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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일운동과 일중교과서문제 ― 1910~2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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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중간 교과서문제가 발생한 것은 1910년대의 일이다. 청시대 말기에 학제(學制)가 공 표되었고 교과서가 ‘검증제도’를 통해 채택되면서 한편으로 일본교과서 영향을 강하게 받으 며 본국사(중국사)등의 국민의식 함양을 위한 교과서가 편집되었다. 일중관계가 긴밀해지 면서 또한 일본의 대중관여가 강화되면서 각각 독자적으로 국민의식 함양을 위해 편집된 교과서가 점차 양국 마찰의 원인 혹은 상징으로 인식되어 갔다. 이는 공적 서술로 인식되 기 마련인 교과서가 국민의식을 대표하고 또한 이를 함양하는 것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3)

일중 간 교과서문제는 1914년에 발생되었다. 이 사건은 1914년 9월13일에 ‘도쿄니치니 치신문’, ‘오사카마이니치신문’에 ‘지나정부에 엄담해라 배일문자로 넘치는 지나교과서 절 멸을 기하라’는 기사로 시작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4) 하지만 1914년 11월 4일 상하이 총영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주화공사 히오키 에키[日置益]에게 보낸 서한에는 “전

술한 ‘고등소학론설문범’은 지나소학교 교과서로 배일적 문자를 기재하므로 본년 8월 중에

대련(大連) 발행 요동신보(遼東新報)에 게재되었다. 당시 이는 상하이에서 발행된 서적이 라고도 기재되어 있다”라고 쓰여 있다.5) ‘요동신보(일본어지)’ 내용은 확인할 수 없으나 일본에서의 보도가 대련의 일본어지 보도를 바탕으로 행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즉 1914년 8월에 중국의 일본어 신문에 이미 보도되었으며 이를 본 상하이 총영사가 조사를 하고 있

3) 졸고「역사이야기 속의 근대중국론-일본은 왜 중국의 주요적인가-」(RATIO01, 고단 샤, 20062)등을 참조.

4) 1914913일「지나정부에 엄담하라-배일문자가 넘치는 지나교과서의 절멸을 기하라」

(『도쿄니치니치신문』『오사카마이니치신문』).

5) 다이쇼 3114, 샹하이의 아리요시 아키라 총영사로부터 주베이징 히오키 에키 공사에게,

「지나소학교 교과서에 배일적 문자기재에 관한 건」(「제국제외국외교관계잡찬」일지간의 부, 배일문서에 관한 건, 일본외무성보존기록,1.1.2 1211).

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9월 13일 기사가 효시는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측이 교과서라고 생각한 서적은 사실 검증 받은 교과서가 아니라 sub readers에 불과했는데 히오키 에키 공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본 외무성은 1914년 9월 23일에 주화공사관에 훈령을 발하여 문제해결을 지시했으며 26일 히오키 공사가 중화민국교육부장 탕화룽[湯化龍]에게 ‘개인 서한’을 보냈고 탕화룽으로부터 답장도 받았다.6) 개인적 서한을 보낸 것은 이것이 교과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측은 검증 받 은 교과서가 아니라는 점, 언론의 자유가 헌법상 보장되고 있는 이상 단속이 어렵다는 점, 일본에도 중국측 감정을 자극하는 서적이 있다는 점을 들어 반론했다. 그러나 10월 2일 위 안스카이[袁世凱] 대총통은 대총통령을 발하여 ‘신인선린(親仁善隣)’의 과점에서 서적 내용 의 수정을 요구하였다.7) 하지만 대총통령에는 서적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수정해야 한다는 구체적 명시가 없어서 서적이 이후에도 계속 그대로 출판될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선행연구에서는 1914년 이후로 나타난 교과서문제는 1918년 혹은 1919년이라고 한다.

하지만 1914년부터 1917년 사이에도 소위 배타적 담론은 공적인 장, 사적인 장에서 계속 되어 종종 문제가 되었다. 예를 들어 중국측 외교 당안에는 1915년 6월 안건이 보인다. 그 것은 중화민국교육부가 ‘중일국치(21개 조항 요구)’를 교과서에 포함시키도록 하는 대총통 의 인가를 받아 참행원의 의결을 기다리고 있다는 일본 신문의 보도와 일본 국민과 정부가 놀라고 있다는 점을 보고하면서 동시에 사태가 확대되지 않도록 억제를 요구하는, 주일공 사 루쭝위[陸宗輿] 공사가 외교부 위안스카이 대총통에게 보내는 전보이다.8) 5월 7일 혹9일을 국치기념일로 보는 경향은 1910년대~20년대 교육 현장에서도 확대되는데 19156월은 21개 조항의 내용이 보도된 시기에 해당한다.

