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學과 醫學
(Law and Medicine)
일자 시간 프로그램
9月26日 (木)
09:30~09:55 등록 (무궁화홀, 컨벤션센터 2층)
09:55~10:00 개회선언: 김병수 (Byung Soo KIM, 한‧일학술포럼 준비위원장) 오전 세션 : 법학 좌장: 김종원 (Jhong Won KIM,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伊藤 誠 (Makoto ITOH, 일본학사원 회원)
10:00~10:40 주제 : 한․일 법문화의 비교에 관하여-가족관계를 중심으로
발표 : 고상룡 (Sang Ryong KOH,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10:40~11:00 지정토론 : 박병호 (Byoung Ho PARK,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竹下守夫 (Morio TAKESHITA, 일본학사원 회원)
11:00~11:10 휴식
11:10~11:50 주제 : “자녀복지” 관점에서 본 일본 가족법의 여러 문제
발표 : 奥田昌道 (Masamichi OKUDA, 일본학사원 회원)
11:50~12:10 지정토론 : 한봉희 (Bonghee HAHN, 전북대 명예교수) 竹下守夫 (Morio TAKESHITA, 일본학사원 회원) 12:10~12:20 자유토론
12:20~14:00 오찬 : 크리스탈홀, 본관 B1
오후 세션 : 의학 좌장: 김병수 (Byung Soo KIM,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鈴木邦彦 (Kunihiko SUZUKI, 일본학사원 회원)
14:00~14:40 주제 : 한국 성인에서의 간세포암
발표 : 김정룡 (Chung Yong KIM,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14:40~15:00 지정토론 : 한광협 (Kwang Hyub HAN, 연세대 교수)
関谷剛男 (Takao SEKIYA, 일본학사원 회원) 15:00~15:10 휴식 15:10~15:50 주제 : 암에 대하여발표 : 杉村 隆 (Takashi SUGIMURA, 일본학사원 회원) 15:50~16:10 지정토론 : 김용일 (Yong Il KIM,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関谷剛男 (Takao SEKIYA, 일본학사원 회원) 16:10~16:20 자유토론 16:20~16:30 휴식 16:30~17:20 종합토론 : 법학 및 의학 분야 17:20 폐회 18:00~20:00 만찬 : 마로니에홀, 본관 2층 9月27日 (金) 07:50~09:00 제9회 한․일 학술포럼 준비협의회
日字 時間 Program
9月26日 (木)
09:30~09:55 登錄 (Mugunghwa Hall, Convention Center 2F)
09:55~10:00 開會宣言: 金炳洙(Byung Soo KIM, 韓․日 學術 Forum 準備委員長) Morning Session
法學
座長: 金鍾源 (Jhong Won KIM, 大韓民國學術院 會員) 伊藤 誠 (Makoto ITOH, 日本學士院 會員)
10:00~10:40 主題 : 韓‧日兩國の法文化比較ー家族關係を中心としてー
發表 : 高翔龍 (Sang Ryong KOH, 大韓民國學術院 會員)
10:40~11:00 指定討論 : 朴秉濠 (Byoung Ho PARK, 大韓民國學術院 會員)
竹下守夫 (Morio TAKESHITA, 日本學士院 會員)
11:00~11:10 休息
11:10~11:50 主題 : 「子の福祉」 から観た日本家族法の諸問題
發表 : 奥田昌道 (Masamichi OKUDA, 日本學士院 會員)
11:50~12:10 指定討論 : 韓琫熙 (Bonghee HAHN, 全北大學校 名譽敎授) 竹下守夫 (Morio TAKESHITA, 日本學士院 會員) 12:10~12:20 自由討論
12:20~14:00 午餐 : Crystal Hall, Main Building B1 Afternoon Session
醫學
座長: 金炳洙(Byung Soo KIM, 大韓民國學術院 會員) 鈴木邦彦 (Kunihiko SUZUKI, 日本學士院 會員)
14:00~14:40 主題 : 韓國成人の肝細胞癌
發表 : 金丁龍 (Chung Yong KIM, 大韓民國學術院 會員)
14:40~15:00 指定討論 : 韓光協 (Kwang Hyub HAN, 延世大學校 敎授) 関谷剛男 (Takao SEKIYA, 日本學士院 會員) 15:00~15:10 休息 15:10~15:50 主題 : 癌について 發表 : 杉村 隆 (Takashi SUGIMURA, 日本學士院 會員) 15:50~16:10 指定討論 : 金勇一 (Yong Il KIM, 大韓民國學術院 會員) 関谷剛男 (Takao SEKIYA, 日本學士院 會員) 16:10~16:20 自由討論 16:20~16:30 休息 16:30~17:20 綜合討論 : 法學 ‧ 醫學 分野 17:20 閉會
18:00~20:00 晩餐 : Marronnier Hall, Main Building 2F 9月27日
Hoam Faculty House
(포럼장소 2층 무궁화홀)
▪Forum Venue
02
Convention Center 2F, Mugunghwa Hall
▪Welcome Banquet
01
Main Building 2F, Marronnier Hall
▪Forum Luncheon
01
Main Building B1, Crystall Hall
▪Forum Banquet
01
Main Building 2F, Marronnier Hall
▪Breakfast
01
Main Building 1F, Shangri-La
Morning Session
1. 한·일 법문화의 비교에 관하여―가족관계를 중심으로― / 고상룡 ··· 3
韓‧日両国の法文化比較ー家族関係を中心としてー / 高翔龍 (Sang Ryong KOH)
·· 55
2.
「子の福祉」から観た日本家族法の諸問題 / 奥田 昌道 (Masamichi OKUDA)··· 101
“자녀 복지” 관점에서 본 일본 가족법의 여러 문제 / 오쿠다 마사미치 ··· 117
Afternoon Session
1. 한국 성인에서의 간세포암 / 김정룡 ··· 139
韓国成人の肝細胞癌 / 金丁龍 (Chung Yong KIM)
··· 159
2.
癌について / 杉村 隆 (Takashi SUGIMURA),關谷剛男 (Takao SEKIYA)
··· 179
3
-한․일 양국의 법문화 비교
-가족관계를
중심으로-高
翔
龍
大韓民國學術院 會員Ⅰ
. 머리말
지난 수 십년 동안 韓 日양국 간에는 다양한 문화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져 왔으 나, 서로 간에 가깝고도 먼 나라 라고 하는 데는 별로 변함이 없는 듯하다. 그 이유는 한 일 양국 간의 歷史的 認識의 差 그리고 양국 간의 類似性과 異質性의 混同이라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는 속담 이 있다. 이러한 속담은 10년이 지나면 대자연이 변화하고 인간 만사도 변한다는 의미이지만, 한 일관계를 보면 광복후 68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가깝고도 먼 나라 인 데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법은 단순한 기술적인 것이 아니고, 그 사회가 낳은 고유문화의 하나이다. 비교 법적 측면에서 살펴 보면, 양국 사이에 처음부터 전혀 다른 법제도가 존재함을 발 견할 수 있으며, 그 반대로 완전히 동일한 법제도를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 나 外見上으로는 같은 법제도일지라도, 그 趣旨가 相異한 경우가 있다는 점에 주 의를 기울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한국법이나 일본법 그 밖의 외국법을 연구 할 때는 그 나라의 역사나 문화, 사람들의 법의식과 같은 법문화 전반에 걸쳐 이해하 고, 서로의 차이를 정확히 인식하는 작업부터 시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예컨 대 법률생활에 있어서 가족 법문화의 한 예로 姓 (氏)을 들어 보겠다. 오늘날 한·일 양국의 모든 사람은 姓 을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의 경우는 혼인을 하여도 부부의 성은 변경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夫婦는 婚姻 할 때에 정한 바에 따라, 夫 또는 妻의 姓을 칭한다 (일본민법 750조)고 하여, 부 부가운데 일방의 婚姻前의 姓은 변경된다. 그렇다면 양국의 姓 文化는 왜 다른 것일까. 또 한가지 예를 더 들어보면, 親生(嫡出)否認의 訴의 出訴期間에 대하여, 양국의 가족법은 완전히 같은 내용으로 규정(일본민법 777조, 한국민법개정전 847 조)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 동 규정은 違憲이라는 2005년의 헌법재판소 의 판결에 따라 개정되었다. 이에 대하여, 일본의 경우에 동 규정을 둘러싼 논쟁 은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양국의 법률제도에서 내용이 똑같은 규정을 발견할 수 있지만, 親生否認 문화는 왜 다른 것일까. 이러한 여러 가지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본 보고에서는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한 일 양국에 있어서 그 사회의 가장 기 본적 구성인 家族 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관습이나 법률관계에 대하여 살펴보려 고 한다.
