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検索結果がありません。

애매한 개인 청구권의 행방

第7章   政権交代と情報公開   文書公開の意味と権力、民主化という側面から考察

9. 애매한 개인 청구권의 행방

그래도 1961년 12월 21일에 열린 제6차 한일회담 일반 청구권 위원회 제8차회의에서 한국측은, 아직 개인 청구권이 남는다 주장을 합니다.(한국측 문서750의 182페이지)

김윤근 수석 대표 : 우리측이 주장하는 내용은 한국인(자연인,법인)의 일본인(자연인, 법인) 또는 일본 정부 에 대한 권리로서 요강 제1항 내지 제5항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한일회담 성립후라 할지라도 이것 을 개별적으로 행사할 수있는 것으로 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는 양국간의 국교가 정상화 할 때까지 는 시효는 진행하지 않는 것으로 한다.

요시오까 주사 대리: 제1항목 내지 제5항목에 들어 있는 개인 청구권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김 대표 : 그것은 이 회담에서 일괄하여 결정하게 되는 것이므로 개인으로서는 주장할 수 없고,그 외의 것

은 실제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있을 경우에는 그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우라베 부주사 : 국채등은 후에 개인이 가지고 올 경우에도 그 지불을 하지 않아도 좋다는 의미인가.

김 대표 : 그렇다.

우라베 : 그러나 그렇게 되면 군령 33호 관계로 회담이 시초로 돌아 가게 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 다. 모처럼 정부간의 결정을 보더라도 이런 것이 있으면 큰 푸 홀‐”이 남는 것이 아닌가.

김 대표 : 그것은 다시 정부간에 회담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적으로 청구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푸 홀‐”

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요시오까 : 이 문제는 상당히 이론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김 대표 : 그런 개인의 청구권이 있다 하더라도 이 회담에서 다시 토의하자는 것이 아니고 이 회담은 이것 으로 끝내고 그러한 청구권은 개별적으로 청구할 수 있는 길을 펴 놓자는 의미이다.

우라베 : 군령 제33호와의 관계로서 한국인의 대일 부채는 없어지고 대일 청구권은 회담 성립후에도 남는다 고 하면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겠는가.

김 대표 : 군령 제33호와는 관계가 없다. 이것은 그러한 청구권이 성립하느냐 안하느냐를 정하는 단계까지 는 가지 않고, 청구권이 있다고 주장할 경우 재판소에서 재판하는 여지은 아직 있게 하자는 것이 다.

요시오카 : 취지는 알겠으나 여러가지로 문제가 있다고 본다.

우라베 : 역시 곤난한 문제가 일어날 것으로 본다.

김 대표 : 일어나지 않을 것이므로 안심해도 좋을 것이다.

우라베 : 우리로서는 역시 자연인이나 법인 관계의 청구권 일체가 이 회담에서 해결되었으면 하는 희망이 다. 또 일본에서는 개인 관계의 사유 재산권은 보호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음으로 항목을 넣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권리는 남게 될 것이다.

김 대표 : 그러나 회담에서 지금까지의 항목에 나온 것이나 안 나온 것이나 모두 회담 성립이라는 이유로서 소멸된 것이라고 하면 소송이 있을 때 재판소에서 판단 하는데 오히려 곤난 할 것이다.

사꾸라이 보좌 : 그렇게 되면 군령 33호와의 관계로서 사적 청구권에 관하여는 근본적으로 재고하지 않은면 안되리라고 본다.

김 대표 : 8개 항목에 들어 있지 않은 개인 청구는 주장할 수 있게 하고, 재판소에서 주장할 수 없는 것이 라고 하면 몰라도 주장조차 못하게 한다면 그것도 곤난한 문제이다.

우라베 : 내가 듣기에는 한국인 귀환자가 대판에서 예금한 것이 있으나 아직 찾지 못한 것이 있다고 한다.

김 대표 : 예금 채권등을 이 회담이 성립한 후, 청구 못한다고 하면 곤난하다는 것이다.

우라베 : 사유 재산이 보호되고 형편이 나쁘지 않은 것은 별문제이겠지만, 그 외의 경우는 간단한 것이 아 니므로 역시 곤난한 문제가 있다고 본다.

김 대표 : 개인 재산이 존중되는 경우라도 정부간에 일단 협정이 맺어져 이 회담을 방패로 거부하게 되면 곤난하다.

우라베 : 이것은 역시 문제가 크다고 본다. 지금 당장 결론을 낼 필요도 없는 것임으로 일단 검토한 후에 다시 우리측 의견을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

역시 이렇게 아무것도 결정 못한 채 다음 회의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개인 청구권을 떠나 정부간의 경제 협력 차원으로 변해가면서, 한일 회담은 청구권 소위원회가 아니라 본회의에 자리를 옮겨 토의하게 되어,

금액만에 대해 논쟁이 벌어집니다.

