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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전쟁의 핵심 책임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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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 민중이 전쟁에 책임져야 하는가?

3. 누가 전쟁 배상 책임을 져야 하는가?

전범 행위에 대한 핵심 책임자와 전쟁에 대한 일반 책임자를 구분할 때 우리는 누가 전 쟁 배상 책임의 주체인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범 행위에 대한 핵심 책임자는 위 로는 일본 천황부터 아래로는 일본 전쟁 범죄로 밝혀진 각급 군국주의자까지이며, 전민족 의 생존 공간 모색에 취지를 둔 민족적 전쟁으로서 모든 일본 민족이 곧 전쟁의 일반 책임 자이다. 쉽게 말해, 일본의 전쟁 책임은 모든 일본 민족이 이행해야 마땅하다. 침략전쟁에 국민 전체가 책임이 있으므로, 전후 배상 문제는 국가 차원의 배상이든 민간 차원의 배상 이든 모두 일본 국민이 주체로서 책임져야 할 것이다.

1. 누가 전쟁의 핵심 책임자인가?

전쟁 책임과 전쟁 배상 책임은 서로 다르지만 관련된 문제이다. 이는 전쟁에 대한 책임 이 전쟁 배상에 대한 책임을 발생시키기 때문으로, 전자가 원인이라면 후자는 결과이다. 따 라서 두 가지 책임 주체를 어떻게 볼 것이가는 진지하게 논의할 만한 주제이다.

전후 60년 동안 이루어진 학술 연구 결과를 보면 일본의 전쟁 책임 문제에 대해 학계 에서 각자 편향을 보이고 있는데, 일부 특히 일본의 일부 좌익 학자는 일본 천황의 주요 책임을 강조하고,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극동군사법정에서 정의내린 A급 전범 및 기타 피 해국의 재판 대상이 된 전범의 책임을 강조한다. 물론, 전 일본 민족이 전쟁 책임을 져야한 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각자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이들 관점은 문제의 한 측면을 강 조하면서 무의식 중에 다른 측면을 회피하고 있어, 일본의 전쟁 책임 문제를 나누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누가 전쟁의 주요 책임자인가, 둘째 누가 전쟁의 일반 책임자인가, 이렇게 질문을 두 개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일본 침략 전쟁에 대한 주요 책임자의 인정 문제에 대해, 과거 우리는 소위 일본 군국주의자(가끔은 일본 군벌)이라고 대략적으로 불렀다. 이는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표현으로 여러 당사자에게 쉽게 받아들여졌지만, 법률적 층위에서 파고 들어간다면 일본 침략 전쟁의 주요 책임자는 다음의 두 가지 층위를 포괄해야 한다. 즉, 전쟁을 계획하고 일 으킨 자와 전쟁의 와중에 공인된 전쟁 법칙을 위반해 전범 행위를 한 일본인이다. 간단히 말해, 2차대전 이후 동맹국의 재판을 받은 전범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비록 재판을 회피했 어도 이 두 조건에 부합한다면 사실상 전범인 것이다.

전쟁의 주요 책임자는 물론 먼저 전범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전범 행위에 대한 추궁은 1차 대전을 경계로, 전후 2단계로 나눌 수 있다. 1차대전 이 전에는 당시의 국제법에 따라 국가는 전쟁을 치를 권리가 있었으므로 국가 지도자가 전쟁 을 일으켰다고 전범이 되지는 않았으며, 당시의 전범 행위는 주로 전쟁의 일반 규칙을 위 반한 행위 즉 부상이나 병으로 작전 능력을 잃거나 무기를 버린 병사를 죽이거나 약탈하는 행위였다. 따라서 침략 전쟁을 일으킨 국가 통치자와 군대 책임자는 추궁 대상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1차대전 이전까지 전쟁의 책임은 사실상 국가가 이행했다.

