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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 발발과 교과서문제의 전개

ドキュメント内 untitled (ページ 108-113)

성하여 일본정부는 수 차례에 걸쳐 국민정부에게 배일화 운동단속을 요청하였고 국민정부 측도 동의하였으나 실제로는 효과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답변은, 동북부를 제외하고는, 중화서국 또는 세계서국의 교과서를 열거하면서, 1920년대의 배일성은 특별히 보이지 않는다는 등의 억제한 듯한 영사보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국제연맹 일본대표에게 최종적으로 100점이 넘는 ‘배일교과서’가 송부되었다.

한편 중국측도 대책을 강구하였다. 교육부가 작성한 1932년 3월 21일 초고의 ‘대일협상 관어교육지사항(対日交渉関於教育之事項)’은 그 대책을 말한다.27) 1910년대 안건 이후 중 국측은 일본측 출판물에도 배외적 혹은 중국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는데

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측이 ‘배외교육’을 국제연맹의 장에서 언급할 것에 대비하여 대응

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 내용을 보면 우선 갑 ‘日方如要求『停止排日教育』我方応付之擬議’

에서 첫 번째로 교육주권에 대해 언급하였고 두 번째로 중국 교육이 배외주의를 근거로 하 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일본측이 주장하는 소위 ‘배일교육’에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는 것을 변론하면서 네 번째로 국제사회나 중국 교과서가 일본교과서보 다 타당하며 신중하다고 주장하였으며 다섯 번째로 일본 교과서에 중국 모욕과 중국에 대 한 침략 고려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를 삭제해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 이 담겨 있다.

을「我方対日応提出要求之擬議」는 중국측이 일본측에게 요구하는 내용으로 3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일본 교과서의 대중모욕적, 침략적 내용의 삭제. 두 번째로는 만주사변 이 후 만주의 일본 교육정책에 대한 비판과 철수. 세 번째로는 만주의 교육상, 문화상 손해 배 상. 이 문서 부록에는 ‘日本文部省所編審中小学校教科書之鼓励侵略中国教材’가 있으며 중국 측이 수집한 교과서명 및 중국침략과 관련된 부분이 발췌되어 있다.

일중양국은 양국의 배외교육(혹은 배일교육, 배화교육)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후, 국제 연맹의 장에서 논의를 하게 되었다. 리튼조사단의 조사는 1932년 3월에서 6월에 걸쳐 실시 되었으며 1932년 6월 25일에는 국제연맹조사위원회에서 중화민국 구웨이쥔[顧維鈞] 대표 가 배일교육에 대한 조회를 발하였다. 그 내용은 일본측 지적에 대해 (1)교과서에 그러한 내용을 포함시키는 것은 국권회수시의 일반적 방법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 (2)과격한 내용은 있으므로 우호친선적 관점에서 수정을 가할 필요가 있다는 점, (3)하지만 동시에 일본의 그것에 대해서도 수정을 요구한다는 점, 등이었다. 또한 顧는 일본이 배일교과서라 고 한 서적에 대해서도 검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등의 반론을 함과 동시에 일본 교과서 중 에서 중국에 대해 모욕적 내용을 포함하는 것을 열거하였다. 1932년 10월, 국제연맹에서의

).

27)「関於所謂排外教育問題」(중앙연구원근대사연구소당안관 소장, 국민정부외교부당안, 당안번호 없음).

논의에서 구웨이쥔은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28) ‘지나의 국민주의는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으나 그 저변에는 배외사상은 없다’29) 마쓰오카[松岡]는 이에 대해 ‘배외사상은 지나에 엄존한다. … 리튼보고서에도 있듯이 오랜 세월에 걸쳐 배외교육이 행해지고 있는데 그 결 과가 어떻겠는가’30) 이에 대한 구웨이쥔의 반론은 ‘국민주의운동에 대해 마쓰오카 씨는 배 외교육이 가져오는 무서운 결과라고 말하나 그러한 것이 없다는 점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 다’ 이라는 것이었다.31) 논의는 서로 찬물 끼얹기 식이었지만 ‘배외’인가 아닌가 라는 점, 국권회수시의 일반적 방향성인가 아닌가 라는 점, 일본에서의 유무 문제 등이 쟁점이었다.

