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検索結果がありません。

청구권 문제는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第7章   政権交代と情報公開   文書公開の意味と権力、民主化という側面から考察

Ⅲ. 청구권 문제는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2. 평가 ; 1950,60년대 문서보존 상황과 관련해서

첫째, 문서량의 절대 부족을 들 수 있다. 특히 1950,60년대에는 부족한 종이자원을 보충하기 위해 공문서 를 재활용할 정도였다. 영구보존 문서 이외의 공문서는 다시 수집해서 재활용했다는 말단 관리 증언에서 보듯이 문서보존 보다는 문서 생산조차 여의치 않았다.10)

둘째, 차트문화가 도입되면서 생산된 문서조차 보존이 불가능한 실정도 있었다. 미군사학교 졸업 후 귀국 한 군인들이 5․16쿠데타로 정권을 탈취 후 행정보고가 대체로 차트형태로 바뀜에 따라 문서보존이 불가능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행정보고 문화의 변화가 문서보존에는 재앙이었다고 할 수 있다.11)

셋째, 정치적․이념적으로 문제가 되는 공문서의 폐기 처분이 여러 사례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농지개혁 자료 소각 명령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승만 정권기 1차례 예비회담과 4차례 한일회담, 그리고 한일회담 전후 시기 진행된 각종 비공식 접촉 등이 박정희 정권기에 비해 소략한 것은 이승만 정권이 한일협정에 대해 소극적으로 임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더구나 협상이면에 정부 측과 대표단의 긴밀한 의견 조율에 대한 자료들도 누락이 많거나 극히 소략하게 다루어진 문서들이 대부분이다.

넷째, 한일협정 문서가 빈약한 문제는 생산의 빈곤 보다는 합법적 폐기 또는 관리 소홀로 인한 망실로 빚어진 부분이 크다고 보인다. 공공기록 보존을 위한 제도적 정비가 미비했던 1950,60년대는 비밀기록으로 분류되었다 하더라도 비밀보호기간이 종료되면 일반문서로 재분류하여 폐기가 쉬웠다. 공문서의 수난시대 라고 할 정도로 문서 보존 상태가 열악한 것에 비한다면 한일협정 문서는 외교문서였기 때문에 그나마 이 정도로라도 남아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자료 6. 참조)

그러나 이 문서에는 조선은행을 비롯해 일본은행권을 소유한 기관으로부터 경제기획원에 대해 어떻게 대 처해야 될지를 묻는 질의서를 첨부하면서 재산청구권 문제에 대한 정부 견해를 확인하는 내용으로서 강제동 원 피해에 대한 보상문제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문서를 가지고 개인청구권 문제 전체의 책임이 한국정부 에 있다고 하는 것은 확대해석이었다.

청구권 협정에서 말하는 '재산, 권리 및 이익'은 합의의사록에 "법률상의 근거에 의거하여 재산적 가치가 인정되는 실체적 권리"라고 규정되어 있지만, 청구권의 정의가 분명하지 않아 보상청구 소송의 쟁점으로 되어 왔다.13)

개인청구권 소멸에 관한 교섭 당시 한국 정부의 인식은 李圭星 청구권 분과위원회 수석대표가 외무부장관 에게 1965년 4월 10일과 20일, 26일 세 차례 보고한 문서에서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 이규성은 개인청구권 소멸후의 대처에 대해 1965년 4월 3일의 청구권협정 기본합의를 언급하면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모 든 청구권이 해결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해서는 장래 양국이 각기 국내적으로 어떻게 소화하고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만이 남아 있으며, 따라서 특별히 문제는 없다"고 발언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 측은 국내에서 처리한다는 방침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소멸되었는가 하는 것을 확실히 해 두어야겠다"고 하면서 '① 북한 지역 청구권의 법적 문제, ② 조선총독부와 한국 정부 간의 계승 문제, ③ 재일한국인의 청구권 소멸의 범위, ④ 제2차대전 종결 시점의 해석 문제, ⑤ 기타'에 관한 협의를 요구했다.

이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이 개인청구권 문제의 소멸을 각기 국내문제로 처리함으로써 한일협정의 조기타결을 서두른 반면, 일본은 개인청구권 문제가 장래 제기되는 일이 없도록 완전히 소멸시켜 명문화하 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측이 확인해야 할 과제로 제기한 것은 재일한국인 문제와 북한 관계 의 법적 문제였지, 일본군위안부 문제나 피해보상 소송이 한국 국민으로부터 제기될 것이라는 상정은 포함 되지 않았다. 한일 양국 정부 모두 개인청구권 소멸에 식민지 지배의 피해보상이 어디까지 포함되는가라는 주제는 충분히 다루지 않았다.