1919년 안건은 ‘중화교육계’(제8권 제1기, 1919년 7월)에 게재되었던 ‘신식교과서여일본’

이라는 기사에 유래된다. 이 기사에서 문제로 지적된 것은 중화서국의 ‘국민학교용 신식국문 교과서’, ‘고등소학교용 신식수신교과서’인데 이 책들은 검증 받은 공식 학교교과서였다. 하 지만 이 안건이 발생한 것은 1919년이 아니라 1916년 말의 일이었다.9) 배일교과서의 존재

6) 다이쇼 3923,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 외무대신으로부터 지나 주재 히오키 에키공사 에게 「지나소학교 교과서에 배일적 문자기재에 관한 건」, 다이쇼 3926, 히오키 공사 로부터 탕화룽 교육총장에게(「제국제외국외교관계잡찬」(상동사료).

7)『정부관보』,『교육잡지』(68, 1914, 69페이지).

8) 국민 4611일 外交部収, 駐日陸宗輿公使電「日報宣傳我國將中日國恥紀念編入教科書 事」(「中日二十一条案」, 中華民国外交部檔案, 033309501007, 중앙연구원근대사연구소 소 장). 중앙연구원근대사연구소편『中日関係史料  二十一条交渉(上)中華民国四年至五年』(중앙 연구원근대사연구소, 1985, 561문서, p.400).

9) 다이쇼 51227, 복주 주재 영사 사이토 요시에[斎藤良衛]가 지나 주재 특명전권공사 하

를 지적한 것은 복주(福州) 총영사였으며 그의 보고를 받은 모토노 이치로[本野一郎]외무 대신이 상하이 총영사관에 훈령을 내려 이러한 교과서 내용은 ‘일본과 지나 양국국교에 악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적당한 방법’으로 중화서국에게 그 내용을 삭제하도록 명하게 한 것이다.10) 한편 복주 총영사의 보고를 받은 하야시 곤스케[林権助] 공사는 베이징 외교부 에게 내용 수정뿐만 아니라 판매정지까지 고려한 항의를 표시했다.11) 이후 상하이에서 조정 이 이루어졌으며 중화서국 지배인을 불러서 일본측 항의 내용를 바탕으로 수정요구를 하고 또한 베이징 외교부로부터 요청받은 교과부총장 판위안롄[范源濂]의 명령이 중화서국에 도 달하게 되어 증쇄분부터 일본관련 강의 내용에 맞춰 수정하게 되었다고 한다.12)

1919년 ‘중화교육계’가 다시 한번 2년 전 안건에 대해 언급한 것은 배일풍조가 강해지고 1919년에 5·4운동 등 ‘학계’에도 그러한 풍조가 만연해진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13) 화서국은 다시 한번 1917년 조치에 대한 ‘반론’을 게재한 것이다. 우커다[呉科達]는 그러한 행동의 배경으로 배일감정뿐만 아니라 일본과 깊은 관계가 있는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 대항한다는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1920년대에 들어서도 일본측은 배일교과서를 계속 조사했다. 그것이 배일사상을 유지시키고 있다는 점, 또한 정부가 공적으로 이를 추진 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1년 영사보고의 논조를 보면 5월9일 이 국치기념일이 되었고 이 날을 전후해서 배일 행사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기는 했으나 교과서에 대해서는 1910년대와 또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1920년 말 우치다 고 사이[内田康哉] 외무대신은 오바타[小幡] 공사 및 각 영사에게 교과서 조사를 명했다.14)

각지 영사관이 보낸 보고 중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상하이 등에서 국어와 역사 등의 교과서에 배일적 풍조는 있으나 반구미도 있으며 또한 일본에도 배외적 풍조가 있으므로

야시 곤스케에게 보낸「지나소학교과서 중 배일과정에 관한 건」(「제국제외국외교관계잡찬 일 지간의 부」제3, 일본외무성보존기록,1.1.2 121).

10) 다이쇼 625, 모토노 외무대신이 상하이 주재 총영사대리 原田萬治에게 보낸「지나소 학교과서 배일문자에 관한 건」(상동사료).

11) 다이쇼 6131, 지나주재 공사 하야시 곤스케로가 복주 주재 영사관 사무대리打田庄六 에게 보낸「지나소학교과서 배일문자에 관한 건」(상동사료).

