하는 강한 인센티브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 다43). 한편 중국은 1930년대 초부터 국제연맹과의 ‘기술합작’을 시작하여 양자간의 관계는 심화, 확대해갔고 1930년대 후반은 국제연맹과 중국과의 ‘밀월시대’이기도 하였다44). ICIC

42) 리스청(위잉;煜瀛)(1882‐1973)은 신해혁명 이전에 프랑스에서 활동하였던 아나키스트그룹 중 한 사람이다. 그 후 중국국내에서 우치휘(징헝;敬恒), 차이완페이[蔡元培]와 연명으로 ‘세계사’ 를 설립함과 동시에 프랑스에서 ‘근공검학’ 운동을 추진하고 리옹중법대학의 설립에도 관여하였 다. 난징국민정부에서는 주로 교육, 학술행정을 담당하였고 1937년 당시에는 국립북경연구원 원장. 그리고 1930년에 우치휘가 ICIC위원에 임명된 후 우치휘의 대리로 가끔 ICIC회의에 참 가하였다. 1933년에 설립되었던 지적협력 중국국내위원회인 ‘세계문화합작중국협회’의 회장은 우치휘였으나 ICIC위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명목적인 것이며 실제로 중국의 지적협력사업을 추진한 중심인물은 리스청이다. 옌지츠(1900‐1996)는 파리대학에서 수학한 물리학자. 당시는 국립북경연구원 물리연구소 소장.

43) 연맹전문기관들과의 협력관계도 1938년 10월 12일의 정부각의결정으로 인해 정지하게 된다. 그에 맞춰서 ‘학예협력위원회’도 해체되었다.

44) 연맹과 중국의 ‘기술합작’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張力<国際合作在中国:国際連盟角色的考 察、1919‐1946> 台北:中央研究院近代史研究所, 1999년, 제4장; Susanne Kuß, Der Völkerbund und China: technische Kooperation und deutsche Berater, 1928‐34, Münster: LIT, 2005; Margherita Zanasi, “Exporting Development: The League of Nations and Republican China”, Comparative Studies in Society and History, vol.49, no.1, pp.143‐169; Jürgen Osterhammel “’Technical Co‐operation’ between the League of Nations and China”, Modern Asian Studies, vol.13, no.4, 1979, pp.661‐680

1937년 지적협력 국내위원회 총회에서의 일본과 중국 국민문화, 지역, 국제적 문맥

-와 중국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1930년에 우치휘[呉稚暉]가 ICIC위원에 임명된 것을 계기 로 협력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이듬해 1931년에는 난징국민정부의 요청으로 ICIC에 서 ‘국제연맹 교육고찰단’이 파견되었다45). 또한 ICIC가 선임한 수 명의 유럽인 교수가 중 국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중국에서도 교육제도 시찰을 목적으로 한 사절단이 유럽에 파 견되었다. 이렇게 해서 중국에서도 1933년에 국내위원회인 ‘세계문화합작중국협회’가 설립 된 것이다46). 따라서 국제연맹과의 안정적인 의사소통 채널을 구축하였던 중국에게 제2차 지적협력 국내위원회 총회의 중요성은 일본이 생각한 것보다 낮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의에 제출된 리스청의 보고서는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이 니시무라가 제출한 논리와 겹치는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니시무라와 마찬가지로 리스청도 지적협력사업에서의 국민문화의 중요성에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각국에게는 각각의 전통, 특징, 개별 문화가 있다. ICIC는 몇 차례나 문명의 다양성을 인정한 바 있는데 그것은 실제로 인류공통의 유산을 풍요롭게 하는 다양성이다. 이러한 문명의 다양한 형태야말로 지적협력을 필요케 하는 것이다. ICIC와 각국간에는 특히 ICIC의 활동을 각국에 주지시키기 위해서는 국내위원회의 조직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 생각에는 이 점에 대한 국내위원회의 역할을 연구하는 것이 각국의 환경, 일어난 일들, 특별한 상황에 크게 좌우되는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다. 47)

이 발언에서 명확하게 알 수 있듯이 중국에게 지적협력이란 개별적이고 특수한 국민문 화를 바탕으로 그러한 것으로 구성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 점은 니시무라의 눈리와 겹치며 또 국내위원회 총회에서의 일반적인 논리의 방향성과도 일치한다. 이러한 인식 하 45) The League of Nations’ Mission of Educational Experts, The Reorganisation of

Education in China, Paris: League of Nations’ Institute of Intellectual Co‐operation, 1932.

46) ‘세계문화합작중국협회’에 대해서는 Organisation internationale de coopération in-tellectuelle, Commission Nationale Chinois de Cooprération Intellectuelle, Shanghai, 1937을 참조. ICIC와 중국의 협력사업의 개략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Tzesiung Kuo, China and International Intellectual Co‐operation, Nanking: Council of International Affairs, 1936; 張力, 전게서, 제4장. 그리고 중국의 관여에 의한 ICIC의 이념적 변화에 대해 서는 졸고 ‘국제연맹 지적협력 국제위원회와 중국—전간기 국제문화교류에서의 인식의 전회(轉 回)’ <와세다 정치공법 연구> 제85호(2007년)211‐245페이지를 참조.

47) Li Yu Ying, “Part played by the National Committees in making known in their own countries the Activities of the Intellectual Co‐operation Organisation”, Proceedings of the Second General Conference of National Committees on Intellectual Cooperation, Paris, July 5th‐9th, 1937, pp.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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