Ⅱ
. 家族關係와 法
한국의 가족제도는 儒敎理念에 의하여 가족관념이 의식화, 생활관습화되어, 이 른바 宗法的 家父長家族制가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도 그러한 의식 이 남아있다. 부모세대와 자식 세대, 형제자매들이 핵가족이 되어 분가하여도 직 계가족의 血緣意識은 강하게 남아있다. 이러한 강한 혈연의식은 각종의 緣故意識 의 온상이 되어 가정에 그치지 않고 사회전반에 만연되어 있다. 근래에 한국인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緣 을 기준으로 하여, 혈연, 지연, 학연, 종교연 등으로 결합된 관계를 항상 의식하고 있다. 다시 말해, ①가족을 중심으로 한 혈연관계가 있는 넓은 범위의 친족 종친회, 종중·문중 등의 혈연 단체, ②지역(도·시·읍·면)을 중심으로 한 각종 동향회, ③학교(유치원, 초·중·고교, 대학 등)를 중심으로 하는 학연 관계의 각종 동창회, 또한 지금도 ④신앙을 중심으로 한 종교연관계의 기독 교, 불교 또는 유교와 같은 종교단체 등, 네 가지 유형의 연 을 중심으로 결합된 관계로 구성된 사회다, 라고 할 정도로 緣意識 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와같은 ‘우리의식’, ‘혈연의식’ 또는 ‘연고의식’은 현재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 다양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우리 主義 는 家族利己主義 또는 集團利己主義 로 변모해 가는 부작용도 낳고 있다. 가족은 사회생활에서 담당하는 역할도 중요하며, 또한 가족이 가족생활이나 사 회생활을 하는데 이를 규율하는 법과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리하여 가족생활을 규율하는 법, 즉 가족법의 존재는 가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혼인·이혼·입양·파양·인지 등의 신분행위나, 한정승인·상속포기 등의 상속은 법률이 정한 바에 의한 신고 없이는 법률상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 것은 가족생활을 규율하는 법률과 불가분한 관계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本 報告에서는 한국사회에 있어서 가족은 어떻게 구성되고 성립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가, 법률은 가족생활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등, 상기 ①유형을 중 심으로 살펴 보겠다. 또한 동시에 일본의 경우와 비교하여 그 차이점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一
. 血緣關係로 成立된 家族法文化
1. 개관
(1) 慣習法上의 父系血統家族制度 개관 조선시대(1392~1910년)에 있어서 가족관계는 주로 유교윤리를 바탕으로 한 관 습법에 의해 규율되었다. 이 시기에도 경제육전(1397년), 경국대전(1471년), 대전 속록(1493년), 속대전(1746년), 대전통편(1786년), 대전회통(1865년), 형법대전(1905년) 과 같은 성문법전이 있었으나,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일부의 규정만이 마련되어 있 었다. 그것은 단편적·제한적인 것으로, 현행 민법전과 같은 통일적·체계적인 법전 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의 가족관습법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宗法制(유교이념을 바탕으로 한 중국·周代의 귀족사회의 혈연집단의 조직규정으로, 왕위계승과 가부장적 사회체제 확 립을 목적으로 한 제도이다. 한국에는 이 같은 종법제를 근간으로 한 가족생활이 영 위되어 왔다)에 의한 가족제도를 그 바탕으로 하고 있어, 그 결과 남계혈통 중심의祭祀本位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부계혈통주의를 의미하며, 한국 고유 의 특수한 제도인 姓不變原則, 異姓養子禁止, 夫婦別姓制, 同姓同本不婚制와 같은 제도는(상세한 것은 후술), 이러한 부계혈통주의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절대불변제도라 여겨져 온 이들 제도도, 시대의 변화와 여러 원인에 의한 사회 변화에 따라 수정되지 않을 수 없는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從來의 日本家族制度 개관 일본의 舊 家族制度 는, 家(이에) 및 家父長制 의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있는 가족질서라 한다1). 그러면 家 란 무엇인가, 또는 가부장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가 있으나, 이하에서는 家 制度에 대하여 간략해서 살펴본다. 1). 家 에 관하여 종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家 를 普遍的인 家族形態 중의 하나로 볼 것인가, 또는 日本의 特有한 家族制度로 볼 것인가의 定義를 둘러싼 많 은 논쟁이2) 전개되어 왔으나, 아직도 家 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明治民法의 起草者는 江戸時代에 사실상 존재한 家 라는 現狀을 明治時代에는 법률적으로 만든 개념으로 보고, 결국 호적에 하나의 家 로써 기재되어 있는지 여부에 따라서 家 현상을 법적으로 다루려 했다3). 다시 말해 명치민법 기초자인 우메 켄지로(梅謙次郎)는 일본에는 지금도 호주제도가 있으며 호주는 가족에 대하여 일정한 권리 의무를 가지며 그 사이에 스스로 단체 를 이룬다 ··· 어떠한 자가 호주 또는 가족이 되는가, 즉 戶主와 家族으로 조직되 는 家 의 구성원을 정하며··· , 따라서 家族은 단순히 호주의 친족이나 그 배우 자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들은 반드시 호주의 家 에 거주하는 것을 요한 다. 이러한 家 는 유형의 家屋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법률상의 家籍을 말하며, 실제로는 동일 호적에 登載되어 있는 자는 동일한 家 에 거주하는 者라고 하여 야 할 것이다4)고 하여, 명치민법 732조 ( 호주의 친족으로써 그 家에 있는 자 및 그 배우자는 이를 가족으로 한다 )를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명치민법은 호주의 친족인 6촌 이내의 혈족, 3촌 이내의 인척(725조)은 호주의 家에 거주하여야 그 가족이 되며, 처는 혼인에 의해 夫의 家에 입적한다(入る) (788조). 또한 子는 1) 川島武宜․イデオロギーとしての家族制度(岩波書店, 1968年) p.32 2) 藤井勝․ 近世農民の家と家父長制 永原慶二外2人編․家と家父長制(早稻田大學出版部, 2003年) p. 51 이하 3) 川島武宜․전게서 p.32 이하 4) 梅謙次郎 ‧ 民法要義(親族編)<復刻板>(有斐閣, 1985年) p.13 이하
父의 家에 입적한다 (733조)고 규정하여, 家 의 構成員을 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家 는 아래와 같은 특색이 있다5). ① 家 라는 것은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실제로 가족적인 공동생활 을 하고 있는 집단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家는 후지와라家(케)(藤原家) 라든가 도쿠가와家(케)(徳川家) 라고 하는 경우의 家 의 글자가 표시하듯, 일정한 血緣 者에 의하여 선조로부터 이어받아 장래에 걸쳐 유지되는 단체이다. 다시 말해, 家 는 혈연단체로, 구성원이 사망·출생·혼인 등에 의하여 변동되어도 그 同一性 을 유지하며 존속해 간다는 신념이 수반되는 단체이다. 家에의 소속은 원칙적으로 父(男)系血統에 의해 정해지나, 擬制的 血統에 의해서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양 자제도가 인정되며, 가족구성원의 처가 남편 家의 구성원으로 간주되고 있다6). 특 히 혈연단체가 일정규모 이상의 군사적·농업적 경영체를 목표로 하는 경우에 비 혈연자를 그 말단에 포용할 수밖에 없다(예, 종이나 하인). 그것은 어떠한 시대의 집단에서도 개연적인 현상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대규모의 家는 超血緣性 을 충 분히 갖추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고 한다7). ② 家의 同一性 은, 家 의 名으로써의 姓(氏) 및 祖上祭祀의 同一性에 의해 상징된다. 이러한 성질이 있는 家는 옛 武士·地主층에서 특히 명확하다. 일반 서민 층, 특히 농민에게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가장 확실히 나타나는 것은 농촌에서 家名(이에나=屋號)이라 불리는 것이다. 明治時代가 될 때까지는 일반적으로 농민 이 姓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었다(상세한 것은 후술). 각 개인이 어느 家 에 속 하는 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家名이라는 것이 있었다. 家名은, 新屋(니이야)라든 가 혹은 鍛治屋(카지야)라든가 油屋(아부라야) 라든가,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 었다. 明治(이하, 메이지 라 칭하는 경우가 있음) 이후에는 모든 사람이 姓을 갖게 되어 오늘날에는 姓이 없는 者가 없으나, 많은 농촌에서는 지금도 호적부에 기재 된 姓을 사용하지 않고 옛부터 내려오는 家名을 사용하는 곳이 있다고 한다. 또한 家長은 대대로 같은 이름을 사용했으며, 가장이 사망하거나 하면 그 뒤를 이은 자 가 襲名 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시 말해, 이러한 경우에는 개인의 이름도 실제로는 개인의 이름이 아닌 家의 名 인 것이다. 따라서 姓 은 대부분의 경우에 결코 개인을 나타내는 단순한 符牒(符號)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고, 어떤 家 에 속하는 者이다 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던 5) 이하는, 주로 川島武宜/来栖三朗外2人 ․ 家族法相續法講義(日本評論社, 1970年)p.4 이하 참조 6) 川島武宜 前揭イデオロギーとしての家族制度 p.33 7) 石井紫郎 日本人の法生活(東京大學出版會, 2012年) p.79
