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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회 사

동북아역사재단과 ‘동아시아사연구포럼’이 주최하는 ‘동아시아의 역사서술과 평화 : 사 회, 국가, 세계’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해 주신 국내외 여러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 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귀한 시간을 내어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내빈들과 방청객 여러분 께도 감사드립니다.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동아시아 각국은 그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이는 거의 숙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 아 각국의 역사적 관계를 살펴볼 때, 평화적인 교류와 협력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에 못지않은 숱한 갈등과 분쟁도 있었습니다. 특히, 근대 이후 동아시아 각국 사이는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로 갈라지면서 일정한 갈등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그 갈등의 여파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존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 는 역사서술 문제에서 매우 첨예하게 드러나는데, 근자에 들어 쉽사리 각국 국민 간의 감 정적 대립으로까지 비화되곤 했습니다. 이런 ‘역사 문제’는 기본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이 자국 중심주의에 입각하여 역사를 서술하고 있음에 기인합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이후 동아시아 각국의 경제적 성취는 동아시아가 모처럼 세계사에 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 호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그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좋은 기회가 相生 번영으 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평화와 협조라는 선결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역사서 술 문제가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에 장애 요인으로 작용한다면, 우리는 장기적으로 역사 인식의 공유를 통해 화해와 반성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이번 국제학술회 의가 평화를 화두로 동아시아의 역사서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와 국내정세는 급격하게 상호의존의 방향 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동아시아는 장차 정치를 비롯한 각 분야에서 평화적이 고 우호적이며 협조적인 지역 공동체의 형성을 전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 학술회의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와 국가, 세계 안에서 동아시아가 역사서 술을 통하여 평화를 구축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식 민지와 전쟁에 대한 역사기억이 어떻게 형성되고 작동하였는가를 면밀하게 고찰해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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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사연구포럼과 동북아역사재단이 함께 마련한 국제학술회의는 어느새 4년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매년 개최되는 이 학술회의가 동아시아사연구자들의 교류와 신뢰에 기 여하고 학문공동체의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발표와 토론을 통한 논 의 속에서 서로에 대해 우정을 쌓으며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누어, 궁극적으로 동아시아 공 동의 역사인식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쁘신 일정에도 불구하고 오늘 자리를 함께 해주신 발표자와 토론자, 사회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리며, 이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많은 애를 쓰신 여러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 니다. 2010년 11월 5일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정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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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ing Address

I would like to express my sincerest thanks to all the scholars from home and

abroad, participating in this international conference, “The Historiography and

Peace of East Asia: Society, Nation, and the World,” hosted by the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and the Forum for the Study of East Asian History.

My sincerest thanks also go out to all the guests and the members of the

audience who have taken time out of their busy schedule to be here.

From the ancient time till now, East Asian countries have been closely

interacting one another, culturally, politically, and economically, owing to their

geographical proximity. Our interwoven past and present cannot but be said to

be fate. Looking back on the historical interactions among East Asian nations,

our relations have not always been peaceful and cooperative: we have had

conflicts and disputes as much as peaceful exchange and cooperation. In

particular, the modern era witnessed the emergence of a structure of conflict as

the nations of East Asia were split into imperialist and colonized or semi

colonized states. This structure of conflict still continues to affect us, threatening

the peace and coexistence of East Asian nations. When it comes to

historiography, the conflict is manifested even more acutely and stridently these

days, sometimes igniting emotional confrontation among the citizenries of the

involved countries. This ‘problem of history’ stems fundamentally from the

nationalistic historiography of individual East Asian nations.

Since the late 20th century, however, the economic success of East Asian

nations is offering East Asia a golden opportunity to occupy a more distinctive

position in the world’s history. The region’s presence in the world is growing in

every area, from politics, economy, society, to culture. In order to materialize

this golden opportunity to build mutual prosperity that benefits all, peace and

cooperation among East Asian nations must come first. To this end, if

historiography interferes the peace and prosperity of East Asia, then for the long

run, we must seek to retrospect and reconcile through building shared histor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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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East Asia with peace as its central theme.

Drastic changes in the domestic and international environment of East Asian

nations these days steer us toward a more interdependent orientation. And this

allows us to project the formation of a regional community in East Asia,

peaceful, harmonious, and cooperative in every regard including politics.

As the title of this conference suggests, the purpose of this event is to find

ways to establish peace in society, nation, and the world through consensus

building in the historiography of East Asia. To fulfill this purpose, we have to

thoroughly inspect how our historical memories about colonization and war have

been constructed and how they operate. From then on, we can move forward,

from conflict to reconciliation and to mutual prosperity.

This international conference hosted by the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and the Forum for the Study of East Asian History marks its 4th anniversary

this year. I strongly believe that the conference will enhance cooperation and

trust among the scholars of East Asian history and play an important role in the

formation of a scholarly community of East Asian historians. I hope, in

addition, that it will serve as an occasion for us to strengthen friendship and

foster continuous dialogues for the future as we share ideas and opinions

through presentations and discussions. Ultimately, I hope that this function will

lay a foundation to build a collective historical consciousness shared by all East

Asian nations.

Once again I would like to thank all the presenters, discussants, and moderators

who participate in this international event despite their busy schedule. I also

extend my gratitude to those who have worked hard to make this conference

possible. Thank you.

November 5, 2010

CHUNG Jae

‐jeong

President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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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 영 사

동아시아사연구포럼이 발족한지 벌써 3년이 되었습니다. 2008년의 “동아시아의 지식교 류와 역사기억”, 2009년의 “역사적 관점에서 본 ‘동아시아 세계’의 아이덴티티와 다양성”에 이어 이번에는 “동아시아의 역사서술과 평화: 사회, 국가, 세계”란 주제로 여러분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타이완, 일본, 중국, 그리고 한국의 여러 도시로부터 오신 여러분을 포럼 운영 위원장으로서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번 회의는, 나카무라 마사노리 선생의 “戰後史 중의 안보 체제”란 제목의 기조강연에 이어, 동아시아 지역질서와 평화의 가능성, 갈등에서 화해로의 길, 동아시아의 역사서술과 평화의 길, 동아시아의 전쟁과 화해, 동아시아의 상호이해와 평화, 동아시아의 평화구상과 사상적 모색 등 6개의 패널로 구성되었습니다. 어느 것이나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를 염 원하는 소원을 담고 있습니다. 20세기는 근대화란 시대과제 아래 우열 비교의 역사관의 시 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제국주의의 힘겨루기 의식으로부터 역사학도 지배, 피지배의 처지를 막론하고 영향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반면에 21세기에 접어들어 우리의 화두는 평화로 바뀌었습니다. 세기가 바뀌면서 한 ․ 중 ․ 일 3국의 경제뿐만 아니라 생활의 기술적 수단이 새로운 차원으로 발달하여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에도 근본적 변혁이 일어나고 있는 데 따른 변화가 아닌가 합니다. 국가 간의 무역도 다변화하여 독점이익이란 것이 존재하기 어렵게 된 구조 속에 공존관계의 필수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 라고 믿어집니다. 우리 역사학자들은 이 새로운 조류가 속히 큰 힘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 록 동아시아의 경험을 반추하면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작업에서는 국경을 넘어서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 포럼의 가치가 새삼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발표문과 토론문 작성을 위해 기울이신 여러분의 노고에 대해 운영 위원장으로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 학문적으로 노력하 시는 여러분의 충정을 진실로 존경합니다. 올해, 한일 양국의 지식인들은 일본에 의한 한국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한 가지 큰일 을 해내었습니다. 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공동 성명이 지난 7월 28일에 일본 측 520여 명, 한국 측 580여 명의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특히 일본 측 서명자의 수가 500명을 넘었 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역사학자로서 참가한 수가 260여 명이나 되었 습니다. 이것은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역사의 진실을 존중한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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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직한 방향에 대한 학자적 신념이 유감없이 발휘된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지식인의 노력은 한일 양국을 넘어 한ㆍ중ㆍ일 3국, 아니 아시아를 넘어 인류 전체의 미래를 끄는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동아시아사연구포럼이 목표하는 것도 바로 이런 정신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노고가 인류의 미래를 밝게 하는 힘이라는 자부 심으로 이틀간의 회의에 임해주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 회의 준비를 위해 수고하신 관계자 여러분에게도 고맙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2010년 11월 5일 동아시아사연구포럼 운영위원장 이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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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Speech

It has been three years since the Forum for the Study of East Asian History

was founded. The Forum first hosted an international conference in 2008 on the

theme of “Intellectual Exchanges and Historical Memories in East Asia,”

inviting scholars from home and abroad, and held another conference in 2009

on “Identity and Diversity of the World of East Asia, from a Historical

Perspective.” At this year’s conference, we will be exploring the theme of “The

Historiography and Peace of East Asia: Society, Nation, and the World.” As

Chairperson of the Forum, I would like to express my sincere welcome to all

the participants and guests from Taiwan, Japan, China and Korea.

