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천황 및 처벌을 받거나 받지 않은 군국주의자가 전쟁의 주요 책임자임을 분명히
9) 袁秋白 외 편역, 『죄악의 자술서(罪惡的自供狀)——일본 전범에 대한 신중국의 역사 재판(新 中國對日本戰犯的歷史审判)』, 解放軍出版社, 2001년, 8p.
하는 동시에, 우리는 일본 천황과 군국주의자 통치의 기반으로서 일본 민중을 잊어서는 안 된다. 비록 우리 역시 그들을 종종 전쟁의 피해자라고 부르고, 그들은 능동적으로 또는 수 동적으로 침략 전쟁 속에 이끌려 들어가 군국주의자가 되어 그 군국주의와 파시즘의 희생 자가 되었다지만, 피침략국에게 일본 민중이 과연 피해자인가 아니면 가해자인가, 이는 우 리의 인식 속에서 늘 애매한 문제였다.
2차 대전 이후 중국의 대일 정책은 일본 군국주의와 일본 민중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으 며, 전쟁 책임자를 일본의 ‘군벌’로 보고 일본 민중의 전쟁 책임은 배제하고 있었다. 일찍이 1945년 8월 15일 장제스는 ‘항전 승리를 전국 군민과 세계 인사에서 알리는 글’이라는 방송 연설에서 두 가지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다. “우리 중국 동포들은 ‘과거의 죄악을 염두하 지 않고’ ‘남들과 잘 지내는 것’을 우리 민족 전통 가운데 가장 높고 귀한 덕으로 알아야 하 며, 우리는 일본의 호전적 군벌만을 적으로 볼 뿐 일본 인민은 적으로 보지 않는다고 일관 되게 밝혀 왔다……, 우리는 보복도 적국의 무고한 인민의 치욕도 원하지 않으며, 나치 군 벌에 우롱당해 내몰린 그들에게 단지 연민을 표하면서 그들이 스스로 잘못과 죄악에서 벗어 나도록 할 뿐이다. 폭력으로 과거의 폭력에 대응한다면, 과거 그들의 잘못된 우월감에 모욕 으로 응답한다면, 영원히 지속될 뿐 이는 우리가 원하는 인의(仁義)의 목표가 아니다.”10)
국민당 통치 당시에 이러한 한계가 있었다면,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이후에도 일본의 전 쟁 책임을 계급 분석의 관점에서 인식하면서 역시 ‘일본 민중은 전쟁 책임이 없다’는 관점 을 강화하였다. 계급 분석의 지배 밑에서 우리는 일본 인민 또는 민중과 한 줌의 군국주의 자 사이에 엄격하게 심지어 깨끗하게 선을 긋는 데 익숙하다. 우리가 믿는 유물사관의 기 반을 뒤흔들까 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유물사관은 또한 모든 역사는 각종 힘이 합쳐진 결과이며 한 사회가 어떻게 움직이든 어느 방향으로 가든 결국은 내재적 사회구조 가 작용한다는 이치를 우리에게 일깨운다. 일본 침략 전쟁의 전반적 사회 배경과 역사 전 통을 무시하거나 회피한다면, 이 침략 전쟁의 민중 기반을 무시한다면, 이는 역사를 추상화 하고 단순화하는 것으로 당시 전쟁의 총체적 모습과 장기적 성격을 해석해 낼 수 없다. 다 행히 일본 민중의 전쟁 책임에 대한 재인식이 최근 중국학자와 소수 일본학자의 주목을 받 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일본 민중이 어느 정도 전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 다.11)
10)『총통 장제스 사상 발언 총서』卷32(書告), 123p.
11) 일본민중이 전쟁 책임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그 동안 학계와 민중이 관심을 가져온 문제로서, 2000년 7월 중국 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항일전쟁연구』 편집부는 ‘일본의 전쟁 인식 좌 담회’를 가지고 일본 민중의 전쟁 책임 문제에 대한 세미나를 진행하였다. 吳廣義, 『침략 역 사 직시, 중일 역사 인식 공유 추구—‘일본의 전쟁 책임 학술 토론회’ 개괄』, 2000년 3호 참
물론 우리는 일본 군국주의자가 전체 침략 전쟁에 대해 주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 하지만, 일본의 대외 확장과 침략은 전체 일본 민족이 생존 공간 확대를 추구한 결과라는 점 또한 인식해야 한다. 특히 1931년부터 194년까지 14년에 걸친 침략 전쟁은 민중이라는 강력한 기반을 배경으로 하지 않았다면 결코 불가능했으며 또한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 이다.