것이다8). 다시 말해서 姓 은 家의 呼稱이다. 2). 家 에는 엄격한 家父長制的 身分組織이 있다. 家長은 가족구성원에 대하여 支配 命令하며, 가족구성원은 家長에게 服從하는 관계이다. 戶主는 가장 서열이 높은 위치에 있으며, 다음 대의 호주로 예상되는 長男이 그 다음 위치에 있다. 부 모는 자식에 대한 지배자이며, 남편은 처에 대한 지배자이다. 여자는 일반적으로 신분이 낮다. 家에 존재하는 이러한 상하의 신분 , 그 사이에 있는 지배·복종관계 에는 귀족·지주·백성·부자·도시의 노동자 등에 따라 다양한 차이가 있으며, 옛 무 사·지주층에서는 그 정도가 심하고, 일반 서민층에서는 원칙적으로 약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家 내의 신분 조직의 원리에 따른 가족 내의 신분 의 차별과 서열이 분명히 드러났었다. 이처럼 上下의 신분 과 그러한 신분에 기한 지배·복종이라는 것은 家 를 하나로 된 공동체로써 유지하기 위하여 빼놓을 수 없는 공통의 요소 였다. 3). 家 에는 家가 소유하는 財産이 있다. 家 의 財産은 家長 個人의 財産과 구별하여 생각하여 왔다. 家長(戶主)은 家 에 속한 사람들의 우두머리로써 가장 높은 지위에 있으며, 그들을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家 의 재산의 주체이 기도 하였다. 그러나 家 의 재산은 家長 개인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는 없으며, 家 에 소속된 것이므로 家長을 家 의 財産管理者라고 부르는 편이 알맞은 면도 있 다. 따라서 家督相續은, 家長 個人으로부터 다음의 家長 개인에게 재산이 이관되 는 것은 아니다. 財産의 主體는 家長의 死亡이나 隱居 등에 의하여 조금도 변하는 것 없이 존재하고 있는 家 이며, 家督相續의 경우에는 단지 家 의 재산관리자가 바뀌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독상속에서는 언제나 長男이 단독으로 상속했던 것은 家 의 財産에 대하여 상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家 의 財産은 家 의 것이며 가장 개인의 재산은 아니라는 것은, 그러한 재산은 家 에 속하는 가족들이 생활의 마지막 의지할 터전이 된다는 것 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家長이 혼자서 家의 재산을 관리했기 때문에, 家 의 다른 가족은 家長에게 매달리지 않으면 家 의 재산에 의존할 수가 없었다. 이 렇게 하여 家長은 종종 家 의 다른 가족들의 生死를 지배하였다. 따라서 가장이 단독 상속에 의해 家 의 재산을 혼자서 점유하는 것이 家 의 다른 가족에 대한 가장의 지배권력(신분조직)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9). 8) 川島武宜/来栖三朗外2人 ․ 전게서 p.5
요약하면, 종래의 일본 家族制度 는 사람이 家 를 중심으로 집단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지배·복종의 신분조직 으로 구성하여, 거기에 생활의 최후의 안식처 를 마련하는 제도이다. 따라서 이러한 가족제도 에서 개인은 신분적으로도 경제 적으로도 독립된 지위를 갖지 못하고, 家 또는 戶主에게 지배받으면서 이에 의 존하였다. 이와 같은 관계에서 개인은, 家 의 전통과, 호주나 부모, 남편 혹은 나 이 많은 자의 의사결정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家 는 각 개인의 생 활에 대하여 책임을 져 주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에서 가족은 일종의 안심감을 가 질 수 있는 제도였다. 그 대신에 거기에서는 각자가 자신의 행동이나 자신의 생활 에 대해 독립적으로 자신의 의사로 결정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게다가 지배 자인 호주나 부모 자신조차 완전히 자유롭게 독립적으로 자신의 생활이나 행동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 또한 보다 상급의 本家나 윗분(親 分=오야붕) 등에 의해 지배되고, 그 대신에 역시 그들에 의해 보호나 보장을 받 기 때문이다10).
2. 姓 (氏)에 대하여
(1)한국에 있어서의 父系의 姓 本 의 繼承과 家族 한국의 전통적 가족제도는, 姓 과 本 이 同一한 父系血統을 중심으로 성립되 어 있다. 姓 이란 원칙적으로 父系血統을 表示하는 것으로, 각 개인의 성에 따라 그 소속되어 있는 혈통을 분별할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혈통을 가진 많은 사람 이 각지에 분산된 결과, 각 지역에 분산되어 일파를 표시하기 위한 표식이 필요하 게 되어, 그로 인해 생겨난 것이 本 이다. 다시 말해, 각지에 분산된 소속 先祖의 發祥地名을 의미하는 것이 本 이라는 것이다. 本은 貫籍, 鄕貫, 籍貫, 旅本이라고 도 하지만 통상은 本貫 이라 한다. 이와 같은 본관은 부계혈족계통을 표시할 시에 姓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왜 냐하면, 姓 만으로 혈족계통을 표시하기가 어렵고, 本貫 을 병칭함으로써 비로 소 동족임이 표시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에는 선조의 발상지를 달리하는 同姓이 많아, 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姓 에 本 을 붙인다. 예를 9) 상게서 p.8 10) 상게서 p.9 이하들어 金 이라는 하나의 姓을 보더라도, 그 本貫은 金海 , 慶州 , 光山 , 金寧 , 安東 등이 있기 때문에 같은 金 이라는 姓을 가진 사람이더라도 그 本貫에 따 라 직계 조상의 부계혈통이 상이하다. 이처럼 本은 혈족 계통을 나타내는 姓과 不 可分의 關係에 있으며, 同姓同本 이라면 일단 동일 부계혈족에 속한다고 생각한 다. 그러나 동성동본이 모든 경우에 동일 부계혈족(동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 다. 동성동본이면서도 직계 조상이 다른 경우, 즉 동일 부계혈족이 아닌 경우도 있다. 가령, 신라의 경순왕(927〜935년)을 조상으로 하는 김해 김씨와 대가락(가 야라고도 함)의 수로왕(?〜199年)을 조상으로 하는 김해 김씨, 혹은 崔文漢(고려 27대 충숙왕(1313~1330년)의 駙馬=사위)을 선조로 하는 강릉 최씨와 崔立之(고 려25대 충열왕(1274~1308년)의 문신)을 선조로 하는 강릉 최씨는 동성동본이지 만 동일 부계혈족은 아니다. 그 반대로, 異姓同本 이더라도 동일한 부계혈족인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안동 김 씨와 안동 최 씨, 혹은 김해 김 씨와 김해 허 씨가 동족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예이다*. 원래 姓 은 중국의 한자문화를 도입한 삼국시대(BC.37~AD.668년. 고구려, 백 제, 신라)부터 사용되어 왔다. 高句麗에서는, 高, 乙, 芮(예), 松, 穆, 乙支 등, 百濟 에서는 餘 등, 新羅에서는 朴, 昔, 金, 李, 鄭, 孫, 崔와 같은 성이 쓰였다. 삼국의 왕실에서는 고, 여, 김이라는 성을 사용한 이가 가장 많았으나, 일반인은 신라말기 까지 姓을 사용하지 않았다. 고려(AD.918~1392년)의 태조 왕건(918년) 시대가 되 어 성씨 체계가 확립되고, 고려의 문종(1055년) 시대에는 성이 없는 자는 과거시 험을 치를 수 없다는 법령이 공포되었다. 이 때문에 문종시대 이후의 사람을 始祖 로 하는 성씨가 다수 생겨났다. 그 후, 조선시대(1392~1910년) 초기에 성은 양민 (일반인)에게까지 보급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은 조선후기까지 성을 쓰는 것이 금지되었다. 1909년이 되어 호적법이 시행되자 누구나가 성과 본을 갖도록 법제화 되어 오늘에까지 계승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성과 본의 제도는 姓不變의 原則 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긴 역사 속에서 절대적 불변의 제도로 인식되고 지켜지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해 내려 오고 있다. 夫婦別姓制 나 父系姓本繼承制 는 이와 같은 姓不變의 原則에서 파생된 제도이다. * [姓과 本의 실태] 2000년 11월 1일 현재, 귀화성을 제외한 한국고유의 성 은 286개이며, 본 은 4179개이다. ① 성 별 인구분포를 보면, 김씨가 9926천명(21.6%)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이씨가 6795천
