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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문제를 둘러싼 열강의 동향과 일본의 한국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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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국병합을 둘러싼 국제환경과 대한제국 외교의 좌절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면, 러시아는 이미 1906년 이즈볼스키 외상 취임에서부터 일본과 타협 관계로 돌아섰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22) 1905년 9월 portsmouth 조약 협상 당시만해도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 군사 및 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일본이 한국을 지도 보호 및 감리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데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고 하면서도, “한국 황제의 주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조항을 넣는 문제로 일본과 논란을 벌 이다가 “일본이 장래 한국에서 취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는 조치가 同國의 주권을 침해하게 될 경우에는 한국정부와 합의한 후 집행할 것을 성명한다"는 내용으로 결의 표명을 회의록에 기입하는 걸로 타결지었다.23) 즉 한국의 독립주권 문제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를 남겨둠으 로써, 그해 말 러시아는 1906년으로 예정된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대표를 초청,24) 국제회 의 석상에서 한국 문제를 다시 한번 거론하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1907년 만국 평화회의가 열린 시점에서는 7월 30일 제1차 러일협약에서 “러시아는 한일 양국 사이의 현행 조약 협약 관계 승인하며, 한일관계의 발전을 방해 간섭하지 않을 것"을 비밀리에 약속하고 말았다. 러시아가 외몽고에서의 특수이익을 일본으로부터 인정받는 대가로 한국에 대한 보호 권을 인정해 준 것이며,25) 이 점이 헤이그 특사의 지원 호소를 외면한 배경이었음은 주지하 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미 만주 권익을 놓고 일본과 공동으로 구미열강이 주장하는 open door policy에 대처하기 위해 한국문제를 포기한 러시아의 최종 승인을 얻어내기 위해 1910 년까지 한국 병합을 유보했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여겨진다.

문제는 이 시기 만주철도 문제를 비롯, 동아시아 진출에 가장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던 미국의 태도로서, 1909년 3월 T.Roosevelt에 이어 대통령직을 승계한 ‘桂-Taft Memo'의 주역 William H.Taft는26) Roosevelt의 친일적 동아시아 정책 기조를27) 유지하리라는 일 반적인 기대와는 달리 P.Knox 국무장관과 함께 적극적인 달러외교를 펼치며 일본과 대립 하였다. 러일전쟁 종군기자로서 일본의 만행을 목격하였고 1905년 서울 주재 영사를 지내

22) 최덕규, 2007「제2차 만국평화회의와 러시아의 동아시아정책」『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와 대한 제국, 그리고 열강 국제학술회의자료집』

23) Raymond A.Esthus, 1988 Double Eagle and Rising Sun-The Russians and Japanese at Portsmouth in 1905, Duke University Press

24) 徐榮姬, 2008「고종황제의 외교전략과 제2차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백년후 만나는 헤이그 특사』(李泰鎭 편), 태학사, 69쪽

25) 日本外務省 편, 『日本外交年表竝主要文書』280-281쪽

26) Tyler Dennett, President 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 Current History xxi, 1924 27) 김기정, 1990 「1901-1905년간의 미국의 대한정책 연구(1)-데오도르 루스벨트의 세계관의 분 석을 중심으로」『동방학지』66, 213쪽 및 김기정, 1993 「1901-1905년간의 미국의 대한정책 연구(2)-대통령과 국무성 관료들의 역할의 비교분석」『동방학지』80, 68-69쪽

며 반일감정을 가지게 된 봉천 총영사 Willard Straight도28) 미국자본의 만주철도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Elihu Root 국무장관이나 W. Rockhil 주중공사의 입장과는 다른 정책기조를 보여주었다. 미국이 이처럼 일본의 만주이권 유지에 정면 도전 함에 따라 영국 언론도 반일 기조로 전환하였다.