1차대전이 끝나고 전범 행위 처벌 관련 국제법에 일련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1차대

전 당시 독일의 야만적 폭력이 피해국 국민의 공분을 샀기 때문으로, 피해국 국민들이 독 일 빌헬름 황제와 기타 수뇌에 대한 재판과 처벌을 요구하였으므로, 이를 위해 전쟁 규칙 을 어긴 범죄 행위를 조사하는 특별 위원회까지 설치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베르사이유 조 약은 빌헬름2세를 주요 전범의 하나로 국제재판소에 넘겨 재판하기로 결정했으며, 이 밖에 도 독일과 기타 동맹국의 군인 가운데 전쟁 법규와 관례를 심각하게 어긴 자들을 각국의 단독 또는 여러 나라로 구성된 혼합 군사법정에 넘겨 형사 재제를 가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법리적으로 어느 정도 진보성을 구현한 규정이 실천 과정에서는 제대로 집 행되지 못하여, 빌헬름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고 네덜란드 정부는 그의 법정 인도를 거부 하였으며 독일 역시 기타 전범 인도를 거부하였다. 결과적으로 조약국이 라이프찌히에서 진행한 전범 재판에서는 본래 결정되었던 890명의 전범 가운데 겨우 43명의 부차적인 전 범만이 재판받았다. 재판 결과 역시 미루어 짐작하듯이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전범은 무죄 를 선고받고,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 역시 6개월에서 2년의 가벼운 처벌에 그쳤다. 특히 외국으로 망명한 주요 전범은 법망을 무사히 피할 수 있었다.1)

1) 王鐵崖, 國際法, 法律出版社, 1981, 563p.

2차대전 이후에야 국제사회는 국제재판소라는 형식을 만들어 전범의 개인 책임을 제대 로 묻기 시작하였다.2)

2차대전 와중의 전쟁범죄에 대한 정의는 주로 2차대전이 끝난 후 국제사회가 합의한 일 련의 관련 규정으로 명료화되었다. 여기에는 1945년 8월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4개 국이 체결한 ‘유럽 주축국 주요 전범 소추 및 처벌에 관한 협정’,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소 헌장’ 및 1946년의 ‘극동 국제군사재판소 헌장’ 등이 있다. 이들 규정은 각종 전쟁 범죄 의 유형을 국제법의 기본 원칙 위반, 침략 전쟁 계획 및 발동, 평화 파괴, 전쟁 법규와 관 례 위반, 인도주의 준칙 위반 등으로 명료화하였다. 각 유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평화 위반 및 파괴죄. 침략 전쟁 또는 국제 조약이나 협약 또는 보장을 위반하 는 전쟁 계획, 준비, 발동, 참여 및 이상과 같은 범죄에 참여하는 공동 계획과 음모 등을 포함한다. 둘째, 전쟁 범죄. 전쟁 법규나 관례 위반을 말한다. 여기에는 점령지 민간인 살 해, 노역이나 기타 목적을 위한 학대나 추방, 전쟁 포로나 해상인 살해나 학대, 인질 살해, 공적 사적 재산 약탈, 도시나 농촌 방화 또는 군사적 필요가 없는 파괴 등이 포함되며, 이 밖에도 기타 유형의 범죄 상황이 포함된다. 셋째, 반인도적 범죄. 즉 전쟁 이전이나 진행 과정의 민간인에 대한 살해, 몰살, 노역, 추방 및 기타 모든 비인도적 행위로서, 정치적이거 나 민족적 또는 중교적 이유 등으로 저지른 범죄 행위를 말한다. 넷째, 종족 말살죄와 인류 위해죄. 종족 말살죄는 어떤 민족, 종족, 인종 또는 종교 단체를 전부 또는 일부 의도를 가 지고 말살하는 행위로, 종족 말살을 음모하거나 선동하거나 기도 또는 공모한 이들을 이 범죄로 간주한다. 인류 위해죄란 전쟁 상황에서 일어난 살인, 노역, 추방, 감금, 강간 및 기 타 정치, 종교, 민족 등 요인에 기인한 핍박 또는 기타 비인도적 행위이다.3)

상술한 법규에 따라 어떻게 전쟁범죄를 처벌할 것이가는 인류의 정의와 이성을 시험하 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이 수많은 나라와 지역에 걸쳐 있었기에, 전후 일본 전범에 대한 추궁은 국제재판소를 통한 사법 재판 외에 일본 침략 전쟁 피해국 의 단독 재판이 따로 진행되었다. 중국의 경우, 전후 초기 극동국제군사재판소 재판을 거쳐 국내 국민정부의 일본 전범 재판 및 중화인민공화국 출범 이후 체포된 일본 전범에 대한 재판 등 여러 단계를 거쳤으며, 이를 통해 중국 침략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주요 전범들 가운데 일부는 응분의 처벌을 받았다.

