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検索結果がありません。

신라 崔致远의 당에서의 활동

ドキュメント内 untitled (ページ 126-133)

최치원(857 - ?)은 신라의 대표적인 학자·문장가이며, 그의 기록으로 『桂苑筆耕』 20 권이 전한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은 주로 최치원이 唐에서 관리로 있으면서 지은 글을 모은 것인데, 특히 879년, 당의 黃巢의 난 때에 諸道行營兵馬都統인 高騈의 從事官으로 있으면서 작성한 〈檄黃巢書〉는 황소가 이것을 읽고 엎어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놀랐다는 일화가 있다.

1) 최치원의 행적과『桂苑筆耕』

최치원은 신라 헌안왕1년(857)에 慶州 沙梁部에서 태어나, 경문왕8년(868) 12세에 당 나라에 건너가 國子監에 유학하였다. 874년 9월, 예부시랑 裵瓉이 主試한 賓貢科에 급제하 여 進士가 되었다.

최치원의 출생과 도당과정, 그리고 당에서의 생활, 귀국후의 행적은 기본적으로 『三國 史記』를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

최치원의 字는 孤雲[혹은 海雲이라고도 함]이며, 경주 沙粱部 사람이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총명하였고, 12세에 唐에 들어가서 공부하려 할 때, 아버지가 이르기를 "10년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힘써 하라" 하였다. 그는 배우길 게을리 하지 않

874년 考試에 단번에 급제하여 宣州 漂水縣尉에 임명되었다. 당시 黃巢의 난이 일어나

자, 諸道行營兵馬都統 高騈의 從事官이 되어 토벌에 참여하였다. 28세 때인 光啓 원년(憲康

11년, 885)에 使臣으로 詔書를 가지고 신라로 돌아와, 侍讀 겸 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

書監이 되었다.

최치원은 서쪽으로 유학하여 소득이 많았고, 돌아와서 자기의 뜻을 실현하려고 하였으 나 말세를 당하여 의심과 시기를 많이 받아 용납되지 못하고, 大山郡(지금 충남 부여군 홍 산면 일대)과 富城郡(지금의 충남 서산군) 태수로 있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唐이나 신라 모두 난세였으며, 걸핏하면 비난을 받으니,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하였다. 그래서 山林 과 江海를 소요·방랑하며 榭臺를 짓고 松竹을 심으면서, 書冊으로 베개를 삼고 풍월을 읊 었으니, 마지막에는 가족을 데리고 伽耶山 海印寺로 들어가 한가롭게 놀며 지내다가 노년 을 마쳤다. 고려 현종 때에, 최치원이 은밀히 고려 태조의 사업을 協贊하였다고 하여 內史 令을 贈職하였으며, 1023년에는 諡號를 추증하여 文昌侯라 하였다고 하였다. 1)

1)三國史記』권 제46, 열전 제6, 최치원

최치원은 당에서 귀국한 직후인 886년에 在唐時의 저작을 정리하여 헌강왕에게 올렸다.

桂苑筆耕集序에 의하면 『桂苑筆耕』을 포함하여 雜詩賦 및 表奏集 합 28권의 저작목록이 있는데, 즉 私試今體賦 5首 1권, 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雜詩賦 30수 1권, 『中山覆簣 集』1部 5권, 그리고 『桂苑筆耕集』 1부 20권이다. 이중 과거 급제후 東都 洛陽에서 유랑 하며 호구지책으로 지은 것이 앞의 3종이고, 宣州 溧水縣尉로 있을 때 公私間에 틈틈이 지 은 것이 『중산복궤집』이다.

『계원필경집』은 879년부터 4년간 고변의 휘하에서 從事官으로서 筆硯의 일을 전담하 면서 작성한 軍書 1만 수에서 뽑아 편찬한 것이다. 문집은 20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50수의 시와 320편의 문이 수록되어 있다. 권수에는 1834년에 쓴 洪奭周와 徐有榘의 校印 苑筆耕集序와 886년 저자가 『桂苑筆耕』을 포함하여 雜詩賦 및 表奏集 합 28권을 저작목 록과 함께 헌강왕에게 올릴 때 쓴 自序가 실려 있다. 권1~16은 淮南에서 高騈의 종사관으 로 있을 때 그를 대신하여 지은 軍文이며, 권17~20은 저자 자신의 입장에서 쓰여진 글이 다. 그리고 권 앞에는 각각 목록이 첨부되어 있다.