일본의 만주진출은 1907년 8월 통감부 간도파출소 개설로 본격화 되었고, 이에 대한 청 의 반발은 1909년 3월 간도문제를 비롯한 일본과의 문제를 헤이그 중재재판소에 회부한다 는 통고로 현실화되었다. 일본은 만주진출에 대한 청의 반발과 구미멸강의 의구심을 해소 하기 위하여 1908년 9월, 제2차 桂 내각의 小村 외상이 각의에 제출한 <대외정책방침>에 서 영일동맹, 러일협약, 불일협약 체제를 견지하고 배일론 방지를 위한 미일협상 체결을 시 도하기로 결정하였다.29) 그 결과 만주에 관한 제 안건을 간도 영유권 문제와 일괄타결을 시도하여 1909년 9월 간도협약을 체결하였다.

1909년 4월 山縣이 제시한 <제2 對淸政策의견서>에 의하면, 일본측에서는 만주문제를 둘러싸고 열강이 모두 적이 되는 상황이 된다면 그것이 한반도에 영향을 미쳐 아직 보호국 상태에 불과한 한국을 다시 포기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점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더구나 ‘자치육성'이라는 표방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의병항쟁 등 반일저항이 이어지고

있는 현실은 보호국화 이후 일본의 한국통치 실적에 대해 구미열강의 비판적인 태도를 가 져왔다.30) 따라서 구미열강의 만주문제에 대한 불만이 보호국 상태인 한국에서의 일본의 독점적 지위 확보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판단하에 일본정부는 서둘러 1909년 7월 6일자로 병합 방침을 결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열강은 1909년 9월 청일간의 협약 체결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고 있었고 이러 한 분위기는 미국과 러시아의 상호접근을 가져왔다. 이러한 움직임을 보이는 러시아를 일 본쪽으로 견인하기 위해 伊藤은 Kokovsoff와 하얼빈에서 회담을 시도한 것이고, 그것이 안중근의 저격사건으로 무산된 것이다. 이에 미국은 다시 1909년 12월 만주철도중립화안을 제시하고 구미열강이 공동으로 일본의 만주이권 독점을 억제하자고 제안하였다. 주러시아 대사 Rockhil은 이미 11월에 미러동맹을 제안한 바 있고, 주러 일본대사 모토노本野一郞도 같은 시기 새로운 러일협약 체결을 이즈볼스키에게 제안하였다. 러시아에 대한 미일 양국 의 견인책이 경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는 영국이 일본의 小村 외상의 부탁을 받고 러

28) Herbert Croly, Willard Straight, The MacMillan Company, 1924 29)『小村外交史』

30) 원래 반일적인 Paris Figaro지 뿐아니라, 조심스러운 영국신문인 Manchester Guardian지도 일 본의 한국정책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New York Observer and Chronicle 1909.12.9 기사 참조.

일본의 한국병합을 둘러싼 국제환경과 대한제국 외교의 좌절

시아를 설득함으로써 1910년 1월 러시아가 미국의 제안을 거부하고 1910년 3월 제2차 러 일협약을 체결하기로 결정되었다. 4월에는 러시아가 한국 병합을 최종 승인하였으며, 5월에 는 영국의 승인이 있었으므로 일본은 6월, 병합추진을 위한 拓植局을 설치하였다. 7월에는 제2차 러일협약이 정식으로 체결되고, 8월 22일 한국과 일본은 병합조약을 체결하였다.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러시아와 영국의 최종 병합 승인이 일본의 한국 병합 단행의 국제 적 인 조건처럼 보이지만, 병합 추진의 직접적인 동인은 만주문제로 인하여 한국 문제까지 영향을 받는 것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방어적인 자세, 구미열강, 특히 미국의 개입 가능성에 대한 우려에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미국에는 병합 사실을 사전에 통보조차 하지 않은 일본의 태도는, 포츠머스 회담 진행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롱아일랜드 사가모어 힐 자택까지 가서 면담한 이승만이 ‘일인들이 장차 미국의 후환이 될 터이니 지금 한국을 도 와 일인들의 계획에 빠지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했던 사실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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