This year’s conference begins with Dr. Nakamura Masanori’s keynote speech on

“The Security System in the Postwar History,” followed by six panels of

presentation and discussion on the topics such as: the Regional Order and

Possibility of Peace in East Asia; the Road from Conflict to Reconciliation; the

Historiography of East Asia and the Path to Peace; War and Reconciliation in

East Asia; Mutual Understanding and Peace

‐building in East Asia; and Peace‐

building and Thought System. All these panel topics reflect our wishes for the

peace of East Asia.

It is not too far

‐fetched to say that the historiography of the 20

th

century, an era

of modernization, was predominated by historical narratives based on

chauvinistic ideas of supremacy and inferiority. The imperialistic idea of power

struggle seems to have permeated the psyche of the historians of that time,

regardless whether they were oppressors or oppressed.

The start of the 21

st

century, however, has introduced a new central theme to

historical narratives, namely,

peace. With the turn of the new century, three

countries, Korea, China and Japan have seen a new dimension of development

not only in economy but also in daily technology. It seems that this newly

gained affluence and technological advance has fundamentally changed our

perception on international relations, thus inducing a new trend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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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wareness for the necessity of coexistence. For this new trend to firmly take

root in the world in the near future, we historians must not cease in our efforts

to provide a new vision, as ruminating the experiences of East Asia. Such

efforts should be made trans

‐nationally, and in that regard, I feel, lies the

significance of this Forum. As Chairperson of the Forum, I would like to thank

all the presenters and discussants for their preparation for this conference. My

deepest respect and appreciation go out to all the scholars here for your earnest

academic endeavors to establish true peace in East Asia.

This year, we have achieved a great milestone in the wake of the 100

th

anniversary of Japan’s forced annexation of Korea. On July 28, more than 520

intellectuals from Japan and more than 580 from Korea issued a joint statement

pronouncing the illegality of the annexation. Particularly surprising is that the

number of the Japanese signers was over 500, of whom 260 were historians.

This is a great feat of achievement that shows Japanese historians’ respect for

historical truth. As one of the Korean initiators of the statement, I was

profoundly moved by the response from the Japanese participants. It is an event

where scholars’ conviction for historical truth and for desirable historical

direction has triumphed. I strongly believe that this kind of efforts from

intellectuals can be a driving force to lead all humankind to a better future,

transcending the scope of Korea

‐Japan or Korea‐Japan‐China, or even Asia. This

very sprit, I believe, is what our Forum for the Study of East Asian History

pursues as a goal. I hope everybody here to participate in two days of

conference with pride and conviction that your efforts will illuminate the future

of humankind. Finally, I would like to extend my sincere gratitude to those who

have worked hard to make this event possible. Thank you.

November 5, 2010

YI Taejin

Chairperson

Forum for the Study of East Asia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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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Conference

Date: November 5(Fri) ~ 6(Sat), 2010 Venue: Hotel GrandHilton Seoul

2010. 11. 5(Fri)

November 5, 2010

09:00~09:30 Registration

09:30~10:00 Opening Ceremony 빳 Grand Ballroom 2F Presider 琴京淑 (KEUM Kyungsook, 東北亞歷史財團) Opening Address 鄭在貞 (CHUNG Jae-jeong, 東北亞歷史財團 理事長) Welcome Speech 李泰鎭 (YI Taejin, 東아시아史硏究포럼 運營委員長) Introduction of the Participants

10:00~10:30 Plenary Session 빳 Grand Ballroom 2F Keynote Speech 中村政則 (Nakamura Masanori, 一橋大学) : 戦後史の中の安保体制ー日米中のトライアングル (전후사 속의 안보체제-일·미·중의 트라이앵글) Photo Session : 사회, 국가,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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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아시아 地域秩序와 平和의 可能性

Moderator Panelist-1 Panelist-2 Panelist-3 Discussant 金容德 (光州科學技術院) 安田佳代 (東京大学) : 極東衛生事業の展開と日本対国際機関外交 国際連盟から国際連合へ (극동위생사업의 전개와 일본의 국제기구외교 - 국제연맹에서 국제연합으로 -) 斎川貴嗣 (Heidelberg University) : 1937年知的協力国内委員会総会における日本と中國 国民文化、地域、国際的文脈 (1937년 지적협력 국내위원회 총회에 있어서의 일본과 중국 - 국민문화, 지역, 국제적 문맥 -) 徐榮姬 (韓国産業技術大学 教養学科) : 日本의 韓国併合을 둘러싼 国際環境과 大韓帝国外交의 좌절 辛圭煥 (延世大) 金旼奎 (東北亞歷史財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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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13:30

Session I

Panel 1-2(White Heron Room)

葛藤에서 和解로의 길

Moderator Panelist-1 Panelist-2 Panelist-3 Discussant 裵京漢 (新羅大) 陳紅民 (浙江大学) : 现实政治与历史研究 - (현실정치와 역사연구 -중국 대륙에서의 장제스연구(1949~2000)-) 芝崎厚士 (駒澤大学 グローバルㆍメディアㆍスタディーズ学部) : 国際文化と世界共和国 朝永三十郎と田中耕太郎 (국제문화와 세계공화국 - 도모나가 산주로(朝永三十郎)와 다나카 고타로(田中耕太郎) -) 李向平 (華東師範大学) : 协调型信仰模式的历史构成 以中国信仰的实践逻辑为例 (조화형 신앙모델의 역사적 구성 - 중국 신앙의 실천논리를 중심으로 -)

Daqing YANG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朴晉雨 (淑明女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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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아시아의 歷史敍述과 平和의 길

Moderator Panelist-1 Panelist-2 Panelist-3 Panelist-4 Discussant 荒井信一 (茨城大) 张连红 (南京师范大学) : 南京大屠杀的历史记忆与东亚和平 以医治战争创伤为中心的讨论 (남경대학살의 역사기억과 동아시아평화 - 전쟁 상처 치유를 중심으로- ) 周永生 (中國外交学院) : 东北亚的历史结构、外交、国际关系理念与未来前途 (동아시아의 역사구성, 외교, 국제관계 이념과 미래전망) 川島真 (東京大学 大学院総合文化研究科) : 日中歷史認識問題の淵源 -1910-40年代の敎科書問題-(일ㆍ중 역사인식문제의 심원 - 1910~40년대의 교과서문제 -) 林相先 (東北亞歷史財團) : 東아시아 歴史에서의 相互認識 신라 崔致遠과 송 徐兢의 견문기를 중심으로 -李銀子 (全北大) 吳炳守 (成均館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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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18:30

Session II

Panel 2-2(White Heron Room)

