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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研究センター年報第15号ブック.in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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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The Annual Report, Research Center for Korean Studies. 韓国研究センター年報. vol.15 2015.3. 九州大学韓国研究センター ISSN 134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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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挨 拶 九州大学韓国研究センター長 中野 等. 2014年4月、松原孝俊教授のあとを受け、4代目のセンター長に就任いたしました中野 等です。九州大学で の本務は伊都キャンパスに本拠を置く大学院比較社会文化研究院教授で、学府は地球社会統合学府(2014年度の 改組前は比較社会文化学府)を担当しております。専門は日本史学、とりわけ中近世移行期を専門に研究してお ります。別の言い方をすれば、戦国時代から織田信長・豊臣秀吉の時代を経て江戸幕藩体制の確立期となります。 この時代、いろいろな意味で日本社会は激動し大きく変容していきました。この間しばらく豊臣政権の「壬辰倭 乱」 「丁酉再乱」 (日本での呼称は「文禄・慶長の役」 「朝鮮出兵」など)を研究の主軸に置いてきたことから、韓 国にもしばしば足を運ぶこととなり、多くの韓国人研究者の方々とも親しくおつきあいをする機会を得ました。 こうして何時しか、九州大学において「韓国学」を研究する者の一人に数えられるようになっていました。とは いえ、私は韓国語をまったく理解できませんし、九州大学の「韓国学」研究者として正規の「市民権」を有して いるとは、決して考えておりません。 そのような本来担うべき資格も無いはずの私がセンター長の重職を任されるに至った所以は、ひとえに本セン ターが歴史の大きな節目を迎えようとしているからに他なりません。成熟すべき日韓関係が大きな試練の時を迎 えようとするこのとき、センターの創設にかかわって来られた諸先輩方もそれぞれにご勇退の季を迎えられよう としています。このような極めて困難な時に、九州大学はどうあるべきか、本センターは研究施設として何をな すべきか、様々な難問が突きつけられています。もとより非力極まりないセンター長が独力で立ち向かえること など皆無といっても良いでしょう。センター長就任以来、私はこれからの「韓国学」を担うであろう学内の清新 な方々にお声がけをして「タスクフォース」を組織し、今後の本センターのあるべき姿を指し示していただきま した。今後の研究戦略はもとより学内外における本センターの立ち位置など多くの示唆を得、ようやく改革の第 一歩を踏み出すところまでやってきました。2015年度の当初には組織改革をすすめ、これまで4部門統合して研 究企画戦略部門ひとつにまとめ、その下に柔軟に研究・教育課題に取り組むためのユニット制をしくことを予定 しています。部門の名称は、九州大学の韓国学研究をセンターの内に閉じ込めるのでなく、本センターが核ない しハブとなって九州大学全体を巻き込む研究展開を進めたいという企てが含意されています。もとより、九大を 中心とする学外との連携を積極的に組織化することも視野にいれる必要があります。 とはいえ、センター長としてようやく試行錯誤の一年目が終わったばかりです。この一年間足許を固めること ばかりを気にしたため、組織としてのパフォーマンスが低下したのではないか、あるいはアクティビティーが感 じられないなど内外からのご批判を受けてきたのも事実です。偏にセンター長の不甲斐なさに因るものですが、 センターは決して終焉への途をたどっ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次世代の日韓関係のあるべき姿はどうなの か、さらにそうした中で九州大学韓国研究センターがいかにあるべきか、今はそうした熟考の時であり、飛躍の ための雌伏の時と考えています。屡述にはなりますが、創設以来の大きな節目を迎え、今後のあるべき姿を模索 する本研究センターに、従前とかわらぬご支援・ご高配を冀いつつ、年報の巻頭によせるセンター長挨拶を擱筆 いたします。. 韓国研究センター年報 vol.15. i.

