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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외교의 국제주의적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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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 이후 러시아와 미국을 상대로 한 고종황제의 친서 외교가 실패로 돌아간 후,3)

1) 徐榮姬, 2008 「고종황제의 외교전략과 제2차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백년후 만나는 헤이그 특사』(李泰鎭 편), 태학사, 76쪽

2) 村瀨信也, 2008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의 유산」『백년후 만나는 헤이그특사』(李泰鎭 편), 태학사, 289쪽, 각주 39)

3) 徐榮姬, 2007「을사조약 이후 대한제국 집권세력의 정세인식과 대응방안」『역사와현실』66 참조.

일본의 한국병합을 둘러싼 국제환경과 대한제국 외교의 좌절

대한제국이 취한 외교전략은 국제열강의 한반도 문제 공동개입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고종 이 前 주한미국공사였던 Horace Allen을 통해 미국이 열강과 공동으로 한국 사태에 대한 진상조사를 벌이도록 교섭하는 한편, 미국․영국․일본 3국의 공동 보호를 요청한 것이나,4) 런던 트리뷴지 기자인 Douglus Story에게 의뢰하여 북경 주재 영국공사에게 전송한 1906 년 1월 29일자 國書에서 5년간 열강의‘공동보호’를 요청한 것도5)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영국이 특별히 고려된 것은 아마도 일본과 동맹상태인 영국이 일본을 잘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서인 것 같다. 또한 헤이그 특사단을 지원한 Hulbert를 통 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태리, 벨기에, 중국 등 9개국 원 수에게 친서를 보내려고 시도한 것, 헐버트에게 한국 문제를 헤이그의 상설중재재판소에 제소해 달라고 위임한 것 등 도6) 모두 한반도 문제가 국제사회의 公論과 公議에 의해 해 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 국제주의적 전략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고종이 기대했던 만국공법과 국제사회의 公議는 유교적 信義의 개념이 아니었고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시대적인 것이었기에 1907년 헤이그 특사단은 회의석상에 참석조차 할 수 없었다. 두 차례나 평화회의를 개최한 국제사회는 ‘정의'가 아니라 ‘힘'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였고 정작 보호국으로 전락한 대한제국이 그로부터 벗어나는데 만국공법은 아무런 도 움도 되지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7년 고종 폐위로 밀사 파견의 주체가 사라지고, 1907년 말에서 1908년 초 일제에 의해 밀사 자금으로 사용되던 고종 황제의 해외 비자금이 모두 탈취당 한 상태에서도,7) 공립협회 등 해외 독립운동세력과 연해주 일대의 의병세력이 연계하여 한 국문제의 국제주의적 해결을 도모하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1908년 3월 장인환, 田明雲의 D.W. Stevens 저격사건은 마침 미국 서부지역에서 일본 이민자 문제를 계기로 黃禍論 yellow peril이 고조되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8) 미국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9) 1909년 10월 安重根의 伊藤博文 암살사건 역시 러시아와 일본이 만주 이권을 폐쇄적으로 독점하는 문제 를 두고 구미열강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 일어남으로써 세계 여론의 비상 한 주목을 받게 되었다.

4) 金基奭, 1995 「광무제의 주권수호 외교 1905-1907; 을사늑약 무효선언을 중심으로」『일본의 대한제국 강점』(李泰鎭 편) 까치, 241-244쪽

5) 뺷대한매일신보』1907년 1월 16일

6)『고종황제의 주권수호 외교』(서울대학교 한국교육사고 자료총서 1), 28-31쪽 7) 徐榮姬, 2003『大韓帝國 政治史硏究』서울대학교 출판부, 239쪽

8) Walter LaFeber, 1997 The Clash; U.S.-Japanese Relations throughout history, p88 9) The Sanfrancisco Chronicle 1908.3.25

伊藤 암살사건의 배후에 대한 미국 언론의 보도를 보면, Stevens 저격사건이나 伊藤 암살 사건이나 모두 전체 계획은 ‘서울'에서 꾸며졌고(궁중의 前황제와 밀접하게 연관된 관료들 혹 은 그밖의 사람들에 의해) 실행 주체의 본부는 블라디보스톡에 있으며, 이 단체는 샌프란시스 코나 호놀룰루 등 여러 곳에 지부를 두고 있다고 파악되고 있었다. 또한 이들의 목적은 외국 의 주의를 끌어 일본에 반대하게 하는 것,10) 열강, 특히 미국이 일본에 의한 한국 주권 병합 을 막기 위해 간섭에 나서주는 것에 있다고 전문가의 견해를 인용해가며 보도하고 있다.11)