일본 민중은 과연 어떻게 이 전쟁을 지원했을까? 일부 중국학자는 일본 국민의 정치 신 앙, 직업 구조 등 다각적으로 이 문제를 연구하였으며, 이는 과거 민중을 단순히 ‘일본 인 민’이라고 보던 견해에 비해 객관적인 편이다. 쑨리샹(孫立祥)은 자신의 글에서 일본 민중 을 노동 대중군, 여성군, 병사군, 종교인사, 사민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등으로 크게 분류하 고, 전쟁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각각 살펴보았다. 이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기존에 ‘노동 인민’이라는 범주 안에 넣는, 노동자 계급을 주체로 하는 노동 대중 속에서 전쟁에 대한 맹 종과 지지가 일찍이 청일전쟁 발발 이전에 나타났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날로 고 조되면서 중국에 대한 전면전 개시 당시 최고봉에 도달했다. 그들은 자신의 직업을 통해 이 전쟁을 위해 일하는 동시에 정부의 침략 확대를 위해 강렬한 정신적 배경이 되었으며, 병사의 경우 그들은 군복을 입은 민중의 자제에 불과하며 그들의 폭력은 어떤 경우에는 상 관의 명령에 복종한 결과였지만 자발적으로 폭력을 행사한 경우도 있었다. 반전을 주장하 던 좌파인사가 전향한 경우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 속에서 일본 침략사가 어떤 의미 에서는 전체 일본 민족이 만들어 낸 결과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12) 물론 이러한 결론이 전쟁 당시 일본 각계 인사가 반전을 위해 쏟은 노력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일본의 고도의 권위적 전쟁 체제 속에서 이들의 저항이 결국은 탄압으로 평정되었을지라도 그들은 인류의 진보와 이성을 대표하며, 단지 아쉽다면 이들이 일본 민족이라는 전쟁 기계가 돌아가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13)
많은 일본학자 역시 일본 국민이 이 전쟁에 열광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로카와 다이키치(色川大吉)는 ‘쇼와 50년사’에서 난징 함락 이후 메이지 연간에
고. 이미 발간된 일본 민중의 전쟁 책임 관련 논문으로는 주로 孫立祥의 「일본 민중과 중국 침략 전쟁」(『世界歷史』, 1994년 4호); 王也揚, 「군국주의와 일본 사회 대중—木坂順一郎 의 ‘1억 옥쇄—15년 전쟁과 전쟁에 대한 민중의 지지’ 서평」(『抗日戰爭研究』, 2000년 3 호); 孟國祥, 「침략 전쟁에 대해 일본 대중이 져야 할 책임 문제에 대하여」(『民國档案』, 2003년 4호) 등이 있다.
12) 孫立祥, 「일본 민중과 중국 침략 전쟁」, 『世界歷史』, 1994년 4호 참고.
13) 일본 민중이 왜 전쟁의 발발과 진전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지 못 했는가와 관련하여, 일본 학자 若規泰雄의 저서 『일본의 전쟁 책임』(社會科學文獻出版社, 1999년)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 술 및 해석을 하고 있다.
출생한 노인의 말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는 청일전쟁 이후 43년만의 희소식이 다, 숙원을 풀어 매우 기쁘다”, “본토의 우리는 모두 ‘애국행진곡’을 부르면서 등불과 깃발 을 들고 신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14) 일본의 저명한 학자인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 郎)도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일반 국민 대다수는 비록 학교 교육 등을 통 해 군국주의 정신을 주입받았다고 하지만, 그들 스스로 능동적으로 전쟁을 적극 지지하면 서 전쟁에 최대한 협조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전쟁을 혐오하고 반전 의식을 가진 이들은 소수의 예외였다.”15) 또한 일본 류코쿠(龍谷) 대학 기사카 준이치로(木坂順一郎) 교수는 ‘1억 옥쇄—15년 전쟁과 전쟁에 대한 민중의 지지’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죽음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 병사들, 잔인무도한 학살에 참여한 남자들, 만세를 부르며 남
편과 아들을 전선으로 보낸 여성들, 배를 곯아가며 공장에서 무기 생산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일한 학도공들, 그들은 왜 이 전쟁을 이토록 적극적으로 지지했는가”16) 일본의 저명 한 평론가인 쓰다 미치오(津田道夫)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침략 전쟁을 일으킨 주모자는 천황, 군벌, 관료, 재벌이므로, 이들에게 주된 전쟁 책임을 묻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와 함께 전쟁의 광기에 휩쓸린 대다수 국민도 주모자와 별도로 전쟁 책임을 져야 한다.
전선의 수많은 병사들이 중국 민간인과 포로를 죽였는데, ‘명령 집행’을 구실로 삼는다해도 스스로의 죄를 벗을 수는 없다. 또한 후방에서 일본 국내의 수많은 민중도 여러 방식으로 거국적인 전쟁 체제와 대외 침략 확장 전쟁을 적극 지원하였으므로 전쟁 잭임을 분담해야 한다.”17)고 지적했다.