명(14.8%)이다. 그 다음으로 박씨가 3,895천명(8.5%), 최씨가 2,179천명(4.7%), 정씨가 2,010천명(4.4%) 등으로 뒤를 이으며, 이 다섯 개의 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② 본관 별 인구분포를 보면, 김해김씨가 4125천명(9.0%)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밀양박씨가 3031 천명(6.6%), 전주 이씨가 2610천명(5.7%), 경주 김씨가 1737천명(3.8%), 경주 이씨가 1425 천명(3.1%)로 뒤를 잇고 있다 (통계청 2000년도 인구주택총조사 - 성씨 및 본관 집계결과 보도자료 2003.1.29). (2) 日本의 氏 (姓)에 대하여 오래전에 氏 는 武士 등의 신분적 특권을 나타내고, 씨는 권력이 부여하는 것이므로, 일반 백성은 씨를 자유로이 칭할 수 없었다. 또한 氏는 父系血統性, 系譜性, 由緖性을 나 타내는 것으로 여겨졌다11). 1867년 12월에 도쿠카와(德川)막부가 무너지고 탄생한 메이지(明治) 중앙집권국가는 明 治 4년(1871) 4월에 인민 장악의 수단으로써 戶口調査를 목적으로 한 戶籍法을 공포하였 다. 이러한 호적법은 또한 幕府末부터 明治維新의 動亂中에 일본 각지에 만연되었던 脫 籍·浮浪·無産의 무리들 단속과 치안 유지, 징세, 징병, 학제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러 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종래의 身分別인 族屬別方式의 戶籍을 폐지하였다. 이와 동 시에 苗字(묘지)=氏 는 호적법이 파악하려고 한 家 의 名으로써, 호적법 시행을 전제로 한 것이므로 德川時代와는 다른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12). 호적법을 공포하기 전인 明治 3년 9월 19일에 明治政府는 自今平民苗氏被差許候事 令 을 발포하였다. 즉, 이 平民苗字許容令 에 의해 姓(氏)의 신분적 특권성이 부정되고, 氏 는 권력에 의해 허가되는 것이 아니며, 평민(백성·상인=서민)은 氏를 자유로이 公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평민 일반은 반드시 氏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백성은 대대로 家名 으로써 襲名되어 온 百姓名으로, 商人은 상점명(屋號)으로 불편함이 없었으며 또 한 백성명·옥호에 애착을 갖고 있던 사례도 많았다고 한다. 또한 병역을 피할 수만 있다 면 성씨는 바꿔도 상관없는, 또는 평민에게는 오히려 어찌되어도 상관없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13). 이 평민묘지허용령은, 평민이 氏를 공칭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징병 11)井戸田博史 ‧ 「法史からみた氏」新世紀へ向かう家族法(中川淳先生古稀論文集)(日本加除出版, 1998年) p.65 12)山中永之佑 ‧ 「明治民法施行前における妻の氏」婚姻法の研究(上)(高梨公之教授還暦論文集)(有 斐閣, 1976年) p.111 13)井戸田博史 ․ 전게논문 p.69
사무에 지장을 주는 등, 여러 사정으로 인해 明治 8년(1875) 2월 13일에 明治政府는 이른 바 平民苗字必稱令 을 공포하고, 평민에게 姓氏의 必稱을 명하였다. 따라서 평민은 성씨 를 공칭하지 않는 자유가 없어지고, 평민 모두가 氏를 갖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氏, 姓, 名字, 苗字 등은 역사적으로 각각 그 의미를 달리하였으나,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호적 을 만들 때, 氏 라는 단위로 호적에 등록시켰다. 오늘날에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氏의 실태] 평민 묘지(苗字) 허용령 이 공포된 明治 3년 9월부터 平民苗字必稱令 이 공포된 明治 8 년 사이에 94% 정도의 국민이 씨를 公稱化하거나 創氏하였다고 한다14).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에 의해 오늘날에 있어 일본의 성씨 수는 10만~30만이라 알려져, 지구상의 모든 언어 의 인종이 모여 사는 미국(100만 이상)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하며, 그 중 흔한 성은 70년 대에 스즈키(鈴木) 였으나 최근에는 사토(佐藤) 가 1위라고 한다. 그러나 스즈키, 사토도 의 성은 전 인구에서는 1~2%를 차지할 뿐이다. 성은 地名과의 관계가 가장 깊다(예, 縣의 이름). 또한 地形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생겨난 것도 많다. 가령, 산, 계곡, 천, 논, 밭, 삼나 무, 소나무 등의 자연을 나타내는 단어 끼리거나, 동서남북, 상중하 등의 위치어가 조합된 성이 많다. 또 한 가지의 특징은 묘지가 읽기 어렵다는 것이다. 가령, 難讀으로 유명한 小鳥 遊 라는 姓氏는 타카나시=鷹なし (매가 없으면 작은 새들은 즐겁게 논다는 뜻)라 읽고, 栗 花落 이라는 姓氏는 쯔유리=梅雨(入)り (장마가 들면 밤꽃이 진다는 뜻)이라 읽는다15).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서류상의 씨명이나 주소는 반드시 후리가나 (音讀)를 병기 하도록 되어있다.
3. 異姓養子 禁止制에 대하여
(1) 한국의 전통적인 관습법상 養子의 入養은, 부계혈통을 이어받을 남자가 제사 를 계승하는 것을 전제로 한 同姓同本의 양자입양이다. 高麗時代(918〜1392년)에는, 유교적인 同宗(동일 조상에서 계수된 동성동본의) 양자 와 전통적 관습의 異姓養子가 인정되었다. 다시 말해, 아들이 없는 자는 형제의 아들(조 카)를 양자로 한다. 조카가 없는 경우에는 타인의 3세전의 棄兒를 양자로 하여 養父의 성을 부여하여, 그 호적에 입적시켰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손이나 조카가 있음에도 불구 하고, 異姓의 子를 양자로 하는 관습이 전국에 퍼져, 이성양자의 입양은 11대왕인 문종 14) 상게논문 p.70 15) 이상은「朝日新聞」2009.2.22.s2〜3참조. 공적 기관에 의한 성씨 조사가 한번도 없으므로, 일본에 몇 종류의 성씨가 있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22년(1068)에 금지될 정도였다. 子가 없는 경우에 조카를 양자로 한 것은 중국의 宗法的 養子制度의 영향으로, 자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異姓의 子를 입양한 것을 고려부터의 관습이었다. 이 이성양자는 주로 외손으로, 외손의 奉祀習俗은 후세까지 전승되었다16). 朝鮮時代에 양자의 관습은 조상 및 자기가 사망한 후의 제사를 지내게 하기 위해 擬 制의 子를 만들어야 하는 필요에서 형성되었다. 양자를 입양하는 것은 결국, 다름 아닌 祭祀者(繼後子)또는 제사자가 될 자를 정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제사자 또는 제사자 가 될 자가 있을 때는 양자를 입양할 수 없다. 이러한 제사자가 될 자는 남자에 한해 인 정된다. 또한 제사자는 한사람에 한하며, 두명 이상의 제사자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양자 도 마찬가지로 한명에 한하며, 두명 이상의 양자를 입양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17). 이처럼, 조선시대의 양자제도는, 宗法的繼後子(同宗養子)제도가 그 근간이 되고 있어, 그 밖의 이성양자 (收養子나 侍養子)는 양부모의 노후를 돌보기 위한 양자에 불과하며, 법률 외의 존재였다. 이 같은 관습법상의 동성양자제도는 엄격히 지켜져, 그에 반한 이성 양자를 입양하는 경우에, 1905년의 형법대전 582조의 5항 본문은 異姓의 子孫을 入養하 여 立嗣하는 자는, 苔 60에 처하며, 그 양자는 本宗에 복귀시킨다 고 하여, 형법상 처벌 대상이 되는 등, 이성양자의 입양을 엄격히 금지하였다18). (2)일본에 있어서, 양자제도는 江戸時代(1603〜1867年) 이래, 주로 家의 承繼를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뒤를 잇기에 적합한 成人을 양자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막 태어난 갓난아이를 양자로 삼는 경우에는 양자임을 모르도록 양친의 親生子(嫡出子) 로 출생신고하여 양육하는 관행이 있었다 (이른바, 藁の上からの養子 (짚 위에서 태어난 때부터 養子가 됨)라는 관행). 따라서 明治民法은 양자의 실질적 요건 중 하나는 法定推 定家督相續人이 될 아들이 있는 자는 남자를 양자로 할 수 없다. 단 사위로 삼기 위한 경우는 이에 한하여 가능하다 (839조)라고 규정하여, 직계비속의 남자가 없는 것을 요건 으로 하고 있다. 즉, 明治民法에서는 법정의 추정가독상속인인 남자가 있는 자(호주)는, 남자를 양자로 삼는 것은 허가되지 않았다. 그러나 입법 당시에 이러한 양자의 요건은 종래의 慣例에 위배되는 것으로, 입법자가 이러한 요건을 필요로 할 이유가 없다고 비판 받았다. 다시 말해, 明治民法의 起草者인 우메켄지로 (梅謙次郎)는, 원래 양자의 주된 목 적은 家督相續人을 얻기 위함에 있으니, 가독상속인이 있는 자는 復養子를 삼을 필요가 16) 박병호 ․ 한국의 법(세종대왕사업기념회, 1999년) p.140이하 17) 朝鮮總督府 ․ 慣習調査報告書(1912年) p.320 18) 박병호 ․ 전게서 p.141
없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가독상속인이 여자일 경우에는, 여자에게 상속을 시키고자 하 는 것은 통상인의 원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남자를 양자로 삼고자 함이 일본 인의 인정에 부합되며, 또한 가독상속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양자는 대부분 사위로 삼기 위함이므로, 이 경우에 대해서는 몇 명을 양자로 삼더라도 가능하며, 또 여자를 부양하는 것은 많은 가독상속인의 목적이기 때문에 이 또한 제한을 가할 필요가 없다 19)고 비판하 였다. 물론, 가독상속인제도가 폐지된 오늘에 있어서 양자제도는, 기본적으로 아이를 위 한 제도이며, 복지제도하에서 자리매김하고 있어, 명치민법의 상기와 같은 제한은 두지 않는다. 한편, 女壻=사위 , 즉 딸의 남편으로서 딸과 결혼시킴과 동시에 이를 양자로 삼는 것 은 허용되었다(혼인과 양자입양을 동시에 신고함). 명치민법상 婿(사위)養子는 가독상속 에 있어서는 보통의 양자보다 약한 지위에 있으나, 家의 繼承을 만든다는 가족제도에 기 한 것이었다. 戰後 1948년(昭和23)의 민법개정에 의해 이 제도는 인정되지 않게 되었으 나, 현실적으로 양자입양에는 이러한 종류의 입양이 상당히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처의 성을 딴 혼인신고와 남편이 될 남자와 처가 될 여자의 부모와의 양자입양신고를 별개로 제 출). 婿養子가 되면 妻家의 名을 승계하며, (처의)부모가 소유한 재산을 상속받게 된다. 개인 경영사업인 家業도 당연히 승계되는데, 큰 사업의 경영자의 지위도 물려받게 된 다20) . 오늘날에는 대물림이나 노후의 부양을 목적으로 한 成年養子가 중심이며, 미성년양자 의 경우에도 가족관계를 안정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재혼 상대의 자녀를 양자로 삼는 경우가 많고, 要保護兒童을 위한 양자는 그 경우가 특히 적다고 한다21). 한국민법도 일본으로부터 移植(조선민사령 11조의 제4회 개정(1939년)에 의해)된 壻養 子제도가 있었으나(876조 1항 女壻로 하기 위하여 養子를 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女壻인 養子는 養親의 家에 入籍한다 ), 1990년의 개정에 의해 폐지되었다.