(5) 한국연구센터장 인사말 . 규슈대학 나카노 히토시. 2014년 4월에 마쓰바라 타카토시 교수 후임으로 제4대 센터장으로 취임한 나카노 히토시입니다 . 저는 규슈대학 이 토캠퍼스에 있는 비교사회문화연구원 대학원 교수이며 , 학부(学府 : 대학원 교육)는 지구사회통합학부(2014년도 조 직개편 이전에는 비교사회문화학부)소속입니다 . 전공은 일본사학 , 특히 중세와 근세 이행기를 주로 연구하고 있습니 다 . 즉 전국시대부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대요시(豊臣秀吉)시대를 거친 뒤 에도막부(江戸幕 藩)체제가 확립되는 시기입니다 . 이 시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일본사회가 크게 격동하며 변화한 시기입니다 . 그 동안 도요토미정권의 ‘임진왜란’ 과 ‘정유재란’ 을 중심적으로 연구하였으므로 , 한국을 종종 방문하여 많은 한국 연구자와의 친분과 학문적 교류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 그리하여 언제부터인가 저도 규슈대학에서 ‘한국학’ 연구자 중 한명으로 간 주되기에 이르렀습니다 . 그러나 저는 한국어에 능숙하지 못하고 연구자로써도 무르익지 못해 , 규슈대학의 ‘한국학’ 연 구자로 당당히 자부할 형편은 아닙니다 . 자격이 부족한 제가 센터장의 직책을 맡게 된 이유는 , 다름이 아니라 한국연구센터가 시기적으로 큰 변화를 맞아 다 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성숙되어야 할 일한관계가 큰 시련을 맞은 현시점에 , 한국연구센터 창설과 번영에 중요한 역할을 하신 여러 선생님들이 하나 둘 정년퇴임을 하게 되어 저에게 이러한 중직이 맡겨졌습니다 . 이와 같이 매우 어려운 시기에 규슈대학은 어떻게 해야 할지 , 한국연구센터는 연구기관으로써 무엇을 해야 할지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 처음부터 능력과 힘이 부족한 제가 이와 같은 문제를 혼자 해결해 나갈 수는 없었습니 다 . 그래서 센터장 취임 이후 ‘한국학’ 을 공부하는 학내의 청신한 연구자들에게 요청하여 ‘테스크포스’ 를 조직하였고 , 이를 통해 향후 본 센터가 지녀야 할 자세와 수행해야 할 과제를 제시 받았습니다 . 향후 연구전략으로부터 학교 내외에 서 한국연구센터가 있어야 할 위치 등 많은 시준점을 얻어 , 이제 겨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첫 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되었습니다 . 2015년도 당초에는 조직개혁을 진전시키고 , 그 동안 수행해 왔던 네 가지 부문을 통합시켜 연구기획전략 부문의 하나로 묶고 , 그 아래에서 여러 가지 연구 ・ 교육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유니트제를 시행할 예정입니다 . 부문의 명칭은 규슈대학 한국학연구를 센터 내에 한정시키지 않고 , 한국연구센터가 핵심 내지 허브가 되어 규슈대학 전체가 참여하는 연구를 전개하고 싶다는 의도가 함의되어 있습니다 . 무엇보다 규슈대학을 중심으로 하여 학교 밖의 제휴도 적극적으로 조직화 해 나가는 것도 시야에 넣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렇지만 센터장으로써 겨우 시행착오의 1년이 끝난 정도입니다 . 지난 1년 간 기반을 단단히 한 정도를 염려하여 , 조 직으로써의 움직임이 저하된 것이 아닌가 , 또는 활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 전적으로 센 터장의 역량이 부족해서 나타난 우려일뿐 , 한국연구센터가 종언의 길로 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 차세대 일한관계의 마땅한 모습이 무엇인지 , 더욱이 이런 상황에서 규슈대학 한국연구센터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 지금은 그에 대한 숙고 의 시기이며 비약을 위한 준비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 거듭 말씀 드리지만 , 창설 이후 큰 변화를 맞고 이후 지녀야 할 자세를 모색하는 한국연구연구센터에 변함없는 지원과 각별한 배려를 부탁드리며 인사말을 마치겠습니다 .. ii. 韓国研究センター年報 vol.15.