중국 측에서 오랫동안 고수해온 “일본 인민도 전쟁의 피해자”나 “일본 인민은 무죄”와 같은 발언에 대해, 일부 정의감을 가진 일본인조차도 냉정하게 바라보는 편이다. 일본 작가 인 모리무라 세이치(森村誠一)는 중국 방문 이후 다음과 같이 진지한 성찰을 하였다. “중 국 방문 기간 동안, 나는 가는 곳마다 ‘일본 군국주의자와 일본 인민은 구별해야 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 군국주의자와 일본 인민이 진정으로 구분 가능할까? 우 리 일본인이 중국측의 이러한 발언을 들으면 과연 그럴 듯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일 본인이 비록 일부 군부 지도자에게 잘못된 길로 이끌려갔다고 하지만, 그들은 모두 천황을
14) (日)色川大吉 지음, 天津政协翻译组 옮김:『쇼와 50년 사화』, 黑龙江人民出版社, 1982년, 54p.
15) 齊世榮 편집, 陳詳超, 鄭寅達, 孫仁宗 지음:『파시스트 운동과 파시스트 독재』, 中國靑年出 版社, 1999년, 427p 재인용.
16) 王也揚, 『군국주의자와 일본 사회 대중—木坂順一郎의 ‘1억 옥쇄—15년 전쟁과 전쟁에 대한 민중의 지지’를 논한다』, 『抗日戰爭研究』, 2000년 3호 참고.
17) 中原,『‘일본의 전쟁 역사 인식 좌담회’ 综述』, 『抗日戰爭研究』, 2000년 3호.
수령으로 하는 거대한 촌락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여기면서 야마토 민족을 ‘세계 최고’의 민 족으로 자부하는 민족 의식이 강했다. 군부는 그들의 이러한 생각과 의식을 이용해 국민 총동원의 미친 전쟁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우리는 단일 민족 국가로서, 오랫동안 섬나라 안에서 개성없는 집단주의 교육을 받으면서 충군애국의 정신을 길러왔다. 우리 일본에 독 재자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국민 자질이 분명 존재한다. ‘조국을 위하여’라는 깃발이 면 죄부가 되었고, 전후에도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해 아직도 이 깃발를 들 고 거들먹거리는 이들이 남아있다.”18)
이상과 같은 일본 학자들이 일본 주류 사회나 지식인의 목소리를 대표할 수는 없겠지 만, 필경 정의의 목소리다. 일본 국내의 양식 있는 지식인조차 일본의 침략 전쟁을 전체 일 본 민족의 행위로 냉정하게 바라보는데, 그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중국인은 왜 일본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겨우 몇몇 군국주의자들에게만 돌리려 애쓰는 것일까? 지금의 일본에서 우리가 당시의 군국주의자를 다시 찾아내기란 불가능한 상황에 서, 일본의 중국 침략 책임은 도대체 누가 져야 한단 말인가.
당시 일본의 통치자와 일본 민중은 전쟁 과정에서 사실상 일종의 공모 관계를 형성하였 다면, 일본 군국주의자와 일본 민중 사이에 도대체 전쟁 문제에 대한 공모는 어떻게 실현 되었을까? 전술한 바와 같이, 일본 국민이 국가 전체의 전쟁 기계로서 돌아간 데에는, 통치 집단의 강제 조치 외에 더 중요한 요인이 있었다. 즉 일본이 파스시트의 길을 선택한 데에 는 일본 민족의 내재적인 요인이 근본적으로 작용했다. 다시 말해, 통치 그룹이 일본 국민 의 이러한 사회적 전통을 성공적으로 이용했기에 일본이라는 전쟁 기계가 돌아갈 수 있었 던 것이다.19)
사람들은 늘 집단을 형성해왔고, 이러한 집단은 혈연관계와 기타 사회(경제)적 상호 왕 래 속에서 공동의 정치 권력 구조 및 공동의 언어와 문화 속에서 파생되는 응집력을 갖는 다. 특히 근대 민족국가 탄생 이후 민족주의는 집단 정체성을 조직하고 강화하는 매우 핵 심적 형식이다. 이는 능동적이며 자각적인 정치 공동체 구축 과정에서 최소한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정치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 민족이나 문화적인 유사 성을 각별히 강조한다는 점과 어떤 특정 국가에서 공동체 구성원이 공유하는 시민 신분 (Common Citizenship)20)에 특히 주목한다는 점이다. 일본은 가족을 중심으로 특히 강렬
18) 金輝,『통문창명(慟問蒼冥)—일본 중국 침략 만행 비망록』, 解放軍文藝出版社, 1995년, 464p.
19) 여기서 말하는 ‘일본 민중’은 ‘일본 인민’이나 ‘일본 대중’ 등과 동일한 의미이다. 하동.
20) Craig Calhoun 지음, 黄平等 옮김, 『민족주의와 시민사회: 민주, 다양성 그리고 자결』, (英)J.C.알렉산더, 鄧正來 엮음:『국가와 시민사회—이론적 연구의 길』, 中央編譯出版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