4. 夫婦別姓制에 대하여
(1) 姓不變의 原則 에 의해, 결혼하여도 夫婦의 姓은 변경되지 않는다. 앞에서 기술한 19) 梅謙次郎 ․ 前揭民法要義(親族編) p.279 이하 20) 中尾英俊 ․ 日本社會と法(日本評論社, 1994年) p.114 이하 21) 二宮周平 ․ 家族と法 (岩波新書, 2007年) p.124이하바와 같이, 姓 이란, 父系血統을 表示하며, 身分이나 戶籍(현재는 가족관계등록)의 變動 이 있어도 변경되지 않는 血統의 表識이며, 이것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한국의 관습법 이다. 따라서 혼인에 의해 다른 家에 입적하더라도 부부의 성은 변경되지 않기 때문에 부부는 姓을 달리하며 母子도 異姓을 가지는 것이 통례이다. 남편의 성 도, 부인의 성 도 각각 자기의 부계혈통주의 사상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의 夫婦別姓制 는 본래 개인 존중이나 남녀평등이라는 이념에 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 서도 부부별성제는 헌법상 양성평등의 이념에도 합치하기 때문에, 2005년의 대대적인 민 법(친족편) 개정 시에도 부부별성제는 수정되지 않고.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현행 일본민법은, 夫婦는 婚姻 시에 정한 바에 따라 夫 또는 妻의 氏를 칭한다. (민법 750조)고 하여, 한국과 같은 夫婦別姓制 가 아닌 夫婦同氏制 를 취하고 있다. 이 는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明治31년(1898)의 메이지민법에서, 氏는 家 을 象徵하는 呼 稱으로, 호주 및 가족은 그 統一體의 象徵으로써 그 家의 氏를 稱하는 것(746조 호주 및 가족은 그 家의 氏를 칭한다 )이므로, 혼인에 의해 夫의 家에 입적한 妻는 그 家의 구성원이 되므로 당연히 夫의 家의 氏를 칭하게 된다(788조 1항 처는 혼인에 의해 夫의 家에 입적한다(入る) ). 일단 혼인에 의해 夫의 家에 입적한 妻는 夫가 사망하더라도 원래의 氏로 복귀하는 것은, 夫家의 호주와 친정의 호주의 동의를 얻어야 하므로, 어느 쪽 호주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원래의 성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妻의 從屬的 地位를 강제하기 위해 氏를 形式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22). 메이지 민법 기초자인 우메 켄지로는, 종래의 행정상의 관습에 따르면, 부인은 친정의 氏를 칭함 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중국의 관습을 답습하는 것으로 일본의 가족제도주의 에 적합하지 않다 고 하여, 이 경우에도 처는 일반적으로 夫의 氏를 칭했다고 설명하고 있다23)。 그러나 일본에서는 예부터 여자는 며느리로써 夫家에 들어가도 親家의 氏를 버리지 않 아서, 결국 妻는 夫家에서는 이른바 異姓을 가진 사람 이 되었다. 이러한 夫婦別氏의 관 행은 武士法을 거쳐 메이지까지 전해져 왔다고 한다24). 메이지 정부가 妻의 氏에 관하여 최초로 의도를 표명한 것은, 메이지 8년(1875) 11월 9일의 內務省 질의에 대하여 메이지 9년 3월의 太政官(내각에 해당)의 指令은 다음과 같았다. 婦女子가 며느리가 되어도 여 22) 熊谷開作 ․ 「家族法」日本近代法發達史(3)(勁草書房, 1970年) p.75 23) 梅謙次郎 ․ 前揭民法要義(親族編) p.43 24) 井戸田博史 ․ 전게논문 p.71
전히 所生의 氏를 사용할 수 있다. 단, 夫의 家를 상속할 경우는 夫家의 氏를 칭할 것 이 라는 회답이었다. 이리하여 메이지 9년 3월의 태정관 지령에 의해, 부인은 남편의 家 을 상속하지 않는 한 所生의 氏 를 칭해야 한다는 원칙이 확정되어, 메이지민법 시행 시까 지 계속되었다고 한다25). 그러나 일본 현행민법 750조는 夫婦는, 婚姻 시에 정한 바에 따라, 夫 또는 妻의 氏를 칭한다 고 규정하여 夫婦同氏의 原則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夫婦의 氏가 同一하다 면, 夫의 氏든 妻의 친정의 氏든, 어느 쪽도 상관없게 되었다. 이 규정에 의한 夫婦의 氏 는, 메이지민법의 家의 氏 를 축소 보존한 것이라는 측면이 있다. 적어도 대부분의 경우 남편의 씨가 선택되고 있기 때문에(97%), 결과적으로 그러한 기능을 하게 되었다고 한26). 더욱이, 昭和 51년(1976) 5월에 767조가 개정되어, 이혼한 前妻는 친정의 씨로 돌아 가도 좋으며, 전 남편의 氏를 유지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근래 와서, 夫婦別姓의 選擇 즉, 부부별성을 원하는 부부는 각각 결혼 전의 氏 를 칭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른바 選擇的夫婦別姓制 ( …또는 각자의 혼인 전의 氏를 칭하는 것으로 한다 <민법의 일부를 개정하는 법률안 요강> 제3, 1 후단)의 도입 문제와 함께 민법 750조의 違憲 問題를 둘러싼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27). 선택적 부부별성제의 신중론이 뿌리깊으며, 가족이나 사회의 틀의 기본에 관계된 제도개 정이기도 하므로, 매우 중요한 문제라 여겨진다.
5. 同姓同本不婚制에 대하여
동성동보의 불혼제는, 원래 중국·周시대에 비롯되어 漢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확립된 제도라 한다. 明朝律인 大明律(1397年)은 凡同姓為婚者各杖六十離異 라 하여, 동성과 혼 인한 자는 각각 장 60대의 형에 처하고 이혼시킨다는 同姓不婚制를 취하였다. 한국에서 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유교사상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중국의 대명율을 조선의 법으로 적용하게 되어, 그에 따라 동성혼이 철저히 금지되었다(조선 영조 20년 속 대전 (1744 년) 예전혼가조). 조선 말기에 이르러, 형법대전(1905年) 572조는 氏貫이 모두 같은 자 가 서로 혼인하거나 혹은 첩으로 취한 자는 태 일백대에 처하며, 이혼시킨다 고 규정하 여, 동성동본의 혼인은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동성동본의 부계혈족 간의 혼인이 25) 山中永之佑 ․ 전게논문 p.113 26) 大村敦志/權澈․日韓比較民法序說(有斐閣, 2010년) p.142 27) 竹中勲․ 婚姻の自由と夫婦同氏強制制度の合憲性 ジュリストNo.1234(2002.11.15) p.88금지되었다(상세한 것은 후술).