개인청구권의 소멸 범위는 청구권협정 합의의사록(g)에 "한일회담에서 한국측으로부터 제출된 한국의 '대 일요구요강'(소위 8개항목)에 속하는 모든 요구가 포함되며, 따라서 대일요구요강에 관해서는 어떠한 주장 도 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문제는 한일회담에서 요강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던 부분에 대한 권리가 소멸된 것인지, 아니면 재산권의 일부를 제외한 모든 권리가 대상으로 된 것인지 하는가였다.

일본군위안부, 재한 피폭자, 사할린 잔류 한국인 문제에 대해 일본에 보상을 요구하고, 일본 정부도 법적 보상을 부정하면서도 인도적, 도의적 지원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부분적으로 대응했다는 것은 한일회담 당시 이 문제가 논의되지 않았음을 반증하고 있다. BC급 전범의 경우는 더 분명하다.

13) 일본정부는 1990년대에 잇단 대일보상청구 소송이 제기되자 2000년대에 들어 개인청구권 소멸에 관한 견해 를 보강하기 시작했다. 한국인 군인 군속과 위안부가 1991년 12월 6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제기한 태평양전쟁 한국인 피해자 소송 항소심(2003년 7월 23일 판결)에서 청구권협정의 '재산, 권리 및 이익'이란 미불 급여, 채권 등 "법률상의 근거에 의거해서 재산적 가치가 인정되는 실체적 권리"이며 '청구권'은 그 외 개념으로

"한일청구권협정에 서명한 시점에서 권리 관계가 명확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항소심 판결은 이 두 가지를 구분하지 않고 불법행위에 근거한 손해배상 청구도 포함해 국내 조치법(법률 제144호)에 의해 소멸되었다고 판단했다. 여전히 쟁점으로 남아 있음을 뜻한다.

제1차 한일회담 재일한인 법적지위위원회 제29차회의(1952년 2월 4일)에서 한국측이 BC급 전범 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방침을 질문한 것에 대해 "일본 측으로부터 그것은 별개 문제이니 별도 연구할 것이라는 답변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14) 한일 양국 정부가 BC급 전범을 교섭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한 것은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은 과제가 남았음을 뜻한다. 1965년 7월 5일, 주일대사 김동조가 외무부장관에게 보낸 문서에서 재일한인 전범자 단체인 ‘동진회’가 일본국 정부에 대한 보상청구권이 한일간 청구권협정에 의해 소멸되었는지를 문의했다.15) 이에 대해 외무부장관은 1965년 9월 28일자 「동진회의 문의에 대한 회시」에서

"일본의 징용 및 징병 등의 사유로 발생한 한국인의 대일청구권에 관해서는 ‘대일청구요강’의 일환으로 한일 회담을 통해 일본정부에 청구해 왔으나, 본 건인 연합국의 승리 및 전쟁 후의 전범재판에 기인한 한국인 전범의 피해에 관해서는 당초부터 일본에 대한 청구 대상이 아니었으며, 협정조인 후의 국내조치로서 개인 청구권 보상문제의 검토대상에서도 제외된다. 일본인 전범에 대한 일본정부의 보상 조치는 전후 일본이 독 립을 회복한 후에 취한 조치인 바, 재일한국인에 대하여는 그 보상사유의 특이성을 고려해서 조처하도록 적절한 시기에 일본 측에 촉구할 것을 지시함"16)이라고 하여 BC급 전범이 '당초부터' 청구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혔다.

한편 2006년 한일협정 문서 공개 이후 피해자 구제조치가 검토될 당시 주목을 끈 것은 한일협정 교섭과정 에서 일본이 피징용 사망자와 부상자에게 援護法 적용을 시사한 발언이었다. 1962년 2월 8일 열린 제6차 한일회담 한일청구권소위원회 제10차회의에서 宮川新一郞 수석대표는 "징용자 보상금에 관하여는 한국측은 생존자에 대하여 정신적 고통에 대한 보상을 청구하고 있으나, 그 당시의 한국인의 법적 지위가 일본인이었 다는 점에 비추어 일본인에 지불된 바 없는 보상금은 지불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망 및 傷病者에 대하여는 당시의 국내법에 의하여 급여금이 지불되었을 것인 바 미지불된 것이 있으면 피징용자 미수금으로 정리될 것이니 그 항목에서 검토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되며, 따라서 피징용자 보상금이라는 독립된 항목으로서는 응하기 어렵다"17)고 발언했다. 외무성 또한 군인․군속과 징용자에 대한 '위로금(見舞金)' 지급 을 검토한 바 있다.18)