12) 다이쇼 6312, 상하이 주재 영사관 原田萬治가 모토노 이치로 외무대신에게보낸「지나 소학교과서 중 배일문자에 관한 건」(상동사료). 1917424, 「函中華書局請将小学教 科書中日人所指為排日之処再加斟酌」(『교육공보』제4년 제6,〈공독〉, 4041페이지, 19174).

13) 뺷중화교육계』(8권 제1, 19197, 13페이지).

14) 다이쇼 91228, 우치다 고사이 외무대신이 지나주재 오바타 공사, 지나주재 각영사에게

「배일적 문서에 관한 건」(「제국제외국외교관계잡찬 일지간의 부 배일적 문서에 관한 건」, 일본외무성보존기록, 1.1.2 1211).

특별히 문제시하지 않는다는 보고가 이어졌다는 점이다. 봉천(奉天) 총영사도 이와 같은 보고서를 보냈다. 봉천 총영사 아카쓰카 쇼스케[赤塚正助], 재남(済南)주재 총영사인 모리 야스사부로[森安三郎]를 비롯 한구(漢口), 구강(九江), 장사(長沙), 광동(廣東)등에서도 비슷한 보고를 올렸다. 그 중에는 1910년대 배일 문제로 지적되었던 교과서에 대해 언급하 면서 그 내용에 배일적 풍조가 없다고 판단하는 보고서도 있었다. 한편 우장(牛荘) 등에서 는 기존과 같은 경계심을 나타내는 보고서를 올렸다.15) 또한 성도(成都)에서는 우장에서는 문제시하지 않았던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의 ‘고등소학생용 신법국어교과서’의 내용이 ‘배 일 경향’을 띄고 있다고 하였다.16)

이처럼 중화서국의 교과서를 문제시하는 경향이 있으면서도 1920년대 초에는 교과서 기술을 문제시하는 경향은, 적어도 영사보고에는 많지 않았으며 또한 해석도 다양했다. 이 러한 점으로 볼 때 이 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의회와는 달리 외교관들은 비교적 온 당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로 배일교과서를 둘러싼 보고서는 1927년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외무대신 시기 에 보고되었으며, 이 시기에는 아직 강한 배일을 지적하는 보고서가 많지는 않았다.17)

지만 1929년이 되면서 삼민주의를 통한 불평등조약철폐운동과 배일운동의 관련성과 함께

포스터와 연극, 음악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배일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적잖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나카 외무대신이 1929년 5월 4일 중국 주요 재외공관에 전보를 보내 조사요청을 한 결과18) 국민당이 배일사상을 고취하고 있다는 견해가 많이 보고되었다.19) 특히 1927년 당시에는 억제하는 듯한 보고를 했던 蘇州 영사 岩崎가 1929년에는 군에서는 일본을 가상적국으로 삼고 있으며 당의교육에서도 일본을 대상으로 삼고 있고 또한 학교에 서도 배일교재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례를 들면서 기존의 억제하는 듯한 논조가 사라지게 된다.20) 외무성 아세아 제1과는 1929년 10월에 ‘지나의 배일교육 실정’이라는 보고서를 작

15) 다이쇼 10127, 우장주재 영사 清水八百一이 외무대신 우치다 고사이에게 보낸 「배일 적 문서에 관한 건」(상동사료).

16) 다이쇼 10216, 성도주재 총영사관 사무대리 国原喜一郎가 외무대신 우치다 고사이에 게 보낸 것(상동사료).

17) 쇼와 21021일발, 소주주재 영사 岩崎栄蔵로부터 외무대신 다나카 기이치에게 「지나소 학아동의 배외감화에 관한 보고의 건」(「각국의 교육제도 및 상황관계 잡건 중국의 부, 1

「배외교육관계」, 일본외무성보존기록, I.4.0 22).

18) 쇼와 454일발, 다나카 외무대신으로부터 지나 주재 대리공사 및 각 총사에게「지나에서 의 배일교육에 관한 건」(상동사료).

19) 쇼와 4513일발, 복주주재 다무라 총영사로부터 다나카 외무대신에게, 동일 길림주재 川 越 영사로부터 다나카 외무대신에게(상동사료).

20) 쇼와 4512일발, 소주 주재 岩崎 영사로부터 다나카 외무대신에게(상동사료).

성하여 일본정부는 수 차례에 걸쳐 국민정부에게 배일화 운동단속을 요청하였고 국민정부 측도 동의하였으나 실제로는 효과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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