二
. 日本植民地時代있어서 父系血統家族의 崩壞
1. 朝鮮民事令 11條의 改正
일본식민지시대(1910〜1945年)의 일본정부는, 1912년 3월 18일에 朝鮮民事令 (제령 7 호)을 제정하고, 동 령은 동 년 4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조선민사령은, 일본 식민지배 하에 한국의 民事에 관한 基本法令으로, 동 령에 의하여 일본민법전과 각종 특별법 및 부속법이 한국에 적용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조선민사령 1조는 조선의 민사에 관한 사 항은 본 령 그 밖의 법령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는 좌측에 열거한 법률에 의한다 고 규정하고, 적용될 법률로써 일본의 민법, 신탁법 및 상법 등 23개의 각 종 특별법·부속법이 열거되었다. 단, 친족·상속에 관하여 조선민사령 11조 전단 본문은 조 선인의 친족 및 상속에 관해서는 별개의 규정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제1조의 법률에 의하지 않고 관습에 의한다 고 규정하여, 이를 근거로 조선민사령의 공포 당시에 친족상 속에 관해서는 일본민법 규정이 적용되지 않고, 한국의 관습법이 적용되었다. 그 후 일본의 식민지지배와 동화정책이 강화됨에 따라 조선민사령 11조는 4회에 걸쳐 개정되었으며, 특히 제4회 개정(1939.11.10.제령 19호)에 의하여 대폭적으로 개정되었다. 다시 말해 메이지(구)민법의 氏에 관한 규정(746조), 재판상 파양에 관한 규정(866조 내 지 875조. 단, 隱居와 관계있는 875조 단서 및 부부 양자에 관한 876조는 제외), 婿養子 入養의 무효 내지 취소에 관한 규정(786조 및 858조)이 한국에 적용됨과 동시에 異姓養 子制가 도입되었다(11조의 2). 이 같은 개정에 의해, 한국가족관습법상 불변의 대원칙인 동성동본불혼제와 이성양자입양금지제가 폐지되고, 또한 서양자제도가 이식되는 등, 유교 이념을 기반으로 한 가족관계가 무너지고 있었다.2. 明治時代의 戶主制 導入
(1) 민법상의 호주제도는 한국 고유의 제도가 아니다. 즉, 우리 민법의 호주제도는, 입법이 졸속으로 이루어진 결과, 호주와 호주권 성립의 유래를 검토하지 않고, 일제의 구 민법기초자들이 만들어 낸 호주 내지 가독상속제를 명칭만 바꾸어 승계한 것이다 28). 여기서는 우선, 호주제의 연혁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의 호적제도의 기원은, 중국의 제도를 계승 내지 모방하여 국가가 징세, 징병, 부 역 등의 행정 시책을 위한 자료인 호구 대장이 그 발단이 되었다. 다시 말해, 고려시대 (936~1392년)의 호적제도는 常民의 호적과 兩班의 호적으로 구별되며, 상민의 호적은 징병, 부역의 자료로 삼은 문서였으나, 양반의 호적은 특권적 신분의 증명서인 동시에 일 종의 면역증인 문서였다. 조선초기(1400년대)의 호적제도는, 인민의 이동 및 良賤身分의 혼류를 방지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인민의 도망과 壯丁의 호구누 락, 양천신분의 혼류를 방지하는 등 호적의 정확성을 도모하기 위해, 1413년(태종13)에는 호패법이 제정되어 실시되었다29). 조선 후기에 이르러 1896년(건양 원년)에 호구조사규 칙 이 공포(1896.9.1. 칙령 61호)되었다. 당시의 호적에 표현된 호주 및 가족이란, 동일 생활권 내에 있는 실재의 호구를 의미 하며, 실재로 동거하는 자에 한해서 편성된 것이므로, 그것은 현행 주민등록법에 의한 주 민등록 과 일면 닮은 점이 있었다. 이러한 조선 시대의 호적제도는, 조선 초기에 도입된 중국의 종법제도의 유교이념에 의한 가부장제 가족제도와 함께 가족관계의 관습으로써 형성되어, 가부장 과 호주 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 그것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인의 일반의식 속에 뿌리 깊게 남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를 요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家父長는 자녀에 대한 父權, 처 또는 첩에 대한 夫權이 있을 뿐으로, 아버지 또는 남편으로써의 자격 외에 특별히 家長으로써 의 권리(예,일본 가부장의 지배 명령권)는 인정되지 않았다. 父權 또는 夫權 이외에 통 일적 지배권으로써 가장권 제도가 한국에 처음 등장한 것은 일본식민지의 시대이다30). 다시 말해, 한국에서는 일본의 메이지 민법이 창안한 호적상의 가족단체의 家나 戶主權 의 관념이 없었으나, 후에 일본정부가 조선민사령의 개정에 의한 일본가족법의 적용범위 의 확대, 제2차 한일협약 (1905. 11. 17)에 의한 통감부 시대(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 의 民籍法 의 제정(1909.3. 법률 8호) 시행, 한일합병 후의 관습조사의 왜곡과 朝鮮戶籍 令 의 제정(1922년(다이쇼 11년) 칙령154호) 시행 등을 통해 일본식 가족제도와 호주제도 가 한국에 이식되었던 것이다31). 28) 田鳳德 ․ 「戶主制度의 歷史와 展望」 대한변협지 1982.10월호 p.32 29) 鄭光鉉 ․ 韓國家族法硏究(서울대학출판부, 1967년) p.125 30) 李勝雨 ․ 「韓國家族法上の戶主制度」21世紀の日韓民事法學<高翔龍先生 日韓法學交流記念>(東京‧ 信山社, 2005年) p.78 31) 山田鐐一/青木勢津/青木清‧韓国家族法入門(有斐閣, 1986年) p.17
3. 父系血統表示의 姓 變更(創氏改名)
조선민사령중개정의 건 (1939 11.10, 제령 19호)(이하, 제령 19호라 함)과 조선인의 氏名에 관한 건 (1939. 11.10, 제령 20호)(이하, 제령 20호라 함)이라는 2개의 법률(조선 총독부 당시의 제령 은 일본의 법률에 해당)의 제정과 함께, 조선민사령 11조에 의한 관습법의 부계혈통승계제도가 대폭 개정되었다. 아래에서는 그 중 하나인 創氏改名에 대 하여 약간 살펴 보겠다. 제령 19호는 氏 에 관한 일본민법의 규정(明治民法 746조 호주 및 가족은 그 家의 氏 를 칭한다 )를 조선에 적용하고, 氏는 호주(법정대리인이 있을 때는 법정대리인)가 이를 정한다 는 규정을 조선민사령 11조 1항 후단에 새로이 추가하였다. 게다가 새로이 추가 된 부칙에서 조선인 호주(법정대리인이 있을 때는 법정대리인)는 본 령 시행 후 6개월 이내에 새로이 氏를 정하여 이를 府尹 또는 읍면장에게 신고해야 한다 (제령 19호, 11조 의 2, 부칙 1항)고 하여, 당국에 새로운 氏 를 신고할 것을 의무화하였다(이를 設定創 氏 라 함). 게다가, 이 기간 내에 氏 를 신고하지 않은 경우에는 호주의 姓을 가지고 氏로 한다 (제령19호 11조의 2, 부칙 2항)고 하여, 호주의 姓 을 氏 로 간주하고, 호적 관리자는 직권으로 호적에 씨 를 기재한다. 호주가 여자일 경우는 전 남자호주의 성 을 氏 로 한다고 규정하였다(이를 法定創氏 라 함)32). 이와 같이 제령 19호에 의한 創氏 는 조선인에게는 없었던 일본의 家 의 명칭인 氏 를 호주의 신고여부와 상관없이, 법적 강제로 새롭게 창설한 것이다. 결국 제령 19호에 의 하여 한국의 관습법으로써 계승되어 온 혈통(의 표시 =성) 중심의 가족제도 는 메이지 민법상 일본의 家系(의 명칭 = 씨)를 단위로 하는 家制度 로 바꾸도록 의무화되었다. 제령 19호와 동시에, 제령 20호 조선인의 씨명에 관한 건 이 제정․시행되었다. 동 제 령 2조는 씨명은 이를 변경할 수 없다. 단, 정당한 사유가 있을 경우에 조선총독부가 정 한 바에 따라서 허가를 얻을 경우에 한하여 가능하다 고 하고, 그 수속절차에 대하여 조 선총독부령 222호(1939(쇼와 14년).12.26.)[조선인의 씨명 변경에 관한 건 좌측과 같이 정 한다] 제1조는 씨명의 변경을 하려는 자는 그 본적지 또는 주소지를 관할하는 법원에 신청하여 허가를 받아야 한다 고 정하고 있으나, 동 조 2항은, 씨명변경의 불허가의 재 판에 대해서는 불복을 제기할 수 없다 고 정하고 있다. 이들 규정에 의해 새로이 설정된 창씨와 고유의 자신의 이름은 원칙적으로는 변경할 수 없으나, 정당한 사유 있을 경우 에 조선총독부가 정한 법원에서 허가를 받아 변경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법정창씨가 32) 상세한 것은, 宮田節子/金英達/梁泰昊‧創氏改名(明石書店, 1996年) p.34이하 참조된 자가 그 후에 일본인 풍의 氏 로 바꾸고 싶다거나, 종래의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인 풍의 이름 으로 변경하고자 신청하는 경우를 생각한 규정이다. 이상과 같이 제령 19호는 창씨 를 법적으로 의무화하면서, 다른 한편 제령 20호에 의 한 개명 의 신청은 임의라고는 하나, 법원의 허가를 요하도록 하고, 그 불허가의 재판 에 대해서는 불복을 제기할 수 없다 라는 강력한 법원의 허가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이 유는 결국, 제령 19조에 의해 조선인도 일본인과 똑같이 씨 를 붙이게 되는데, 이름에서 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이를 남겨두는데 있다고 해석되고 있다33). 이러한 일련의 제령․부령은, 한국의 관습법상 조선전통의 宗이라 불리는 조상제사를 중심으로 한 男系血統中心의 家族制度 를 일본식민지 시대의 創氏 정책에 의해 日本 의 家制度로 바꾸었다. 그 목적은 일본정부가 메이지민법상의 家制度를 가지고 정치적 관점에서 家制度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는 정책을 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정치 적으로는 일본의 家 制度는 전쟁 전의 이른바 天皇制의 支配體制를 維持하는 一翼으로 써의 기능을 담당하였는데, 조선인을 혈통중심주의 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천황을 중심 으로 한 단체 의 관념, 즉 天皇中心主義 를 주입시키는 것이 創氏 의 진정한 목적이었 기 때문이다34). 1945년 8월 15일 종전 후, 한국에서는 미군정이 시작되었는데, 미군정 당국은 1946년 10월 23일 조선성명 복구령(군정법령 122호)를 발포하여 식민지 시대의 창씨제도를 폐지 하였다. 동 법령은 창씨제도에 근거하여 일본 씨명으로 변경된 조선 성명을 조상 전래의 성으로 복귀시킬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다.