최치원이 17년동안 중국에서 생활하며 관리로 임용되기도 하고 자신의 저작을 책으로 출간한 것은 적어도 최치원은 중국인과 대등하게 생활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밖에 최치원의 저술로는 『新唐書』藝文志에 『四六集』 1권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 전하지 않고, 1478년에 서거정 등이 간행한 『東文選』에 최치원의 저술로 시 26수, 각종 169편 등 195편이 실려 있다. 그후, 崔國述ㆍ崔勉植 등이 樂府ㆍ野史ㆍ僧傳 등에서 저 자와 관련된 기록을 모아 1926년에 두 종의 『孤雲先生文集』을 간행하였는데, 여기에는 유명한 四山碑銘도 포함되어 있다.

2) 黃巢의 난에 대한 기록

고변의 종사관 시절이 황소의 난이 일어난 시기이므로, 이와 관련된 글이 많고, 그 중에 서도 대표적인 것이 바로 <토황소격문>이다. 아래에 관련 부분만을 발췌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광명 2년 7월 8일에, 諸道都統檢校太尉 我某는 黃巢에게 고한다. --- 이제 우리 군대는 征伐이 있으나 戰爭은 없는 것이요,

軍政은 은덕을 앞세우고 베어죽이는 것을 뒤에 하는 것이다.

하물며 너는 평민의 천한 것으로 태어났고,

밭고랑에서 농사짓다 일어나서

불지르고 겁탈하는 것을 좋은 꾀라 하며, 殺傷하는 것을 급한 임무로 생각하였다.

헤아릴 수 없는 큰 죄만 있고, 속죄될 조그마한 착함은 없었으니,

천하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아마도 땅 속의 귀신까지 이미 몰래 베어 죽이려고 의론하리라.

비록 잠깐 동안 숨이 붙어 있으나, 벌써 정신이 죽었고, 넋이 빠졌으리라.

무릇 사람의 일이란 것은 제가 저를 제일 잘 아는 것이다.

내가 헛말을 하는 것이 아니니, 너는 모름지기 살펴 들으라.

만일 미쳐 덤비는 도당에 이끌리어 취한 잠에서 깨지 못하고

여전히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어서듯 끝까지 어리석음을 고집한다면,

그제는 곰을 잡고 표범을 잡는 군사로 한 번 휘둘러 없애버릴 것이니, 까마귀처럼 모여 솔개같이 덤비던 군중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갈 것이다.

네 몸뚱이는 도끼에 잘려 고깃덩이 될 것이요, 뼈는 戎車 밑에 가루가 되며,

처자도 잡혀 죽으려니와

종족들도 베임을 당할 것이다. 2)

①의 광명 2년, 즉 881년은 황소가 거병하여 당 수도 장안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했던 시기이다. 이 격문은 당 황제는 피난하고 군대를 재정비하여 長安을 탈환하기 위해

2) 廣明二年七月八日諸道都統檢校太尉某告黃巢--- 今我以王師則有征無 戰軍政則先惠 後誅

況汝出自閭閻之末起於壟 畝之間以焚劫爲良謀以殺傷爲急務有大愆可 以擢髮無小 善可以贖身不唯天下之人皆思顯 戮兼恐地中之鬼已議陰誅縱饒假氣遊魂早合 亡神奪 魄凡爲人事莫若自知吾不妄言汝須審聽

或若狂走所牽酣眠未寤猶將拒轍固欲守株則乃批熊拉豹之師一麾撲滅烏合鴟 張 之衆四散分飛身爲齊斧之膏骨作戎車之粉妻兒被戮宗族見誅(이상은 桂苑筆耕 集11 東文選49권의 檄黃巢書)

준비하던 시점이다. 정벌만 있고 전쟁이 없다는 것은 대등한 성격의 전쟁이 아니고 국가에 서 난을 토벌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3)

②에서는 큰 허물은 움켜 쥔 머리칼처럼 셀 수 없이 많고, 속죄할 만한 착한 일은 작은 것조차 없기 때문에 ‘천하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아마도 땅 속 의 귀신까지’ 황소를 죽이기로 하였다는 부분에서 황소는 격문을 읽다가 침상에서 떨어졌 다고 한다.

이어서 지금까지의 과오를 묻지 않고 원한다면 제후로 봉해주고 영화를 보장해주겠다며 항복을 권유한 후, ③에서는 만약 그렇지 않다면 황소에 대한 잔혹한 응징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황소가 죽은 뒤 고변은 다시 그의 죽음을 하례하는 글을 올리는데, 이것도 모두 최치원 이 지은 것이었다. 4)