東아시아의 戰爭과 和解

Moderator Panelist-1 Panelist-2 Panelist-3 Panelist-4 Discussant 吳密察 (臺灣成功大) 袁成毅 (杭州師範大學) : 日本的戰爭責任與戰后賠償責任 (일본의 전쟁책임과 전후배상책임) 姜義華 (上海複旦大) : 朝鮮戰爭爆發的不同曆史記述與東亞國際格局的變遷 (한국전쟁 발발에 대한 다른 역사기술과 동아시아 국제정세 변화) 楊典錕 (國立臺灣大學歷史學系) : 日韓中關係與日華關係的連動 - 韓國併合前的‘顧問政治’對日華二十一條的影響 (일·한관계와 일·중관계의 연동 - 한국 합병 전 ‘고문정치’가 대중국 21조에 미친 영향) 朴泰均 (서울大) : 韓国戦争、베트남 戦争의 記憶과 参戦의 悪循環 柳鏞泰 (서울大) 朴敬石 (仁川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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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13:00

Session III

Panel 3-1(Swan Room)

東아시아 相互理解와 平和

Moderator Panelist-1 Panelist-2 Panelist-3 Discussant 步平 (中国社会科学院 近代史硏究所) 家永真幸 (東京大学大学院) : 日中友好とパンダ神話 (일·중 우호와 팬더신화) 李长莉 (中国社会科学院 近代史研究所) : 甲午战争前日本考察者的 “中国叙述” - 中华文教衰亡与东亚秩序的转折 (갑오전쟁(청일전쟁)이전 일본 관찰자의 “중국서술” - 중국 문화, 교육의 쇠락과 동아시아질서의 전환 -) 裵城浚 (東北亞歷史財團) : 東아시아 民衆史의 可能性 한ㆍ일 민중사의 遭遇 -咸東珠 (梨花女大) 裵亢燮 (高麗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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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13:00

Session III

Panel 3-2(White Heron Room)

東아시아의 平和構想과 思想的 摸索

Moderator Panelist-1 Panelist-2 Panelist-3 Discussant 金度亨 (延世大) 王新生 (北京大) : 椭圆、平衡、和平、合作 — 大平正芳的综合安全保障战略 — (타원、균형、평화、협력 -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의 종합안전보 장 전략 -) 徐志民 (中國社會科學院 近代史研究所) : 中國人眼中的日本和平運動 以‘人民一報’的報道爲中心 (중국인의 눈으로 본 일본 평화운동 -‘인민일보’의 보도를 중심으로-) 辛珠柏 (延世大) : 韓國 近現代 平和運動論 探索 民族運動과 民主化運動을 中心으로 -金喜坤 (安東大) 朴淳遠 (成均館大) 14:00~18:00

Session IV

14:00~16:30 Moderator 16:30~18:00 Moderator

(Swan Room, White Heron Room) Round Table Discussion

步平 (中国社会科学院 近代史硏究所), 白永瑞 (延世大) Discussion and Clo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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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note Speech • 戦後史の中の安保体制ー日米中のトライアングル / 中村政則 ··· 19

Session Ⅰ

Panel 1-1 • 極東衛生事業の展開と日本対国際機関外交 国際連盟から国際連合へ -/ 安田佳代 ··· 41 • 1937年知的協力国内委員会総会における日本と中国 国民文化、地域、国際的文脈 -/ 斎川貴嗣 ··· 75 • 일본의 한국병합을 둘러싼 국제환경과 대한제국 외교의 좌절 / 徐榮姬 ··· 139 Panel 1-2 •现实政治与历史研究:中国大陆地区的蒋介石研究(1949-2000) / 陈红民··· 167 • 国際文化と世界共和国 朝永三十郎と田中耕太郎 -/ 芝崎厚士 ··· 201 •协调型信仰模式的历史构成 - 以中国信仰的实践逻辑为例 / 李向平···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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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note Speech

中村政則 (一橋大学)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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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後史の中の安保体制-日米中のトライアングル

戦後史の中の安保体制

-日米中のトライアングル

中村政則

(一橋大学)

はじめに

私の専門は日本近現代史です。講義では、ペリー来航、明治維新、自由民権運 動、産業革命、日清・日露戦争を経て、大正デモクラシー、昭和恐慌、15年戦争、 敗戦占領(GHQ革命)までを講義してきました。講義時間に余裕があれば高度経済成長 と安保、グローバル金融危機で締めくくります。いわば日本近代史一五〇年間を総体に話 してきたことになります。とくにきょうの講演のテーマである安保は、私が学部三、四年のとき の同時代史であり、いまなお記憶に残る生きた実体験です。早速、本題に入ります。

戦後史とは 日本国憲法体制と日米安保体制との相克・矛盾のシステム

戦後史とは何か、敗戦、マッカーサーによるGHQ革命を経て、1950年朝鮮戦争と 1951年のサンフランシスコ講和条約の締結までを一つの区切りとすることができます。 1956年の『経済白書』は、「もはや戦後ではない」と書きましたが、私の理解でも、 1950年代は戦後史の中の最大の岐路でした。 GHQの占領革命について詳しくは述べませんが、経済改革の主要な三本柱であった 農地改革・労働改革・財閥解体が1955年以降の日本経済の発展を可能にしました。① 農地改革は小作農民を解放し、自作農民を大量に作りました。それまで生産物(米・ 麦)の半分を小作料として地主に納入してきましたが、改革後は米を自由に販売し、農業 所得は増加した。そして1950年代には、農家の購買力は増加し、国内市場の拡大に役 立ったのです。50年代後半から、自動車、電気洗濯機、電気冷蔵庫、白黒テレビなど が農村に普及し、高度成長に寄与しました(トヨタ自動車、松下電器(ナショナル)など の発展)。労働改革についても、日本の労働者は組合結成権、団体交渉権、争議権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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労働三権を史上初めて入手し、経営者に対抗する力を得ました。そして1949年の労組法 改正を画期に、1950年代には相次ぐ大争議(“英雄なき113日間の闘い“の三鉱連争 議、日産争議など)が勃発するのです。この歴史的経験を経たあと、経営側も巻き返 し、協調的企業別組合が成立します。こうして世界にもまれな企業への忠誠度の高いホワ イト・カラー=職員層と、ブルー・カラー=工員層が出現・定着したのです。 財閥解体も三井・三菱・住友・安田の4大財閥は、GHQ命令で解体されました。財 閥解体とは(1)持ち株会社の解体、(2)財閥家族の企業支配力の排除、(3) 株式所有の分散化の3つからなっていたが、これによりソニー、ホンダ、キャノンなどの革 新的企業が台頭し、財界に活力を吹き込みました。いわばビッグ・ビジネスを中心とする 寡占的競争構造が出来上がり、60年代の経済成長を加速させたのです。 政治改革としては、日本国憲法の制定が最重要です。第9条の戦争放棄と象徴天皇 制の存置が大きい。みなさんご存知のように、天皇制の存置と戦争放棄はワンセットでし た。つまり天皇制は残すが、他方で戦前の侵略主義の復活は認めない。ソ連、中国、 オーストラリア、ニュージーランド、フィリッピン、韓国など国際世論は天皇制(天皇)自 体の存在を認めなかった。したがって、天皇を中核にして戦前のような侵略主義的な国家 体制をつくろうとすること自体、アナクロニズム(時代錯誤)であり、国際公約違反です (ポツダム宣言・参照)。われわれは、まずこの出発点を確認しておく必要があります。 1951年9月、吉田茂首相はサンフランシスコのオペラハウスで講和条約にサインしたあ と米陸軍総司令部を訪れ、日米安保条約に署名しました。米側で署名したのはダレス国 務長官補佐官とアチソン国務長官の2人だけでした。その条約内容は、アメリカ軍は日本 の防衛義務はない、条約期限はなく、内乱条項があった。つまり朝鮮半島に有事(戦争な いし内乱など)があって、在日米軍40万が朝鮮半島に出撃し、日本本土が空(から) になった隙に内乱があった場合には警察予備隊で鎮圧するという、植民地的で一方的な内 容でした。それに加えて1947年9月の天皇メッセージがありました。これは昭和天皇から シーボルト政治顧問を経て、マッカーサー宛ての手紙ですが、それにはこうあります。 「天皇は米国が沖縄その他の琉球諸島に対する軍事占領を続けてほしい、それはロシ アの脅威だけでなく、占領が終わったのちに右翼、左翼勢力が台頭し、内政に干渉する のを防ぐためにも有益である」というのである。本音は皇室を守るためにも、アメリカは引き 続き沖縄の軍事占領を継続してほしいというのである。シーボルトは天皇の「私益」を感じ ると感想を述べているが、サンフランシスコ講和条約第3条で、沖縄は日本本土から切り 離され、米軍基地の半恒久化を運命づけられた。これが日本の対米従属の構造を今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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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後史の中の安保体制-日米中のトライアングル 至るも規定し続けたのであります。