리튼위원회 보고서의 ‘근대지나의 국민주의는 지나가 현재 통과하려는 정치적 과도기에 동반되는 일반적 현상이다. 이와 같은 국민적 감정 및 요망은 비슷한 상태에 놓인 모든 국 가에서 볼 수 있다’라는 언급은 옳다. 실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일본이 똑 같은 경험을 하였으면서도 지나를 동정하는 대신 지나국민의 정당한 요망을 오해하고 그 실현에 반대하 는 첫 나라라는 점이다.32) 리튼보고서는 1932년 10월에 공표되었고 이후로 국제연맹에서 보고서를 둘러싼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 보고서 제7장에는 일본의 경제적 이익에 연관시킨 내용이 있고 중국측의 보이콧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배일교육 혹은 배일교과서에 대해 서는 보이콧과의 연관성이 분명해 보이지는 않았다. ‘국제연맹지나조사위원회보고서에 대한 제국정부 의견서’(국제연맹협회, 1932년 11월) 등도 그러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1932년 12월 6일 구웨이쥔은 일본의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주장에 대한 코멘트를 국제연맹에 제출했다. 구웨이쥔은 ‘일본은 원래 지나의 통일을 방해하는 정책을 내세우고 있으며 극동 평화의 진정한 위협은 일본의 전통적 대륙정책에 있다. 다나카 상주문은 이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마쓰오카 대표는 이것이 위조되었다는 점을 역설하나 일본의 지나 에 대한 행동을 보면 이것이 설사 상주문이 아니라 하여도 중대한 의의를 지니는 문서라는 점은 확실하다’ 등 일본을 비판하면서 ‘지나가 배외라는 말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며 배일 은 일본 침략에 대한 반동’이라면서 ‘일본에도 배외교과서는 결코 드물지 않다’고 반론한 다.33)

28) 국제연맹사무국 도쿄지국편찬 『국제연맹의 일지문제의사록 후편』(국제연맹기록간행회, 1933년)참조.

29) 상동, 34페이지.

30) 상동, 40페이지.

31) 상동, 44페이지.

32) 국제연맹사무국 도쿄지국편찬 전술 서적, 68페이지.

33) 쇼와 7126, 「나의 의견서에 대한 구웨인쥔의「코멘트」」(국제연맹에서의 절충관계

/일지사건에 관한 교섭과정(연맹 및 대미관계)11권상(1), 일본외무성보존기록, A.1.1.0 211215)“3160.Apeal of Chinese Government: Report of the Commission of Enquiry

주지하다시피 일본의 국제연맹탈퇴 등으로 인해 서로의 교육비판은 국제연맹의 장에서 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후 일중전쟁을 향한 배일교육이 격화되었나 하면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재외공관의 보고를 보면 특히 1936년 8월 24일의 성도(成都)사 건 이후로 장제스[蒋介石]가 대일평화협상을 하고자 했을 때 8월 29일에 목린(재)령이 발 포되면서 배일금지가 제창됨과 동시에 배일교과서의 배일부분 삭제를 교육부가 실시한다고 전해졌었다.34) 그러나 서안사변(西安事変)의 영향도 있어서 일중간 평화협상이 난항을 겪 으면서 이러한 내용이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일중전쟁 발발 후 일본은 만주국뿐만 아니라 점령지에서 교과서의 ‘배일’부분을 삭제하

려 했으며 유신정부와 임시정부가 국정교과서를 편찬할 때는 배일정신 일소, 구미의존 제 거 등이 기본방침이 되었던 것 같다.35) 1940년에 국민정부(왕자오밍[汪兆銘] 정권)가 남 경(南京)에 수립되면서 유신・임시정부와 마찬가지로 초등・중등교과서는 당초 검정제도가 모색되었으나 국정교과서가 되면서 ‘유신정부시대 교과서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재편찬되었 으나 결국 유신정부 교과서의 부분적 수정에 머무른 것으로 일본측은 이해하고 있었다.36) 일중전쟁이 진행되면서 일본세력이 미치는 곳에서는 일본이 편찬한 중국어 교과서가, 그리 고 국민당 통치하에서는 일본이 배일교과서로 간주하는 교과서가 사용되었다.