4. 異姓養子 婿養子制의 移植
위에서 기술한 제령 19호의 제정과 함께, 조선민사령 11조에 의한 관습법상의 부계혈 통 승계제도는 대대적으로 개정되었다. 다시 말해, 조선인이 양자입양을 하는데는 양자 는 양친과 성을 같이할 필요가 없고 ··· 중략 ···. 서양자 입양은 양자입양신고와 동시에 혼인신고를 함으로써 그 효력이 생긴다. 서양자는 妻의 家에 입적한다 (제령 19호, 조선 민사령 11조의 2)는 규정이 신설․추가되었다. 이와 같은 개정에 의해, 종래에 절대적 불 변원칙으로 계승되어 온 동성양자의 원칙은 폐지되고, 일본의 異姓養子․婿養子制度가 이식되었다. 33) 상세한 것은, 高翔龍 「韓国法における『家』制度」大東ロージヤ-ナル5号(2009.3.) p.13 참조 34) 水野直樹‧創氏改名(岩波新書<新赤版>, 2008年) p.52이성양자․서양자제도의 도입은, 氏의 창설제도와 함께 일본의 內鮮一體 , 皇國臣民 化 라는 同化政策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35). 異姓養子 중 하나인 婿養子制는 종전 후 현행 한국민법이 시행(1960년 1월 1일)될 때 까지, 대법원은 서양자의 입양은 왜정 퇴각과 동시에 무효하다고 판결을 내렸다. 婿養子 制의 移植에 대하여 한국인은 얼마나 강력하게 반발하였는가를 그 판결이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우리 고래의 법전 또는 관습상 無子의 者로써 양자를 선정함에는, 반드시 동성 친족으로 그 子의 행열에 상당하는 자여야 한다. ···(생략-필자) ···혼인에 있어서 同姓간은 물론 異姓일지라도 至近 族戚간의 嫁娶(결혼)는 절대로 불허한다. 그것은 친족 의 倫綱을 존중하고, 親族 相姦의 定律과 相須하여 亂倫을 근절하기 위함으로, 진실로 인 륜과 예의를 숭배하는 우리 國憲 民風의 精華이다 고 하여, 가족관계에 관한 관습 일반 론을 서술한 후, 본 건에 관하여 왕년 왜정기간에 소위 서양자제도를 맹종한 자임을 알 아야 하므로, 서양자된 자는 양자로써 동성계통에 불합치할 뿐만 아니라 장인, 시부, 양 부 및 자식, 사위, 며느리의 명분을 어지럽혀, 그 결과 혼인 및 양형제간의 嫁娶에 속하 며 일대 난륜 행위가 됨을 면할 수 없다. 이러한 야만적 서양자제도는 왜정퇴각과 동시 에 자연 소멸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그로 인해 성립되었던 서양자 관계는 공공질 서와 미풍양속에 위배되기 때문에 그 성립은 당초부터 무효이다 36) 고 판시하며, 婿養子 關係를 無效로 하였다. 그러나 婿養子制度는 1960년 1월 1일 시행된 현행 한국민법에 이어졌으나(876조 1항 女 壻로 하기 위하여 養子를 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女壻인 養子는 養親의 家에 入籍한다 ), 1990년 1월 13일의 민법(가족편) 개정에서 폐지되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서양자제도는 일본의 메이지민법하에서 家制度에서 이식되었으나, 사위가 양자를 겸하는 것은 한국인 의 법감정에 합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오늘날에는 그 필요성도 없어졌다. 왜냐하 면, 2005년의 민법개정에 의해 호주제가 폐지되고, 또한 친양자제(특별양자제)가 채용되 었기 때문이다(상세한 것은 후술).
三
. 現行家族法上 父系血統家族의 變貌
현행 민법전은 종전 후 1958년 2월 22일(법률 471호) 제정 공포되어, 1960년 1월 1일 부터 시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민법전 친족·상속편의 입법당시에는, 보수적·관습적 35) 姜恩和 ․ 韓国の養子制度に関する考察(東京都立大学大学院博士学位論文, 2006年) p.52 36) 대법원 판결 1948년 민상 제 348호, 1949.3.26. 破毀自判특성이 고려되어, 주로 한국 고유의 관습을 바탕으로 제정되었다. 그 결과, 친족·상속편 (가족법)은 舊習인 宗法制度의 基本原理를 骨子로 함으로써 헌법 및 민주주의 이념과 상 반되는 규정이 다수 존재하였다. 따라서 민법이 시행된 직후부터 학계나 여성단체를 중 심으로 남녀평등을 기반으로 한 민주적 가족법 개정을 위한 노력이 끊이지 않고 전개되 었다. 그 사이에 가족법은 수차례 개정되었으며, 특히 1990년 1월에는 대대적으로 개정되 었다. 그리고 2005년 3월에 戶主制度의 全面廢止와 姓不變原則의 대대적인 修正, 同姓同 本不婚의 대폭적인 緩和 등, 혁신적인 개정이 이루어졌다37). 이하에서는 부계혈통주의와 관련된 가족제도가 현재 어떠한 형태로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개관하겠다.