安保闘争

1952年に確定されたサンフランシスコ体制は、1960年の安保改定で、大きく変わりま した。吉田茂が結んだ安保条約は、①米軍が望めばどこにでも基地を置ける全土基地方 式であり、②内乱条項を規定し、「下からの革命」を圧殺する意図を示しました。いわゆ る「植民地的片務性」です。これを「双務的条約」に変えようとしたのが、岸信介首相 による“60年安保”です。岸信介は、安保改定に向かえば、それに対する国民的反対運 動が起こると予想し、その先手を打って1958年警察官職務執行法(警職法)改定に乗り だしました。警職法は警察官による職務質問や所持品調べの権限を拡大し、国民の集 会・デモなどの自由を大幅に制限するものでした。 このとき私は大学2年生であり、友人と一緒に国会へ行き、衆議院議員会館で当時の 首相岸信介と社会党委員長片山哲との一大論戦を見ました。国会の中に入ったのは初めて ですが、与野党党首の気迫に満ちた対決を見ることができたのは、ラッキーでした。今で も鮮やかに覚えています。この警職法反対闘争は、社会党・総評など65団体が、警職法 改悪反対国民会議をつくり、反対闘争をリードしました。結局、野党側が勝利し、岸首相 は警職法の廃案に追い込まれました。反対派が政治闘争で勝利したのは、戦後史の中で も初めての経験であり、この勢いが翌年に始まった安保闘争に引き継がれたのです。 安保闘争は、10万人から30万人のデモ隊が1~3か月にわたって国会を取り巻くという 日本近代史上最大の国民運動にまで発展したのです。ちなみに(李承晩政権を倒した韓 国の学生たちによる)4・19革命は、安保闘争の最中のことであり、国会を取り巻いてい た労働者、学生、市民のデモ隊を大いに勇気づけました。 このとき作家の堀田善衛が、国会近くの三宅坂の街路樹の傍らで、この学生デモを凝 視している姿を私は目撃しました。そのころ堀田は島原の乱をテーマとする、代表作『海 鳴りの底から』を執筆準備中でした。

安保体制の三段階

さて今年(2010年)は「安保50年」に当たることから、「安保とは何か」の議論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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テレビ、新聞などのマスメディアで紹介されています。その中で私の目に留まったのは森 英樹(名古屋大学教授、専攻憲法学)の「軍事同盟のないアジアと日本」(雑誌『法 と民主主義』2010年8月、日本民主法律家協会)という論文です。森論文は、明示し ていませんが、私のtrans‐war historyの方法を用いて、日米安保の三段階を整理した ものです。trans‐war historyの方法については、ご存知ない方もいると思いますので、 「注記」で、書いておきました。 *Trans‐war historyとは何か。戦争は国際関係を大きく変え、国内の政治経済、 社会構造に激変をもたらし、人々の考えを大きく変える。戦争が終わったからといって、そ の影響はきえるわけではない。とくに第二次世界大戦は、第一次世界大戦と違って、銃後 の社会を変えた。その影響は戦後の政治・経済・社会の在り方にもおよぶ。従来のように 「断絶か、連続か」という二者択一の考え方を超えて、新たな視点から戦後日本史とは 何であったかを総合的に見直してみたい。 この「貫戦史」の方法を従来の研究史の中に位置づけると、戦前と戦後の連続・断 絶論争がありますが、「貫戦史」はむしろ連続節に属します(略)。 「貫戦史」は、連続・断絶の両面を、しかもグローバルな視点から追求する。明治 維新が復古(restoration)、革命(revolution)、改革(reform)の三側面を持っ ていたように、私は戦後改革を(前近代残存、近代化、現代化)の三層の重層的改革と 捉えました(中村政則『経済発展と民主主義』岩波書店、1993年。同『現代史を学 ぶ』吉川弘文館、1997年)。つまり、戦後日本をプレモダン、モダン、ポストモダンの 三層の構造が詰まった歴史として把握しようというのです。 しかも、戦後日本の歴史は日米関係を抜きにして捉えることはできない。日本はサンフ ランシスコ講和条約を締結してから、軍事と外交の面で完全に対米従属の構造が決まりま した。これは他面で、対米協調の側面はあるのですが、軍事・外交の面では従属的側 面が強いことは明らかです。たとえば1995年9月4日、沖縄で米兵3人による女子小学生 暴行事件が起こりました。あのとき沖縄県警は米兵3人について逮捕状をとり、身柄の拘束 を要求しましたが、アメリカ側は日米地位協定を盾に拒否しました。さらに2005年米軍の 大型ヘリコプターが墜落しましたが、沖縄県警は現場検証を米軍に拒否された。 ここで本題に戻ります。  森教授によると、日米安保同盟は、三つの「戦争」を節目に変化してきたといいま す。 ①ベトナム戦争、②湾岸戦争、③2001年の9・11事件を契機として今に続く「対テ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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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後史の中の安保体制-日米中のトライアングル 戦争」の3つです。 第一に、米国がベトナム戦争に敗退した1975年が起点になります。敗北を契機に、 米国は、日本への負担・役割の強化を求めるようになりました。1978年の「日米防衛協 力指針」(ガイドライン)は「安保条約上の事前協議制、憲法上の制約、非核三原則 は協議対象にしない」(持たず、作らず、持ち込ませず)との合意の上に、日米同盟の 強化に向かった。また同じ年に、いわゆる「思いやり予算」がスタートした。米軍地位協 定24条には、日本は基地を提供するが、基地の維持費は米軍の負担とすることになって いました。ところが、基地の維持費も日本が負担するようになった(最初は62億円だった が次第に増大、2010年は1233億円を予算に計上!)。日本は9条があるにも関わら ず、戦争をする軍事大国アメリカとの一体的同盟関係を構築するようになりました。 第二に、湾岸戦争が日米同盟の強化をもたらしました。96年の橋本首相とクリントン大 統領が署名した「日米安保共同宣言」は、軍事的協働関係をさらに拡大し、「安保再 定義」といわれた。もはや安保は安保でなく、新たな軍事的同盟にまで変質したということ です。 第三に、2001年の9・11事件を契機として今に続く「対テロ戦争」は、小泉政権の 対応で、一気にグローバル化しました。事件直後、小泉首相は訪米し、ブッシュ大統領 と共同声明を発表、地球規模での日米同盟を謳いました。イラク戦争で、「戦闘地域」 に自衛隊を派遣したのは、小泉首相が初めてです。あのときは自衛隊員の死者は出ませ んでしたが、死者が出れば小泉内閣はすっ飛んだ(総辞職)でしょう。 以上のように、安保条約は次第に拡大・変質し、21世紀を迎えました。