2) 盛紅生, 楊澤偉, 秦小軒, 『무력의 경계—21세기 전반 무장 충돌 속의 국제법 문제 연구』, 時 事出版社, 2003년, 186p.

3) 국제법 관련 규정에 대해, 이 장에서는 주로 高智華 외『國際法學, 工商出版社, 2002, 476 478페이지의 관련 내용 참고. ‘극동국제군사재판소 헌장의 각종 전범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규 정은 王鐵崖 외『戰爭法文獻集, 解放軍出版社, 1986, 198p 참고.

일본 침략 전쟁의 주요 책임자 처벌에 대해 전시의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서 이미 원칙적 규정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동맹군 총사령부가 일본의 전쟁 혐의자를 체 포하는 한편, 11개국으로 구성된 극동위원회와 동맹국 일본 통제 위원회가 일본 전범에 대 한 통제와 처벌 임무를 집행하기 시작했으며, 일본 주둔 동맹군 최고사령부가 집행 당국이 되었다. 1946년 1월 극동국제재판소가 정식 출범하였다. 1946년 3월 극동국제재판소는 백 여 명의 전범을 조사하여, 최종적으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우메즈 미지로(梅津美治郞),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등 28명의 피고(이 가운데 2명은 재판 과정에서 사망하고, 1명은 정신병 발작으로 제외)가 A 급 전범으로 극동군사재판소의 판결을 받았다. 이번 판결은 일본 군국주의를 근절하기 위 한 과정으로, 국제법이나 협정을 위반하여 정신 선전포고를 거치거나 거치지 않은 침략 전 쟁을 계획하거나 참여하여 침략 전쟁에 책임이 있는 주요 전범에 대해 진행되었다. 이 재 판은 중국을 포함한 11개 국의 법관으로 재판소를 구성하고, 모든 재판 업무는 1946년 5월 부터 1948년 11월 전후까지 약 2년 6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적 재판이었으며, 수많은 증거를 통해 일본이 일으킨 침략 전쟁의 죄상과 이 전쟁의 주요 결 정권자와 집행자의 수많은 범죄 사실을 증명하였다. 재판의 결과는 25명의 A급 전범 가운 데 도조 히데키, 히로타 고키(廣田弘毅), 마쓰이 이와네, 도이하라 겐지, 이타가키 세이시 로, 기무라 효타로(木村兵太郞), 부도 아키라(武藤章) 등 7명이 교수형 판결을 받고, 아라 키 사다오(荒木貞夫) 등 16명이 무기징역,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는 20년 유기징역, 시 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7년 유기징역 판결을 받았다. 1948년 12월 23일 교수형 판결을

받은 7명의 전범이 도쿄 스가모(巢鴨) 감옥에서 처벌되었다.

당시 동맹국은 A급 전범으로 분류되지 않았지만 전범 행위를 저지른 기타 전범에 대해 서는 관련 국가에서 재판하기로 정하였다. 중국 국민정부는 1945년 12월 ‘전범 처리 위원 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일본 전쟁 범죄 증거 조사를 진행하여 선양(沈陽), 베이징(北 京), 타이위안(太原), 지난(濟南), 쉬저우(徐州), 난징(南京), 상하이(上海), 한커우(漢口), 광저우(廣州), 타이베이(台北) 등 10개 도시에 군사재판소를 설립하였다. 국민정부는 ‘전쟁 범죄 처리 방법’, ‘전쟁 범죄 재판 방법’ 및 ‘전쟁 범죄 재판 방법 실시 세칙’ 등 법령에 의 거 1946년을 전후해 공인된 전쟁 법규를 위반한 전범 혐의자들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였다.

1946년 10월 ‘전범 처리 위원회’는 모두 171,152건의 전범 사건을 접수하고 혐의자 2,435 명을 구금하였다. 1949년 초까지 중국에 설치된 각종 군사재판소는 일본 전범에 대해 145 명 사형, 300명 유기 또는 무기 징역 판결을 내렸다.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이후 1950년 소련에서 인도받은 일본 전쟁포로 및 해방전쟁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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