1. 戶主制度의 變貌
(1) 戶主相續制 에서 戶主承繼制 로 1990년의 개정전 민법 778조는, 호주에 대하여 一家의 系統을 繼承한 者, 分家한 者, 또는 其他 事由로 因하여 一家를 創立하거나 復興한 者는 戶主가 된다 고 정의한 후, 가 족에 대하여 戶主의 配偶者, 血族과 그 配偶者 其他 本法의 規定에 依하여 그 家에 入 籍한 者는 家族이 된다 (779조)고 하여, 家의 制度를 두고, 各人은 호주 또는 가족의 신 분을 가지고 그 家에 소속되도록 규정하였다. 家에는 반드시 호주가 있어서, 戶主相續으 로 호주의 지위가 순차적으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호주상속은 호주가 사망하거나 국적을 상실했을 때 등의 경우에 開始되는데(980조 1호), 호주상속인이 될 자는 피상속인의 직 계비속남자가 선순위가 되며(985조 1항). 다수일 경우에는 최근친을 선순위로 한다(예, 장남). 호주상속인은 호주상속권을 포기할 수 없다(991조). 또한 호주의 직계비속 장남 은 계통을 계승할 경우 외에는 양자가 될 수 없다 고 규정(875조)하여 직계장남의 양자 입양을 금지하였다. 더욱이, 養子로서 養父와 同姓同本이 아닌 者는 養家의 戶主相續을 할 수 없다 (877조 2항)고 하여, 父系血統主義를 관철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와 같은 호주제도는 현실적인 필요성과 실효성을 상실하였고, 남자중 심사상 유지를 위한 비민주적·관념적인 제도로 작용할 뿐이며, 그 폐지의 필요성은 이전부 터 주장되어 왔다. 1990년의 제3차 개정안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여 호주제를 폐지하기 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회의 심의 과정에서 호주제도는 가족법의 근간이 되는 제도로, 37) 상세한 것은, 高翔龍․ 韓国家族法の大改革」ジユリストNo.1294(2005.7.15) p.84 이하 참조이를 폐지할 경우에 법률체계와 가족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너 무나 크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결국 제3차 개정인 1990년 개정가족법은 호주제 도는 아직 존치하면서, 실효성이 없었던 호주의 모든 권리·의무에 관한 규정과 남녀평등정 신에 반하는 규정 및 호주계승를 목적으로 하는 모든 제도를 해제하여, 戶主相續 을 戶 主承繼 로 개정하였다. 이상과 같이 호주제도는 1990년의 민법개정에 의해 戶主權의 相續에서 承繼로 라는 커 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2) 戶主承繼制 에서 戶主制度의 廢止 로 2005년 3월 가족법개정에 의하여, 戶主制度 가 전면 폐지되었다. 다시 말해, 호주제도 를 전제로 하는 入籍․復籍․一家創立․分家 등에 관한 규정(778조․780조 및 782조 내 지 796조) 외에, 호주제와 관련된 모든 규정(797조〜799조)이 삭제되어, 2008년 1월 1일 부터 시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5년 개정법의 주요 골자 중 하나는 호주제도 의 폐지이다. 호주제도의 폐지 과정 에 대하여 약간 살펴보면, 개정 과정인 국회법제사법위원회의 공청회(2004. 12. 3)에 출석 한 진술인들의 찬반양론이 격하게 대립하였다. 개정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儒敎思想이 뿌 리 깊은 한국사회에서 호주제도가 폐지된다면, 전통적 가족제도의 근간이 붕괴되어 사회 적으로 대혼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의견이 강력하게 주장되었다. 이에 반하여 찬성측에서 는 호주 를 중심으로 家 를 구성하는 호주제도 는 헌법상 보장되어 있는 남녀평등사 상 및 개인의 존엄과 가치를 충족시킬 수 없고 또한 시대적 변화에 따라 증가하는 다양 한 가족형태에도 적합하지 않으므로 전면적으로 폐지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주장되었다. 이러한 개정안이 국회심의 도중에 헌법재판소는 호주제도 에 관한 위헌여부를 심판하였 는데, 2005년 2월 3일에 호주와 관련한 778조(호주의 정의), 781조 1항(자녀의 입적, 성 및 본), 826조 3항 본문(처의 媤家의 입적)을 그 근거와 골자로 삼고 있는 호주제는, 혼 인 및 가족생활에 있어서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규정한 헌법 36조 1항에 위반한 다 는 위헌 판결을 내렸다38). (3) 戶主制 에서 身分登錄制 로 2008년 1월 1일부터 호주제도가 폐지된다는 개정민법의 시행과 함께, 기존의 호적법을 38) 헌재 2005.2.3, 2001헌가 9.10, 11〜15, 2004헌가 5
대신하는 家族關係의 登錄 등에 관한 法律 (2007. 5. 17 제정, 법8435호)(이하, 가족관 계등록법 이라 함)의 시행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신분과 등록제도인 家族關係登錄制度 가 마련되었다. 편제 기준에 있어서 호적제도에서는 호주가 기준이 되었으나, 가족관계등 록법은 개인을 기준으로 하여 편제되었다39). 가족관계등록법은, 가족관계 공시제도에 있 어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2. 姓 本 不變原則의 修正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한국에서는 예부터 姓 은 원칙적으로 父系血統을 表示하는 것으로 계승되어 왔다. 현행민법에 있어서도 姓은 부계혈통을 표시하며, 姓에는 반드시 本 을 붙이도록 되어 있다(781조). 게다가 子는 父의 姓과 本을 이어받는 것을 원칙으로 하 고 있다(781조 1항). 그러나 이와 같은 자녀의 성과 본에 관한 제도는 2005년의 개정민 법에 의하여 대폭 수정되었다. (1) 子女가 母 의 姓과 本을 繼受하는 경우 2005년의 改正前 민법은, 자녀의 성과 본에 대하여 姓不變의 原則 을 근간으로 하여, 父의 姓과 本을 계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규정(781조 1항 본문)하였으나, 2005년 개정민 법은 781조 1항 본문의 단서를 2항으로 옮기고, 그 대신에 다만, 父母가 婚姻申告시 母 의 姓과 本을 따르기로 協議한 경우에는 母의 姓과 本을 따른다 (동항 단서)라는 조항을 신설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협의가 된 경우에는, 그 부모에게서 태어난 모든 자녀는 어머니의 성 및 본을 물려받게 된다. 이 단서에 의하여, 父系血統主義는 대폭 수정되고, 母系血統主義로 전환되는 것도 가능하게 될 전망이다. 법제사법위원회에서는 자녀가 어머니의 성과 본을 이어받는 것을 단서가 아닌 본문에 규정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견도 개정안으로 제출되었다. 다시 말해, 아버지와 어머니의 의견이 평등하게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에 협의가 성립하지 않은 경우나 또는 협의를 불 가능하게 하는 경우의 대처 방법에 대해서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부 모의 협의에 따라 자녀의 성과 본이 정해지지만, 협의가 불성립되는 경우에는 가정법원 이 이를 결정해야 한다는 의견이다40). 그러나 그 반대의견으로 어떠한 합리적 기준에 근 39) 상세한 것은, 申榮鎬/裵薰․韓國家族關係登錄法 (日本加除出版, 2009年) p.10 이하 40) 250회 국회 「회의록」 13호 p.7 우단거하여 법원이 자녀의 姓 을 결정할지 불명확하며, 또한 姓 을 둘러싼 분쟁이 길어질 경우에는 그 자녀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남녀평등의 이념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사회질서 등을 고려할 때 비현실적이며 불합리적이라는 비 판도 제기되었다41). 결국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은 단서조항을 신설하는 것으로 결론지 어졌다. (2) 子 의 姓과 本을 變更하는 경우 개정법은 子의 福利를 위하여 子의 姓과 本을 變更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父, 母 또 는 子의 請求에 의하여 法院의 許可를 받아 이를 變更할 수 있다 (781조 6항 본문)고 규 정하여, 자녀의 성과 본을 변경하는 제도가 새롭게 마련되었다. 이 신설규정은 姓不變의 原則을 근간으로 하는 父系姓本繼承制 를 크게 바꾸게 되는 충격적인 것이다. 문제는 자녀의 복리를 위하여 자의 성 및 본을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 란 어떠한 경 우인가이다. 여기서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① 우선 아버지의 성과 본을 계승한 子가 어머니의 성과 본으로 변경하는 경우이다. 親父의 姓 에서 母의 姓 으로 變更된다는 의미에서, 상기 (1)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② 문제는 자녀의 모친이 재혼했을 때에, 그 아이가 義父의 姓 과 本 으로 變更하는 경우이다. 2005년 개정의 주목적 중 하나는 이러한 경우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개정과정 에 있어서 주요한 예로 거론된 것은 아이의 어머니가 재혼했을 경우이다. 즉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아이는 만약 어머니가 재혼하여도 실제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성 과 본 은 변경되지 않으므로, 어머니가 재혼한 상대방의 성 본 과 相異한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가령, 개정법에 의해서도 金氏라는 姓의 아버지와 李氏라는 姓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원칙적으로 아버지의 姓을 이어받아 金이라는 姓이 된다. 부모가 이혼하 여도 그 아이의 金氏라는 姓은 변하지 않는다. 만약 그 아이의 어머니가 朴氏라는 姓의 남자와 再婚한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의 姓이 金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때문에 아이의 姓(金氏)은 어머니가 재혼한 상대방의 姓(朴氏)과 다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外見上으로는 父子關係로 보이지만, 姓이 다르기 때문이 그 아이의 어 머니는 재혼하였다는 사실이 쉽게 알려져게 된다. 그 결과 그 아이가 유치원이나 초등학 교에서 “따돌림(왕따)”의 대상이 되기 쉬워지는 등, 아버지의 姓과 다르다는 이유로 아 이가 입는 정신적 고통이나 사회적 불이익 등이 크다는 것이 개정의 주요한 이유였다42). 41) 상게 「회의록」 13호 p.10우단 p.11 좌단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법제사법위원들은 격렬한 토론을 전개하였다. 즉 재혼한 어머니의 자녀가 자신의 혈통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者의 姓 과 本 을 쓴다는 것은, 姓 이라는 개념의 본질에 반하고, 과학적․윤리적 측면이 고려되지 않았다는 견해, 재혼가정의 단기 간의 불편을 덜기 위해, 수천년에 걸쳐 계승되어 온 제도를 변경하고, 장래에 선조 대대 로의 성과 자신의 성이 다를 경우가 늘어나 자신의 선조를 알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초 래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견해43)가 있었다. 물론 姓과 本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아이의 어머니가 이 혼과 재혼을 반복할 때마다 그 아이의 姓이 변할 가능성도 있다. 애초에 姓이란 본래 단 순한 개인의 칭호가 아니라, 출생의 계통을 표시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지키려면 姓 의 繼承에는 실제의 親子關係가 존재해야만 하며, 姻戚에 지나지 않는 의붓 아버지의 姓 을 따르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더욱이 本人의 意思와 관계없이, 부친으로부터 이어받은 자신의 姓 이 변경된다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그 아이를 위한 것인지는 의문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