安保と高度経済成長

1950年の朝鮮特需、朝鮮動乱による米軍の特別調達があって日本経済が潤っていく というところから、高度成長は始まったという学者もいますが、一般的には1955年から第一 次石油危機があった1973年までの18年間を高度経済成長期といいます。この18年間に GNPで言いますと、名目で13倍、実質では5倍の成長を遂げました。 1950年代中頃、イギリスのBBC放送が、日本の高度経済成長についてテレビ番組 を放映し、アジア世界で急激な経済発展を遂げる日本のイメージが世界に広まりました。 1968年に日本はGNPでドイツ、イギリス、フランスを追い抜き、世界第3位(一位米 国、2位ソ連、ソ連邦崩壊後、日本が第二位)になりました。世界の奇跡「経済大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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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と呼ばれました。 いったい高度経済成長を可能にした条件は、何であったのか。 第一に、1960年代は「黄金の60年代」“golden sixties”と呼ばれたように先進工 業国ではどこの国でも高度成長をとげていました。また国際石油資本の支配のもとに中東 で油田の大開発がすすみ、低廉で豊富な石油が供給されました。 第二に、国内的な政治の安定化が大きい。安保闘争の後、対決型政治から「寛容と 忍耐の政治」への転換を望む財界や国民の声も高まっていました(change of pac e)。1960年、池田勇人内閣が成立し、所得倍増計画を発表します。10年間で国民 所得を2倍にすると約束しました。1960年代の日本は、まだ貧しく「欧米先進国に追い付 きたい、豊かになりたい」という国民の願望は大きかった。国民のエネルギーも経済成長の 一点に向かって、発揮されました。このときほど日本人がよく働いた時代はありません(一 人当たり労働時間は、年間2000時間を超えた。61年がピーク。『労働白書』)。 日本経済は約10年間にわたって、年率10%前後の成長率を遂げ、10年後には池田 の予想を上回って、GNPは3倍に増加しました。 以上は政治的社会的要因ですが、高度成長を可能にした経済的条件については、次 の要因がありました。高度経済成長のキーワードは、「重化学工業化」です。繊維産業 などの軽工業だけでは、あれだけの設備投資も起こらなかったでしょうし、あれだけのス ピードを持った発展もありえなかったでしょう。 さらに、①技術革新、②間接金融体制、③労働力、④対米輸出の4つの要因が経 済成長を加速しました。(詳しくは、中村政則「1950~60年代の日本ー高度経済成長 ー」『岩波講座 日本通史 第20巻』1995年参照)。 この経済成長によって、いわゆる「1955年体制」(自民党対社会党を対立軸とする 政党政治制度)は30年以上にあって機能し続けたのである(1993年自民党単独政権の 終わり。以後は連立政権の時代に移りました)。

結びにかえて

政権交代-昨年(2009年8月)の総選挙で自民党は大敗北(296議席から119議 席へ)民主党が歴史的大勝(113議席から308議席へ)を勝ち得て、権力の座に着き ました。 民主党が政権を取ってから、まだ一年しか経っていないので、その成果は未定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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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後史の中の安保体制-日米中のトライアングル 同党の安全保障政策で触れてお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沖縄に対する政策です。 政権交代のあと、鳩山由紀夫首相は嘉手納、辺野古、普天間基地の県外移設、国 外移動を公約しながら失敗しました。それは鳩山首相の無理解、外交手腕の弱さなどとい うものではなく、日米安保条約が続くかぎり、この対米従属の構造は変わらないのである。 そのあとの岡田首相も菅直人首相(2010年7月7日総選挙のあと首相に再任)もワシント ン詣でをおこない、オバマ大統領と会談しましたが、米側は沖縄基地の国外(グワム) 移転は、確約せず、沖縄の米軍基地はそのまま続いている。 日米安保条約は、日本の安全のみならず、アジアにおける安全保障体制と密接に関 係している。中国は、日米安保条約を排除すれば、また日本帝国主義が復活し、アジア での覇権を牛耳る怖れありとして、むしろ日米安保を「瓶のふた」として暗黙に肯定してき た経緯があった。しかし、最近の中国の驚異的な経済発展を背景に、中国は自信をつ け、Japan passing「日本通過」で、アメリカと直接提携するようになってきた。私はアジ アにおける平和の安定を確保するためには、米・中・日のトライアングルの友好的構築を 図る以外にないと考えるが、それほど楽観はできない。たとえば今年9月の尖閣諸島沖の 中国漁船衝突事件は、一気に日中間の対立・緊張を高めた。この事件につきオバマ政 権は静観の方針を示しているが、日中間の緊張が解けない場合には、米政府と国連の和 解斡旋の動きが出てくるかもしれません。アジアにおける安全と平和は脆いものであって、 一つの外交的危機は両国間だけで解決できるものでなく、グローバルな協力・斡旋が、 今まで以上に必要になったと思います(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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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사 속의 안보체제-미일중의 트라이앵글

나카무라 마사노리 (一橋大学)

머리말

제 전공은 일본근대사입니다. 강의에서는 페리호 내항, 메이지유신, 자유민권운동, 산업 혁명, 청일ㆍ러일전쟁을 거쳐 다이쇼 데모크라시(역주:일본에서 1910년대부터 1920년대까 지 정치ㆍ사회ㆍ문화 각 부문에서 있었던 민주주의, 자유주의적인 운동, 사조, 풍조를 총칭 함), 쇼와공황, 15년 전쟁(역주: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포츠담 선언 수락에 의한 대동아 전쟁 종결에 이르기까지의 약 14년간에 걸친 분쟁 상태와 종전을 총칭함), 패전 점 령(GHQ 혁명)까지를 강의해 왔습니다. 강의시간에 여유가 있을 경우, 고도경제성장과 안 보, 글로벌 금융위기로 마무리를 합니다. 이른바 일본근대사 150년간을 총체적으로 다루는 셈입니다. 특히 오늘 강연의 주제인 안보는 제가 학부 3, 4학년이었을 무렵의 동시대사이며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는 실제 체험입니다. 그러면 바로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전후사란 일본국 헌법체제와 미일안보체제와의 상극ㆍ모순의 시스템