(6) Contents The Annual Repor t, Research Center for Korean Studies あいさつ 第一部 研究論文 유배죄인에 대한 규제와 감시 -김귀주의 유배일기를 중심으로- 전경목��������������������  1 朝鮮의 儒敎的 國家 儀禮 整備와 그 特徵 ―《國朝五禮儀》吉禮・凶禮의 상호 영향을 중심으로 ― 姜制勳 ����������  21 Time, Space, and Modernity Dong-No Kim ����������������  37 知識生産の独自的基盤と大学の改革:ソウル大学を中心に 姜明求��������  51  「国会先進化法」と韓国国会 ―改正の概要と立法過程への影響― 菊池勇次�����������������  67. 第二部 紀行文 渡航自粛要請措置等解除後の北朝鮮訪問記 水島玲央��������������  81. 第三部 NEWS コンソーシアム・ワークショップ������������������������ 93 アジア太平洋カレッジ����������������������������� 96 セミナー����������������������������������� 98 研究会������������������������������������ 99 客員教授紹介��������������������������������� 100 研究活動一覧���������������������������������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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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第一部. 研究論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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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유배죄인에 대한 규제와 감시. 유배죄인에 대한 규제와 감시 -김귀주의 유배일기를 중심으로-. 전  경  목(한국학앙면구원 교수) 1 . 서론 그동안 유배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져 유배의 여러 가지 모습들이 상당히 밝혀졌다. 특히 문학 쪽에서 많은 연구 가 이루어져 유배문학이 한국문학연구에서 한 장르가 될 정도이다1). 그러나 역사 쪽의 연구는 이제 시작이라고 해도 과 언이 아니다2). 따라서 아직 밝혀져야 할 사실들도 대단히 많다. 유배지 선정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지, 유 배지까지의 호송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유배지에서 보수주인은 어떻게 결정되는지, 보수주인에 대한 댓가는 무엇이었 는지, 그곳에서의 생활비 등은 누가 부담하는지, 주거의 제한은 어디까지인지, 서신 왕래나 가족 면회 제한은 죄질에 따 라 어떻게 달랐는지, 수행인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 합법이었는지 등은 아직 제대로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런데 그간의 연구결과를 살펴보면서 당혹스러운 것 중의 하나가 유배지에서의 생활이 너무 다른 경우가 많다는 것 이다. 예컨대 유생으로서 2차 예송 논쟁에 참여했던 이필익 (李弼益) 의 경우에는 소두 (疏頭) 였다는 이유로 유배되었 지만 유배지에 새 집을 짓고 가족을 모두 데리고 가서 살았으며 또 그곳에 전답을 마련하여 농사를 지으며 넉넉한 생활 을 했다3). 더군다나 그는 유배생활 내내 인근 고을의 수령들로부터 여러 가지 지원을 받았으며 융성한 향응까지 받아 유 배를 당한 것이 아니라 유람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심지어 그는 유배되기 전에는 이름 없 는 유생에 불과했으나 유배를 통해 정치적 역량을 쌓고 지위를 높여 유배 후에는 나름 유명한 인물로 변신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본고에서 다룰 김귀주나 그와 유사한 경로로 제주도로 유배를 당한 조정철은 유배지에서 내내 거친 음식을 먹어야만 했고 본가에서 보낸 식량이 차단되어 유배 기간 내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 조차 봉쇄당해야 했다.4) 김귀주는 철이 지난 뒤에도 옷을 갈아입지 못하고 병이 나도 의원을 불러 치료를 받거나 약을 사 먹을 수 없었다. 중병을 앓고 있음에도 직접 점고에 참여해서 수령으로부터 갖은 모욕을 당해야 했고 가족과의 접견이나 서신 왕래조차 금지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서로 교차 감시하도록 해서 조그만 움직임까지 수령에게 즉각 보고되었다. 과연 어느 것이 조선시대 유배생활의 본 모습인지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곳에 정배되었음에도 한 사람은 ‘유람’ 하는 것과 같은 생활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혹독하기 짝이 없는 ‘유배’ 생활을 했다.5) 그래서 극과 극의 생활을 했 1 ) 대표적인 논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임형택, [정약용의 강진 유배시의 교육활동과 그 성과], [한국한문학연구] 21, 1998. 박동욱, [정헌 조정철의 유배 한시 연구], [온지논총] 17, 2007.   , [한시에 나타난 유배객의 생활 모습], [어문연구] 38, 2010. 최기숙, [조희룡, 고통 속에서 피운 성찰의 꽃], [역사, 길을 품다], 글항아리, 2007. 2 ) 대표적인 논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심재우, [극과 극, 조선시대 유배의 재발견], [조선양반의 일생], 글항아리, 2009.   , [조선전기 유배형과 유배생활], [국사관논총] 92, 2000.   , [조선후기 단성 지역의 정배인의 존재 양태], [한국학보] 102, 2001.   , [19세기 전반 평안도 지역 유배인의 성격과 유배행정], [한국문화] 59, 2012. 김경숙, [조선시대 유배형의 집행과 그 사례], [사학연구] 55・56집, 1998.   , [조선시대의 유배길], [역사비평] 67, 2004.   , [17세기 후반 한 유생의 유배살이], [선비문화] 12, 2007. 정연식, [조선시대의 유배생활], [인문논총] 9, 서울여자대인문과학연구소, 2002. 3 ) 김경숙, [17세기 후반 한 유생의 유배살이], [선비문화] 12, 2007. 4 ) 박동욱, [한시에 나타난 유배객의 생활 모습], [어문연구] 38, 2010.. 韓国研究センター年報 vol.15. 1.