맺음말

전쟁 전에는 교과서는 국민의식 함양뿐만 아니라 서로 이웃나라를 비판하는 측면을 내 포하고 있었으므로 배외사상을 지탱하고 선린을 해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교과서 는 단독으로 문제시 된 것이 아니라 다른 서적이나 전단지, 포스터 등 다양한 매체 중 하 나로 취급되었었다. 외교의 장에서는 일본측 항의로 시작되었으나 중국측은 선린을 강조하 여 외교문제로 비화되지 않도록 하면서도 동시에 일본측 출판물을 비판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중국측도 명백히 일본 교과서 비판을 시작하면서 전시 교과서는 진영을 나타내

set up in virtue of the Resolution adopted by the Council on December 10th 1931(continuation)”, League of Nations Official Journal, December 1932. Pp.1877‐1890.

34) 쇼와 111125, 南京 須磨 총영사로부터 有田외무대신에게(「쇼와 11년 南京의 일지교 섭관계」,일본외무성보존기록・松本기록, A.1.1.0 910).

35) 쇼와 13년 7월 30일, 전부장특무부장 原田熊雄로부터 육군성에게「유신정부교과서 편찬에 관 한 건」(『육지보대일기』쇼와 13년1~13.8.26, 방위성방위연구소 소장).

36) 쇼와 15730, 南京주재 花輪義敬총영사로부터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대신에게「국민정 부교육부의 현상에 관한 건」(상동사료).

는 메르크말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을 보면 적어도 1920년대 초반에서 중반 에는 각 지역 영사들이 교과서의 배일성을 특별히 지적하지 않은 모습이 드러난다. 이러한 자세가 시데하라[幣原]외교와 연관이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국민정부 성립 후 그들의 논 조도 배일성을 지적하는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1936년 일중평화 협상시에는 중국 측이 교과서 개정에 응하려는 측면도 있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전쟁 전의 교과서를 둘러 싼 외교 협상은 표면적으로 선린을 강조하면서 상황이 일관되게 악화되어 간 것은 결코 아 니며, 상황 개선을 위한 노력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점은 향후 검토과제이다.

전후 일본교과서는 군국주의 부정(평화국가), 천황숭배 시정과 민주주의 강조 등과 같 은 관점에서 수정이 가해졌다. 중화민국의 대일점령정책에 대한 관여 정도에 대해서도 충 분히 해명된 것은 아니지만 ‘지나’라는 호칭을 공문서뿐만 아니라 검열을 통해 출판물에서 제거했다는 것과는 별도로, 역사 등의 교과서에서 중화민국이 원하듯 ‘배화성’을 제거한 것 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경우 일중대립에서 전쟁에 이르는 과정에서 강화된 역사관, 대일인식이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편차는 있을 것이나 전쟁 후에도 기본적으로 계승되었다 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교과서문제는 전쟁으로 결론 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후 일본은 중화민국과 국교를 체결하고 이덕보원(以徳報怨)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전쟁책임을 인정하였으며 또한 1972년 일중국교정상화는 군민양분론과 일중우호론에 힘입 어 과거 문제가 정치적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교과서를 둘러싼 해묵은 그리고 새로운 문 제는 1980년대 국내정치와 얽힌 양상으로 재발된 것이다.

[부록] 본고는 졸고 ‘일중외교현안으로서의 교과서문제―1910~40년대’(並木頼寿・大

里浩秋・砂山幸雄편 ‘근대중국・교과서와 일본’ 연문출판, 2010년 소수)를 바탕으로 가필, 수정한 것이다.

日中历史认识问题的渊源 - 1910~40 年代的教科书问题

-川岛真

(東京大学 大学院総合文化研究科)

<目 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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