이처럼 교섭 당시 일본정부가 징용자에게서 보상을 대신하는 위로금까지 검토했다는 사실은 2005년 7월 22일 한국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받은 청구권 자금의 성격을 판단할 때 하나의 참고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으로부터 받은 자금이 강제동원의 불법(일제 지배 자체가 국제법적으로 또한 역사적으로 불법)에 대한 배상적 성격인지, 특별한 희생을 당한 피해자에 대한 원호적 성격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판단하면서, 강 제동원피해자에 대한 위로금 지급은 "한국 정부가 정치적 차원 등 별도의 고려에서 제기한 것"이라 하여 강

14) 제29차 재일한국인 법적 지위분과위원회 경과보고(1952.2.4)」 󰡔제1차 한일회담󰡕, 81, 1011~1012쪽 15) 「한국 출신 전범자 보상」 󰡔제7차 한일회담 청구권협정 관계 설명자료, 한일회담 청구권관계자료 1965-66󰡕,

1473, 66쪽

16) 동진회의 문의에 대한 회시」 󰡔제7차 한일회담 청구권협정 관계 설명자료, 한일회담 청구권관계자료 1965-66󰡕 1473, 105쪽

17) 일반청구권 소위원회 제10차 회의록(1962.2.8)」 󰡔제6차한일회담 청구권위원회 회의록󰡕, 750, 235~236쪽.

일본 문서(1220, 17쪽)에서는 먹칠

18) 아시아국, 한국측대일청구권에 대한 대장, 외무 양성에 의한 사정의 상위에 대하여(1962.2.15), 1799, 1쪽

제동원피해자의 권리가 소멸되지 않았음을 밝혔다.19)

2. 한국정부의 최종적인 해석

2005년 8월 한일협정 문서공개 이후 강제동원피해자에 대한 보상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발표하면 서 청구권협정에 대한 한국정부의 최종적인 견해를 밝혔다. 한국정부의 종합적인 최종적인 견해인 만큼 그 의미가 크므로 주요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20)

① 한일청구권협정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샌프란시스 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②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 일본정부․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 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

③ 사할린동포, 원폭피해자 문제도 한일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④ 한일협정 당시 한국정부는 일본정부가 강제동원의 법적 배상․보상을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고통받은 역사적 피해사실’에 근거하여 정치적 차원에서 보상을 요구하였으며, 이러한 요구가 양국간 무상자금 산정에 반영되었다.

⑤ 청구권협정을 통하여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불은 ‘개인재산권(보험, 예금 등), 조선총독부의 대 일채권 등 한국정부가 국가로서 갖는 청구권,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 적으로 감안되어 있다.

⑥ 청구권협정은 청구권 각 항목별 금액결정이 아니라 정치협상을 통한 총액 결정 방식으로 타결되었기 때문에 각 항목별 수령금액을 추정하기 곤란하지만, 한국정부는 수령한 무상자금 중 상당금액을 강 제동원 피해자의 구제에 사용하여야 할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판단된다.

⑦ 한국정부는 일제 강점하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외교적 대응 방안을 지속적으로 강구해 나가 며,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해서는 UN 인권이 등 국제기구를 통해서 문제제기를 계속한다.

이 해석은 그동안 강제동원피해자들이 일본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벌일 때 애매한 태도를 취했던 한국정부의 견해와는 달리 법적 책임과 도의적 책임을 구분하여 분명하게 피해자의 권리를 인정했다는 점에 서 그 의의는 크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불법행위에 대해 일본정부에게 법적 책임이 있음을 밝히긴 했으나, 위안부 문제 등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가 외교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우려하여 일본정부를 상대로 적극적인 요구는 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이 한국정부에게 책임을 추궁할 있는 명분을 남겨 놓은 것이다.

19) 󰡔국무총리실한일수교회담문서공개등대책기획단 활동백서󰡕, 80~82쪽.

20) 국무조정실 보도자료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 개최」, 2005년 8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