전후사란 무엇인가? 패전, 맥아더에 의한 GHQ 혁명을 거쳐 1950년 한국전쟁과 1951 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까지를 한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1956년 ‘경제백서’는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고 표현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도 1950년대는 전후사에서 가장 큰 기로였습니다. GHQ의 점령 혁명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경제개혁의 세 가지 중심축이었던 농지개혁ㆍ노동개혁ㆍ재벌해체가 1955년 이후 일본 경제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농지개혁은 소작농을 해방하고, 자작농을 대량으로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는 생산물(쌀ㆍ보리)의 절반을 소작료로 지주에게 지불했습니다만, 개혁 후에는 쌀을 자유 롭게 판매하여, 농업 소득이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1950년대에는 농가의 구매력이 커지면 서 국내 시장 확대에 기여한 것입니다. 50년대 후반부터 자동차, 전기세탁기, 전기냉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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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사 속의 안보체제-미일중의 트라이앵글 흑백TV 등이 농촌에 보급되어 고도 성장에 기여하였습니다(도요타 자동차, 마쓰시타 전기 (나쇼날) 등의 발전). 노동 개혁과 관련해서는 일본의 노동자는 조합결성권, 단체교섭권, 쟁의권 등 노동 3권을 사상 최초로 확보하면서 경영자에게 맞설 수 있는 힘을 확보하게 되 었습니다. 그리고 1949년 노조법 개정을 계기로 1950년대에는 잇단 노동쟁의(“영웅없는 113일간의 투쟁”으로 일컬어지는 미쓰이광산노동조합연합회쟁의, 닛산쟁의[日産争議](역 주: 1953년 5월부터 9월까지 닛산자동차주식회사와 전일본자동차산업노동조합 닛산자동차 분회 간에 발생한 노동쟁의) 등이 발발합니다. 이 역사적인 경험 이후 경영자 측도 반격을 하면서 협조적인 기업별 조합이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해서 전세계적으로도 드문 기업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화이트 칼라=직원계층과 블루 칼라=공장 노동자층이 등장ㆍ정착하 게 된 것입니다. 재벌 해체와 관련해서는 미쓰이ㆍ미쓰비시ㆍ스미토모ㆍ야스다와 같은 4대 재벌이 GHQ 의 명령으로 해체되었습니다. 재벌 해체란 크게 (1)지주회사 해체, (2)재벌가족의 기업에 대한 지배력의 배제, (3)주식 소유의 분산으로 실시되었는데, 이로 인해 소니, 혼다, 캐논 등 혁신적인 기업이 대두하고, 재계에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이른바 빅 비즈니스를 중심으 로 한 과점 경쟁 구조가 만들어지고, 60년대 경제성장을 가속화하게 된 것입니다. 정치 개혁으로는 일본국 헌법 제정이 가장 중요합니다. 제9조의 전쟁 포기와 상징천황 제의 존치가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천황제 존치와 전쟁 포기는 한 세 트였습니다. 즉 천황제는 남겨두되 한편으로 전쟁 전의 침략주의 부활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소련, 중국,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한국 등 국제 여론은 천황제(천황) 자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천황을 중심으로 전쟁 전과 같은 침략주의적인 국가 체제를 만들려고 하는 것 자체가 아나크로니즘(시대착오)이며 국제공약 위반인 것입니다 (포츠담 선언 참조). 우리는 우선 그 출발점을 확인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1951년 9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는 샌프란시스코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강화조약 에 서명한 후 미 육군 총사령부를 방문해 미일 안보조약에 서명했습니다. 미국 측에서 서명 한 것은 덜레스 국무장관 보좌관과 애치슨 국무장관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 조약 내용은 미군에게 일본에 대한 방위의무는 없고, 조약의 기한도 없으며 내란 조항이 있었습니다. 즉 한반도 유사(전쟁 혹은 내란 등)시에 40만의 주일미군이 한반도에 출격해 일본 본토가 빈 틈에 내란이 벌어질 경우에는 경찰예비대로 진압하겠다는 식민지적이고 일방적인 내용이었 습니다. 뿐만 아니라 1947년 9월 천황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다음은 쇼와천황이 시볼트 정치고문을 통해 맥아더에게 보낸 편지입니다만,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천황은 미국이 오키나와 기타 류큐제도에 대한 군사점령을 계속해주길 바란다. 이는 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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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의 위협뿐만이 아니라 점령이 끝난 후 우익, 좌익 세력이 대두해 내정에 간섭하는 것 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유익하다’는 내용입니다. 사실은 황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미국이 계속해서 오키나와를 군사점령해주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시볼트는 천황의 ‘사적 이익’이 느껴진다는 소감을 말했습니다만,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제3조에서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 에서 분리되어 미군기지의 반영구 주둔이라는 운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일본의 대 미 종속 구조를 오늘날에까지 이어오게 된 것입니다.

안보투쟁

1952년에 확정된 샌프란시스코체제는 1960년 안보개정으로 크게 바뀌었습니다. 요시다 시게루가 체결한 안보조약은 ①미군이 원하면 어디든지 기지를 두는 전토기지방식이며 ② 내란 조항을 규정하여 ‘밑으로부터의 혁명’을 압살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른바 ‘식민지적 편무성(片務性)’입니다. 이를 ‘쌍무적 조약’으로 바꾸려고 한 것이 기시 노부스케 [岸信介] 총리에 의한 “60년 안보”입니다. 기시 노부스케는 안보개정을 하기에 앞서 이에 대한 국민적 반대 운동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미리 선수를 쳐 1958년 경찰관 직무집 행법(경직법) 개정에 나섰습니다. 경직법은 경찰관에 의한 직무 질문과 소지품 검사 권한 을 확대해 국민의 집회ㆍ시위 등의 자유를 크게 제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저는 대학 2학년으로 친구와 함께 국회에 가서 중의원 의원회관에서 당시 총리였 던 기시 노부스케와 사회당 위원장 가타야마 데쓰[片山哲] 간의 일대 논전을 목격했습니 다. 국회에 들어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만, 여야당 당수의 기백이 넘치는 대결을 볼 수 있어 운이 좋았습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경직법 반대 투쟁은 사 회당ㆍ총평 등 65개 단체가 경직법 개악 반대 국민회의를 결성해 반대 투쟁을 주도했습니 다. 결국 야당 측이 승리하여 기시 총리는 경직법을 폐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반대파가 정치 투쟁에서 승리한 것은 전후사 중에서도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으로 이 기세가 이듬해 에 시작된 안보투쟁으로 계승된 것입니다. 안보투쟁은 10만 명에서 30만 명의 시위대가 1~3월에 국회를 에워싼 일본근대사 최대 의 국민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참고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한국 학생들에 의한) 4 ㆍ19혁명은 안보투쟁이 한창일 때 일어난 것으로 국회를 에워쌌던 노동자, 학생, 시민 시 위대에게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때 작가 홋타 요시에[堀田善衛]가 국회 근처의 미야케자카[三宅坂]의 가로수 옆에서 이 학생 데모를 바라보던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이 무렵 홋타는 시마하라의 난[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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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사 속의 안보체제-미일중의 트라이앵글 原의 乱](역주: 에도시대 초기에 있었던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봉기)를 주제로 한 대 표작『바다굉음 저 깊은 곳에서[海鳴りの底から]』를 집필 준비 중이었습니다.