10.수렁에 빠진 금액 논쟁

1962년 3월 15일에 열린 고사카/최 한일외상회담 제3차 회의에서, 최덕신 장관이 “최근에 나타난 숫자로 는 김유택 경제기획원장이 제시한 8억불이 있다”고 연설했으며, 3월 26일에 열린 제4차 회의에서 “일측이 제시한 숫자는 청구권7천만, 차관은 2억(차관은 아측이 숫자 제시를 요구치 않었으나 일측이 제시함)”이라 는 금액이었으며 이것이 처음으로 한일회담 안에서 공식적으로 제시된 금액이었습니다. (한국측 문서 733의 184,211,347페이지)

 

 1962년 8월 21일 제6차 한일회담 제2차 정치회담 예비절충 본회의 제1회 회의에서 일본 측 스기 미치 스케 수석대표는 “청구권만을 사용한다면 외상회담에서 말한바 같이 7천 만불이 되는데 이 숫자도 대장성은 1천5백만불 밖에 되지 않다는 것을 외무성이 여러가지 이유를 붙여서 그러한 숫자를 낸 것이다. (중략) 만일 청구권과 무상 공여를 동시에 사용할 경우에는, 청구권에는 추정숫자를 넣을 수 없으므로 그 액수가 지극히 적어 질것이며 3‐4천만불밖에 되지 않은데,이것은 한국측으로서도 곤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발언합니 다.(한국측 문서 736의 181페이지.)

 같은 문서 197페이지에서도 “청구권으로 일본 측이 지불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전쟁후의 혼란이나 조선 동란등으로 관계서류들을 망실했다 등의 사정을 고려하여 납득이 가는 한도 내에서 추정의 요소를 가 미했다고 할지라도, 겨우겨우 수천만불에 머물어, 한국측이 기대하고 있다고 전해지는 수억불과는 아주 먼 거리에 있습니다. (중략) 일본 측이 도달한 결론을 한마디로 말하면, 청구권의 해결이라면 어떻게 하여도 수천만 불밖에 지불 못한다. 하지만 청구권의 해결과는 떠나, 한국의 독립을 축하하며 한국에 있어서의 민생 안전과 경제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무상 아니면 유상의 경제 원조라는 형태라면, 상당한 금액을 공여하는 것에 대해서 일본국민들의 납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어서 9월 13일에 열린 제6회 회의에서 한국측 대표 배의환 대사는 “양측 주장이 일본의 1.5억불에 대하여 한국 측은 3억불이라고, 3억불로 되어있어 거리가 너무 크니”라고 하고 있습니다.(한국측 문서 737 의 41페이지)  또 같은 문서 45페이지에는 일본 측 외무성 ‘이세키’ 아세아 국장의 “한국측은 2억불로 올리 라고 하지만, 1억 7천만불 정도로 밖에 올리지 못한다. 한국측은 출발숫자가 컸던 것이다.”는 말도 있습니 다.

 11.「김・ 오오히라 메모」로 결착에로

결국 9월26일에 열린 제8회 회의에서는 의논이 막혀 버려서, 금액 문제는 <제2차 정치회담>(오오히라‐김 종필 회담)에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의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지시를 받 고 일본을 방문하게 됩니다.(한국 측 문서796의 31페이지부터)

간략하게 설명하면 “총액이 6억불이하로 내리는 것은 혁명 정부로서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청구권은 법적 근거에 의거하는 것이나, 일본 측이 국회와 국민들에 대한 설명에 난점이 있고, 순변 제라는 명목만으로서는 한국측 요구 금액을 만족시키기 어렵다고 말해 왔기에, 순변제와 무상 조건 지불을 합친 총액 지불을 받아드리는 것으로 양보한 것이다. 우리의 최종 양보 타결 금액을 케네디 대통령에게 통보 한 일이 있다. 교섭의 기술상 일본 측이 1억 5천만 불을 제시하면 우리는 6억불을 제시하여라. 또 일본이 2억으로 올리면 우리도 5억으로 내려도 된다. 일본이 2억5천만불까지 접근하면, 정부의 지시를 받고 교섭에 들어가도록 방침을 정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오히라․김종필 회담에 즈음하여 일본정부는 최종안으로 무상공여 2억5천불을 결정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측 6차개시 1165의1824,1 및 16페이지) 실지로 10월 21일 회담에 들어 가자 오오히라 외상는 “자기로 서는 되도록 3억불의 희망에 가까와지도록 노력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같은 문서 35페이지), 김부장은 “당 초의 18억불부터 점차 6억불까지 내리는데 아주 고생했다며(36페이지),표면상의 숫자를 6억불에 끌어 올리 는 수단으로서도 차관의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40페이지)”고 말해서, 미국 방문후 “귀국할 도중 다시 회담 하고 싶다”고 해서 다음 회담에 넘기게 됩니다.

그러나 그 다음 날의 이케다 수상과의 회담에서는, 다시 후퇴한 금액이 제시됩니다. 이것은 수상과 외상 사이의 의사 소통이 안되어 있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케다 수상은 “무상조 지불은 사실상 법적근거에 의거 한 순변제액은 아무리 후하게 계산하여도 7,000만 불에 불과하지만, 타결하고저 상당한 고려를 하여서 금번 예비 회담에서 1.5억불을 제시한 것이며, 무상조로 그 이상을 지불하는 것은 일본 국민이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표명합니다.(한국측 문서 796의 120페이지, 10월22일, 오후4시 [이케다 총리/ 김종필 회담])

11월8일 박정희 의장은 미국 방문중인 김종필 부장에게 아래 훈령을 내립니다.(한국측 문서796의 150페 이지)

“2내지 2.5억불(순변제+무상조)+2.5내지 3억불(차관)=6억(총계)”

그래서 1962년 11월 12일 제2차 오오히라/김종필 회담에서 유명한 “오오히라” 메모가 전달되어 “무상3억 불,유상2억불,자금협력 1억 프라스 알파”로 이 오래동안 계속된 한일회담이 결착된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기에 여기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한국측 문서796의162페이지,172‐173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