伊藤 암살 사건에 대한 미국 언론의 또 다른 관심은 伊藤의 하얼빈 방문의 구체적인 목 적을 파악하는데 있었다. 伊藤이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초프Kokovsoff, V.N.와 하얼빈에서 만나 합의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만주로 떠나기 전 伊藤이 순전히 개인적인 여행이 라고 언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회동이 이루어졌다면 러시아와 일본이 각각 북만주와 남만주에서의 철도 이권에 대해 상호 승인함으로써 러일이 공동으로 만주철도에 대한 독점 을 꾀하고자 했을 것이라는 추측 보도를 통해 만주철도 문제에 대한 미국의 비상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12) 미국 언론은 이미 일본에 의해 구미열강이 주장해 온 만주의 open door policy가 어겨지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와 모종의 타협을 꾀하던 伊藤이 암살된 것은 향 후 일러관계 혹은 일청관계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주목하고 있었다.13) 즉 일본이 청으로부터 얻은 남만주 철도 이권을 사수하고자 러시아와 타협함으로써 만주 open door 를 폐쇄하고자 했던 비밀 계획이 伊藤 사망으로 일단 중지된 점, 그것이 영미자본에 의한 만주철도 부설 계획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러한 관점, 즉 伊藤 암살이 미국의 만주 문호개방정책을 중단 위기에 서 건져냈다는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기 때문에 일본의 비스마르크이자14) 근대 일본을 만든 장본인이라고 높이 평가하는15) 伊藤을 암살한 한국 청년에 대한 비난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친일 언론인으로 유명한 George Kennan 정도가 무지하고 망상에 빠진 일부 한국인들이 한국의 진정한 친구를 암살했다고 보도한 경우는 있지만,16) 대부분의 기 사들은 한국의 처지를 동정하고 암살의 동기를 이해하는 편이었다. 오히려 한국이 근대적 관점에서 보면 나태하고 게으르게 보일지라도 그것이 곧 일본의 행동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10) NewYork Times 1909.10.29 11) Los Angeles Times 1909.11.2 12) Special to the NewYork Times 13) The Washington Post 1909.10.27 14) Outlook 1909.11.6

15) New York Observer and Chronicle 1909.11.18 16) Outlook 1909.11.27

일본의 한국병합을 둘러싼 국제환경과 대한제국 외교의 좌절

아니며, 일본도 불과 두 세대 전에는 동일한 상태였지만 그들을 잠에서 깨우는데 외국 열 강에 의한 정복이 필요하지는 않았다고 논평하였다. 즉 일본과 같은 문명화의 과정이 한국 에서도 그 자치권을 파괴하지 않고 황제를 유폐시키지도 않으며 일본관리들을 한국 전역에 배치하지 않고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기사는 한국인에게 그들 자신의 나라와 정부를 남 겨주었어야 한다고 주장으로 이어진다. 암살사건에 가담한 한국인들에 대해서는 이들이 비 록 후진적일지라도 매우 열렬한 애국심의 소유자라고 평가하고, 일본 지배에 항복하지 않 는 수만명의 한국인들이 스스로 산에 들어가 일본에 대한 반항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가난하고 미약한 한국인들이 강한 일본에 맞설 수는 없지만 義憤에 불타올라 암살 이라는 수단에 호소하고 있다고 동정하였다. 나아가 일본이 만주에서도 한국에서와 같은 정책을 추구한다면 한국인들보다 덜 순종적인 만주인들과 어떤 더 큰 어려움을 겪을지 모 르고 그렇게 되면 동양 문제의 끝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17)

이러한 미국 언론의 보도 태도를 볼 때, 안중근 사건을 기획한 측에서는18) 정확히 만주 문제를 둘러싼 구미열강과 일본의 갈등관계를 파악한 상태에서 러일협상에 나선 伊藤을 암 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만주문호 폐쇄를 저지, 열강의 이해를 대변했을 뿐아니라, 사건에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것을 이용하여 한국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했다고 생각된다. 또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서 볼 수 있듯이 의제를 한반도 문제에 국 한시키지 않고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보다 큰 틀을 제시함으로써 한국 병합이 단지 한민족의 운명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향후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위협하는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일제 역시 이러한 대한제국의 국제주의 전략의 위험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서둘러 병합 단행 시기를 앞당기고, 그것도 일진회를 앞세워 합방청원서를 제출케 함으로 써 한국민이 자발적으로 합병을 청원하고 있는 모양새를 갖추어 한국 병합에 대한 열강의 개입 가능성을 최대한 피해보려 했다고 생각된다.

17) Los Angeles Times 1909.10.27

18) 安重根의 伊藤博文 암살 사건의 배후에는 단지 연해주 일대의 의병세력 뿐만아니라 고종황제 의 밀사, 미국에서 활동하며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티븐스 암살 사건을 주도한 鄭在寬 등이 개입 되어 있었음이 최근 연구에서 밝혀졌다(李泰鎭, 2009「安重根의 하얼빈 義擧와 高宗皇帝」『안 중근의 동양평화론과 동북아 평화공동체의 미래』안중근하얼빈학회.동북아역사재단 주최 안중 근의거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발표자료집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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