안보체제의 3단계

올해(2010년)는 ‘안보 50주년’에 해당하는 관계로 ‘안보란 무엇인가’란 논의가 TV, 신 문 등 매스컴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제 눈에 띈 것이 모리 히데키[森英樹] (나고야대학 교수, 헌법학 전공)의 ‘군사동맹 없는 아시아와 일본’ (잡지 뺷법과 민주주의뺸, 2010년 8월, 일본민주법률가협회)란 논문입니다. 모리의 논문은 명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저의 trans‐war history  방법을 사용해 미일안보 3단계를 정리한 것입니다. trans‐war history 방법에 대해 모르시는 분도 계실 것 같아 ‘주석’으로 정리했습니다. *Trans‐war history란 무엇인가. 전쟁은 국제관계를 크게 바꾸어 국내 정치ㆍ경제, 사 회구조에 격변을 가져와 사람들의 생각을 크게 바꾼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그 영향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은 제1차 세계대전과 달리 크게 사회를 바꾸었 다. 그 영향은 전후 정치ㆍ경제ㆍ사회의 존재 방식에도 미치는 것이다. 기존과 같이 ‘단절 이냐 지속이냐’와 같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에서 전후 일본사란 무엇이었는가를 종합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이 ‘관전사(貫戰史)’ 방식을 기존의 연구사 속에서 찾아볼 경우 전쟁 전과 전후의 연속ㆍ 단절 논쟁으로 볼 수 있으며 ‘관전사’는 이 중 연속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중략). ‘관전사’란 연속ㆍ단절의 양면을 글로벌한 시점에서 추구합니다. 메이지유신이 복고 (restoration), 혁명(revolution), 개혁(reform)의 세 가지 측면을 갖고 있는 것처럼 저는 전후 개혁을 (전근대 잔존, 근대화, 현대화)의 세 가지 층을 가진 중층적 개혁으로 바라봤 습니다. (나카무라 마사노리,『경제발전과 민주주의』(岩波書店), 1993년. 동『현대사를 배 운다』(吉川弘文館), 1997년). 즉 전후 일본을 프리 모던, 모던, 포스트 모던의 3중 구조로 이루어진 역사로 파악하려 한 것입니다. 게다가 전후 일본의 역사는 미일 관계를 배제하고서는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일본은 샌 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체결하고 나서 군사와 외교면에서 완전히 대미 종속의 구조가 결정 되었습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대미협조의 측면도 있겠지만 군사ㆍ외교면에서는 종속적 측면이 큰 것은 확실합니다. 예를 들자면 1995년 9월 4일 오키나와에서 미군 3명에 의한 초등여학생 폭행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오키나와현 경찰은 미군 3명에게 체포영장을 발급해 신병 구속을 요구했습니다만, 미국 측은 미일지위협정을 들어 이를 거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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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05년 미군 대형 헬리콥터가 추락했는데, 오키나와현 경찰은 현장검증을 미국에게 거부당했습니다. 여기서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모리 교수에 따르면 미일안보동맹은 3개의 ‘전쟁’을 계기로 변화했다고 합니다. ①베트 남 전쟁, ②걸프만 전쟁 ③2001년 9・11테러를 계기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대테러 전 쟁’이 바로 그 세 가지 전쟁입니다. 우선,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패한 1975년이 기점이 됩니다. 패배를 계기로 미국은 일본 에 대한 부담ㆍ역할 강화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1978년 ‘미일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 은 ‘안보조약상의 사전협의제, 헌법상의 제약, 비핵 3원칙을 협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보 유하지 않고 제조하지 않고 반입하지 않는다)란 합의 하에 미일동맹 강화를 꾀했습니다. 또한 같은 해에 ‘배려예산[思いやり予算]’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군지위협정 24조에는 일본 은 기지를 제공하나 기지 유지비는 미군이 부담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지 유지비 도 일본이 부담하게 되었습니다(처음에는 62억 엔이었으나 점차 늘어나 2010년에는 1233 억 엔을 예산으로 잡음). 일본은 헌법 제9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하는 군사대국 미국과의 일체적 동맹관계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걸프만 전쟁이 미일동맹을 강화하게 하였습니다. 96년 하시모토 총리와 클린턴 대통령이 서명한 ‘미일안보공동선언’은 군사적 협동관계를 더욱 확대해 ‘안보 재정의’라 불렸습 니다. 더 이상 안보는 안보가 아니라 새로운 군사적 동맹으로까지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2001년 9·11 사건을 계기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대테러 전쟁’은 고이즈 미 정권의 대응으로 순식간에 글로벌 확산이 되었습니다. 사건 직후 고이즈미 총리는 미국 을 방문해 부시 대통령과 공동성명을 발표, 전세계적으로 미일 동맹을 구가했습니다. 이라 크 전쟁에서 ‘전쟁지역’에 자위대를 파견한 것은 고이즈미 총리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때는 자위대원에서 사망자는 없었지만 사망자가 나왔다면 고이즈미 내각은 풍비박산(총사퇴)이 났을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안보조약은 점차 확대ㆍ변질되어 21세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안보와 고도 경제성장

1950년 한국 특수, 남북전쟁에 의한 미군의 특별 조달 덕택에 일본 경제가 풍요로워진 것으로 인해 고도 성장이 시작되었다는 학자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1955년부터 제1차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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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사 속의 안보체제-미일중의 트라이앵글 유위기가 있었던 1973년까지의 18년간을 고도경제성장기라 말합니다. 이 18년 동안을 GNP로 환산하면 명목상 13배 실질적으로는 5배 성장했습니다. 1950년대 중반 영국의 BBC 방송이 일본의 고도경제 성장에 대해 TV프로그램을 방송 해, 아시아 지역에서 급격한 경제발전을 이루는 일본의 이미지가 전세계에 알려졌습니다. 1968년 일본은 GNP로 독일, 영국, 프랑스를 따라잡고 세계 제3위(1위 미국, 2위 소련, 소련 붕괴 후 일본이 제2위)가 되었습니다. 세계의 기적 ‘경제대국 일본’으로 불리게 되었 습니다. 그렇다면 고도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한 조건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1960년대 는 ‘황금의 60년대’ ‘golden sixties’라 불린 것처럼 선진공업국에서는 어느 나라나 고도성 장을 달성했습니다. 또한 국제 석유 자본의 지배하에 중동에서 유전이 대대적으로 개발되 어, 저렴하고 석유가 풍부하게 공급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국내 정치 안정화도 큰 요인입니다. 안보투쟁 후 대결형 정치에서 ‘관용과 인내의 정치’로 전환되길 바라는 재계와 국민의 의견이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change of pace). 1960년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내각이 성립되면서 소득배가계획이 발표됩니다. 10년 간 국민소득을 2배로 만들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1960년대 일본은 여전히 빈곤해서 ‘구미 선진국을 따라잡고 싶다. 풍요로워지고 싶다’는 국민의 소망이 매우 컸습니다. 국민의 에너지도 경제성장 하나만을 바라보고 발휘되었습니다. 이때만큼 일본인이 열심히 일했던 시절은 없습니다(1인당 노동시간은 연간 200시간 이상. 61년이 최고조.『노동백서』). 일본 경제는 약 10년간에 걸쳐 연 10% 전후의 성장률을 기록했고, 10년 후에는 이케 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GNP가 3배로 늘었습니다. 이상은 정치적 사회적 요인입니다. 고도 성장을 가능하게 한 경제적 조건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인이 있었습니다. 고도경제성장의 키워드는 ‘중화학 공업화’입니다. 섬유산업 등의 경공업만으로는 그만큼의 설비투자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만큼의 속도로 발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①기술 혁신, ②간접금융체제, ③노동력, ④대미수출과 같은 4가지 요인이 경제성 장을 가속화시켰습니다.(상세한 내용은 나카무라 마사노리 「1950~60년대 일본‐고도경제성 장‐」 뺷이와나미 강좌 일본통사 제20권뺸, 1995년 참조). 이 경제성장으로 인해 이른바 ‘1955년 체제’(자민당 대 사회당을 대립축으로 하는 정당 정치제도)는 30년 이상에 걸쳐 기능하게 됩니다(1993년 자민당 단독 정권 종료. 이후 연 립정권 시대로 넘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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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작년 (2009년 8월) 총선에서 자민당은 대패(296석에서 119석)하여 민주당이 역사적인 대승(113석에서 308석으로)을 거두어 권력을 쟁취하게 되었습니다. 민주당이 정권을 탈환 한 후 아직 1년 밖에 지나지 않아 그 성과는 미정입니다. 민주당의 안전보장정책에서 언급 해야 할 것은 오키나와에 대한 정책입니다. 정권교체 후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가데나[嘉手納], 헤노코[辺野古], 후텐마[普天間] 기지의 현외로의 이설, 국외 이동을 공약으로 내세워 실패했습니다. 그것은 하토야마 총리 의 이해 부족, 외교수완 부족이 아니라 미일안보조약이 계속되는 한, 대미종속의 구조는 바 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 후의 오카다 총리도 간 나오토 총리(2010년 7월 7일 총선 이후 총리 취임)도 워싱턴을 방문, 오바마 총리와 회담을 가졌으나 미국은 오키나와 기지의 국 외(괌) 이전을 확약하지 않고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를 그대로 존속시켰습니다. 미일안보조약은 일본의 안전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안전보장체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 니다. 중국은 미일안보조약을 배제하면 또다시 일본제국주의가 부활하여 아시아에서의 패 권을 좌우할 우려가 있는 것으로 보아 되려 미일안보를 ‘병뚜껑’으로 하여 암묵적으로 긍정 을 했던 경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중국은 자신 감을 가지고 Japan passing ‘일본통과’로 미국과 직접 제휴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나 는 아시아의 평화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미ㆍ중ㆍ일의 삼각 우호적 구축을 도모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봅니다만, 그다지 낙관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금년 9월 센카쿠 제 도 만의 중국 어선 충돌사건은 순식간에 중일 간의 대립ㆍ긴장을 고조시켰습니다. 그 사건 에 대해 오바마 정권은 지켜보겠다고 하였으나 중일 간에 긴장이 완화되지 않을 경우에는 미 정부와 유엔의 화해알선의 움직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시아의 안전과 평화는 매우 불안정한 것으로 하나의 외교적 위기는 양국 간에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한 협력ㆍ알선이 지금까지 이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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战后史之中的安保体制 日美中之三角