3) 당 주변국에 대한 인식 (1) 南蠻과 安南

『계원필경』권1의「賀通和南蠻表」, 권2의「謝示南蠻通和宜表」 및 권6의「賀入蠻使 回狀」에는 당과 남조와의 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南蠻이 일찍이 다른 계략을 가지고, 오랫동안 변방의 근심이 되다가, 몇 해 전부터 중국(夏)을 집적거리면서 유독 朝貢의 성의를 표시하지 않았다. 列鎭이 군사를 징발하여 갑자기 남방 정벌의 役을 일으킨 터에 그들이 틈을 노릴까 염려되어, 亂을 막기 어려운 형세였다 --- 머나먼 지방이 朝貢을 닦고 나그네들이 仁에 귀화하게 되어 마침 이 多事한 시기에 이미 태평의 징조를 보았으니, 저 남만은 실로 개[狗]의 후손인 족속인데도 오히려 이렇게 頑迷한 성질을 고쳤다. 5)

중국의 남쪽 변경을 어지럽히던 남만이 황소의 난이 한창인 881년경, 조공이 이루어져 화평단계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 남만은 완미한 성질의 야만스러운 족

3) 金血祚, 崔致遠의 檄黃巢書」에 대한 一考, 東亞人文學』제9, 2006 4)桂苑筆耕集1 東文選31, 表箋의 賀殺戮黃巢徒伴表 및 賀殺黃巢表

5)桂苑筆耕集1 東文選31권 表箋, 賀通和南蠻表 : 南蠻甞懷異謀久稔邊患 數年猾夏獨虧拱北之誠列鎭徵兵驟動 征南之役也則乘虛可慮怙亂難防--- 遂使要 服修貢賓旅歸仁適當多事之秋已見太平之兆則彼驃狺實狗封之族尙革昬迷

속인데, 이들을 개의 후손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6)

『계원필경』권16의「補安南錄異圖記」에는 안남 巡囑제도와 그 지역의 풍습 등을 현 존하는 사서보다 더 정확하고 소상하게 기재하고 있어 당말의 관련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 움이 되고 있다.

交趾의 사방 경계는 지도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그러나 관내에 䝤族이 많고, 지역이 여러 蕃族과 가깝다. 대략 지방의 얘기를 모아서 그곳 지리를 기록한다. 安南의 府는 돌아가면서 12郡이 소속되었는데 峯驩演愛陸長郡 諒武定武 安蘇茂唐林 58개의 주를 총괄한다. 府城 동쪽에 남쪽 바다까지 400여 리인데 산이 천리나 되게 가로질러 멀리 뻗어 있다. 깊숙한 굴과 으슥한 바위는 요족의 굴이다. 蠻蜒의 무리는 6종이 널려져 있으며 번족 21개 지역과 이웃이 되었고, 요족 무리는 21개 부족을 관할한다. --- 21개 국에는 닭과 개의 소리가 서로 들리며 의복과 음식의 습관도 서로 비슷하다. 관할 지역 안의 요족은 흔히 山蹄라고 부르는데, 어떤 이는 머리를 풀어 흐뜨리고 몸에는 문신을 새긴다.

또 어떤 이는 가슴을 뚫기도 하고 이[齒]를 파내기도 한다. 괴상한 소리로 중얼거리고 간교한 태도로 흘겨보기도 한다. 그 중에 더욱 이상한 것은 누워서 머리로 마실 것을 날려서 코로 받아먹는다. 7)

오늘날 베트남 북부지방인 交趾의 관내에 많이 사는 䝤族은 깊숙한 굴과 으슥한 바위에 사는데, 이들은 머리를 풀어 흐뜨리고 몸에는 문신을 새기며, 어떤 이는 가슴을 뚫기도 하 고 이[齒]를 파내기도 한다고 하였다. 괴상한 소리로 중얼거리고 간교한 태도로 흘겨보기 도 하는데, 더욱 이상한 것은 누워서 머리로 마실 것을 날려서 코로 받아먹는다며, 이들의 특이한 습속을 전하고 있다.

4) 渤海

최치원의 글 중에는 당시 신라 북쪽에 있던 발해에 대한 내용도 있다. 발해는 고구려

6) 이밖에 桂苑筆耕集2 東文選33권 表箋에도 謝示南蠻通和事宜表가 실려있다. 7)桂苑筆耕集16 東文選64, 記, 補安南錄異圖記 : 交趾四封圖經詳矣

而管多生䝤。境邇諸蕃略採俚譚用標方誌安南之爲府也。廵屬一十二郡峯驩演愛陸長 郡諒武定武安蘇茂唐林 羇縻五十八州府城東至南溟四百餘里有山橫亘千里而遙邃 穴深巖窟宅蠻蜑之衆六種星居隣諸蕃二十一區管生二十一輩--- 二十一 國雞犬 傳聲服食所宜大較相類管內生䝤。多號山蹄或 被髮鏤身或穿胷鑿齒詭音 嘲哳姦態睢盱其中 尤爲異者卧使頭飛飮於鼻受

ドキュメント内 untitled (ページ 126-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