-战后史之中的安保体制

日美中之三角

-中村政则 (一橋大学)

前 言

我的专攻是日本近现代史。在讲课中,授课的内容从来航来航,经明治维新、自由民 权运动、产业革命、日清战争和日俄战争,直至大正民主运动、昭和恐慌、十五年战 争、战败和占领(GHQ/“盟总”革命)。假如授课过程中有多余的时间,则专注于高速经 济增长和安保、全球金融危机,堪称是从总体上谈论所谓日本近现代史的一百五十年。 特别是今天演讲的主题——安保,是我大学本科三、四年级时期的同时代史,是至今依然 记忆尤存的实验体。现在就立即进入主题吧。

所谓战后史是日本国宪法体制与

日美安保体制之相克和矛盾的体系

所谓战后史是什么呢?战后史是从战败开始,经麦克阿瑟主导的GHQ(“盟总”)革命, 直到1950年朝鲜战争和1951年旧金山和约之缔结,以此为一历史段落。虽然1956年的 《经济白皮书》写道:“已经不是战后了。”,但是在我的理解中,1950年代是战后史中最 重大的转折点。 关于GHQ推进的占领革命难以详细论述,但是经济改革主要的三个支柱——农地改 革、劳动改革、财阀解散,为1955年以后的日本经济发展创造了可能。农地改革就是解 放佃农,大量造就自耕农。此前农产品(大米、小麦)的一分是作为地租交给地主,而在 改革后农民自由地出售大米,增加了农业收入。于是,在1950年,农家的购买力增加, 从而促进了国内市场的扩大。从1950年代后半期开始,汽车、洗衣机、冰箱、黑白电视 机等普及到农村,从而对高速增长发挥了促进作用(丰田汽车、松下电器等的发展)。在 劳动改革领域,日本工人在历史上第一次取得工会组织权、团体交涉权、劳动争议权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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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劳动三权”,从而获得了与经营者对抗的力量。于是,1949年爆发了划时代的劳组法修 正事件,1950年相继发生了重大争议事件(“没有英雄之113日的斗争”——三矿连争议、日 产争议等)。在经历了这些历史经验以后,经营方也展开反攻,成立协调性的行业组合。 惟其如此,举世罕见之高度忠诚于企业的白领·职员层与蓝领·员工层因运而生,并逐渐定 型。 至于财阀解散,则是三井、三菱、住友、安田四大财阀根据GHQ的命令解体。所谓财 阀之解体,包括:(1)解散持股公司;(2)排除财阀家族对企业的支配力;(3)分散股份之 持有等三个部分,因之索尼、本田、佳能等新型企业抬头,为财界吹进了活力。以大企 业为中心的垄断竞争结构逐渐形成,进一步加速了1960年代的经济成长。 以政治改革而言,日本国宪法的制定是最重要的,其中第九条之放弃战争和保存象征 天皇制举足轻重。众所周知,天皇制的保存和战争之放弃是一体的(one set)。换言之, 一方面天皇制继续存在,另方面战前侵略主义的复活则不被认可。苏联、中国、澳大利 亚、新西兰、菲律宾、韩国等国际舆论不承认天皇制(天皇)本身的存在。惟其如此,寻 求以天皇为核心、建构战前式侵略主义的国家体制,这本身就是时代的错误,是违反国 际公约的(参照《波茨坦公告》)。我们首先必须确认这一出发点。 1951年9月,吉田茂首相在旧金山歌剧院签署和平条约,随后访问美国陆军总部,签署 《日美安保条约》。代表美方签署条约的只有杜勒斯助理国务卿和艾奇逊国务卿两人。 该条约的内容是:美军没有防卫日本的义务;条约没有期限;内乱条款。亦即,假如在 朝鲜半岛“有事”(战争或内乱)、40万驻日美军出击朝鲜半岛、日本本土出现空隙之时发 生内乱,则运用警察预备队进行镇压,这是殖民地性的单方面的内容。此外,还有一项 1947年9月的天皇备忘录。这是昭和天皇经政治顾问西博尔德之手转交麦克阿瑟的信件, 其中这样写道:“天皇期待美国继续对冲绳以及其他琉球诸岛的美国军事,这不仅有助于 遏制俄罗斯的威胁,而且有助于防止占领结束后左翼、右翼势力的抬头和干涉内政。”虽 然信件的本意是为了保护皇室,但是也希望美国继续对冲绳的军事占领。该信件叙述了 西博尔德对天皇之“私益”的感想,但导致冲绳根据旧金山和平条约第三条被从日本本土 分离、从而半永久化地成为美军基地的命运。时至今日,这依然继续规定着日本的对美 从属结构。

安保斗争

1952年确定的旧金山体制,由于1960年的安保条约修订而发生重大的变化。吉田茂缔 结的安保条约规定了(1)美国随其所愿设置基地之(日本)全土基地方式;(2)内乱条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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战后史之中的安保体制 日美中之三角 -展现了扼杀“自下而上的革命”的意图。这就是所谓“殖民地的单方面义务性”。寻求将其 转变为“双方面义务之条约”的是岸信介首相推进的“1960年安保”。岸信介预计假如走向 修改安保,将发生国民反对修改安保的反对运动,因此先发制人,于1958年提出修订警 察官职务执行法(“警职法”)。“警职法”扩大警察官进行职务审问和财物调查的权限,大 幅度限制国民的集会、示威等的自由。 此时我是大学二年级学生,与朋友一起前往国会,在众议院议员会馆观看时任首相岸 信介与社会党委员长片山哲的大论战。我是初次进入国会殿堂,能够亲眼目睹执政党和 在野党党首针锋相对的对决是幸运的,至今记忆犹新。此次反对“警职法”的斗争,是社 会党、总评等65个团体创立反对“警职法”改恶国民会议,领导进行反对斗争。结果,在 野党方面获得胜利,岸首相最后陷入“警职法”沦为废案的境地。反对派通过政治斗争获 得胜利,这在战后史上是第一次的经验,这一势头为翌年开始的安保斗争所继续。 安保斗争是日本近现代史上最大规模的国民运动,人数达10万人至30万人规模的示威 队伍在1至3个月的时间包围国会。顺便提及,(由推翻李承晚政权的韩国学生主导的)四 一九革命,在安保斗争的关键时刻给包围国会的日本工人、学生和市民示威队伍以极大 的勇气。 此时,我亲眼看到作家堀田善卫在国会附近的三宅坂的街道树边凝视学生游行示威的 情形。当时堀田正在准备创作以岛原之乱为主题的代表作《海鸣自底处发出》。

安保体制之三阶段

今年(2010年)是“安保50年”,因此所谓“安保是什么”之类的议论充斥电视、报纸等大 众传媒。其中令我留神注意的是森英树(名古屋大学教授、专攻宪法学)之题为《没有军 事同盟的亚洲与日本》(《法与民主主义》杂志,2010年8月,日本民主法律家协会)的论 文。森的论文虽然没有明示,但是运用我的trans‐war history(“贯战史”)的方法,分析整 理日美安保的三个阶段。关于trans‐war history方法也许有人并不瞭解,故在“注记”中略 加记述。 *所谓trans‐war history是什么呢?战争大大地改变国际关系,导致国内政治经济和 社会结构的激变,并且极大地改变人类的思维。因为即使战争结束,其影响也没有消 失。特别是第二次世界大战与第一次世界大战不同,它改变了战后的社会,其影响涉及 战后政治、社会、社会的形态。我希望超越原来之“断裂或连续”两者选一的思维方式, 从新的视点出发,从总体上修正所谓战后日本史是什么的问题。 将这一“贯战史”的方法置于原来的研究史之中,则有战前与战后的连续论或断绝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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