(11) 다고 평할 정도였다.6) 그러나 결국 둘 다 유배생활의 본모습이었다. 다만 어느 것이 이처럼 극과 극의 생활을 할 수 있도 록 했는지에 대해서는 유배일기 등을 중심으로 보다 많은 사례연구들이 이루어져야 해결될 것으로 판단된다. 본 연구도 그러한 요구에 따라 이루어졌다. 본 연구는 김귀주가 쓴 유배일기 [금성일록(錦城日錄)]을 분석해서 먼저 그가 유배생활 중에 어떠한 규제와 감시를 당 했는지를 살펴보겠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규제와 감시를 당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유배생활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금성일록]는 김귀주가 1784년(정조 8) 9월 24일 나주로 이배되었을 때부터 사망한 1786년(정조 10) 윤7월 18일까지 쓴 일기이다. 물론 일록이라고는 했지만, 매일매일 쓰지 않았다. 주요한 안건이 있으며 그것을 중심 으로 썼으며 그래서 정확한 날짜가 누락된 경우도 많다. ‘갑진년 10월 초’ 등으로 쓰인 예가 바로 그것이다. 그 이유는 김 귀주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을 매일매일 기록할 만큼 건강하지 않았던 점을 들 수 있다. 또 규제와 감시가 심하기 때문에 이를 매일매일 남기기 어려웠던 점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현재 남겨진 일기나 다 그러하듯이 후일 추가한 부분도 있고 정리하면서 고친 부분도 있다. 일기 작성자가 그날 일어난 일을 미처 다 기록했다가 후일 기억을 되살려 추 가하는 경우가 있으며 또 후손들이 일기를 정리하다가 수정한 부분도 있다. 마지막으로 사망했을 때의 기록은 유배지에 서 김귀주를 모시고 있던 박인서(朴麟瑞)가 작성했다. 사망하기 직전의 기록과 그 이후 시신의 이송 과정에서의 일 등은 박인서가 기록했다. 김귀주는 흑산도에 이배되었을 때에도 일기를 썼을 것으로 추정되나 아쉽게 그 기록은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금성일기]를 통해서 밝힐 수 있는 것은 그의 유배생활 전모가 아니라 나주로 이배된 이후의 모습뿐이다. 그러나 그가 꼼 꼼히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유배인의 생활을 매우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럼 이제 [금성일록]을 중심으로 김귀주 의 유배생활에 있어서 규제와 감시에 대해 살펴보자.. 2 . 유배인에 대한 규제 ( 1 )  규제 유배는 사법 체계상 사형 다음에 가는 형벌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규제와 감시가 뒤따랐다. 그러나 이제까지 알려진 것 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 유배를 중앙의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게 지방이나 고도로 격리시켜는 형벌 정도로 이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특히 당쟁이 격심해진 숙종 이후의 일기자료들을 읽다보면 이전과는 사뭇 다른 점들이 주목된다. 유배인에 대한 규제와 감시가 매우 심해져서 모욕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으며 불법이나 탈법이 강요되는 경우 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사례는 정적(政敵)이 관찰사나 수령으로 재임하는 지역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 었다. ①주거 제한 유배형은 속성상 주거를 제한하는 형벌이다. 그러나 주거 제한에 따른 관리를 엄격하게 하지 않고 대부분 보수주인에 게 위임했다. 물론 유배인의 거류(去留) 여부와 현황 등을 파악하기 위해 일정 간격으로 관에 출두해서 점고를 받도록 했 는데 이 경우에도 보수주인이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김귀주에 대한 관리는 특별했다. 그가 나주의 적소(謫所) 에 도착한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아전, 장교 및 군졸 등을 특별히 임명해서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감시를 매우 철저히 했다. 본주(本州; 나주- 인용자 주)에서 순영의 관문(關文)에 따라 이교(吏校)와 군졸을 보내어 적소를 지키기 시작했다. 순영에서 특별히 관문을 보내어 말하길 “죄인 김귀주가 일개 금부도사의 명령으로 갑자기 본주에 정배된 것은 옳지 5 ) 정연식, [조선시대의 유배생활], [인문논총] 9, 서울여자대인문과학연구소, 2002. 6 ) 심재우, [극과 극, 조선시대 유배의 재발견], [조선양반의 일생], 글항아리, 2009.. 2. 韓国研究センター年報 vol.15.

(12) 유배죄인에 대한 규제와 감시. 않다. 지금 다시 섬으로 들여보내야 한다는 뜻으로 보고를 올렸으니 본주에서 많은 이교와 군졸을 동원해서 철저하 게 지키도록 하라.” 고 했다. 이날부터 형리 4명, 장교 4명, 사령 4명, 군인 4명이 침실 밖에서 밤낮으로 지켰다. 10월 초에 나주목사가 섬으로부터 돌아와 죄인을 지키는데 이와 같이 많은 인원이 필요 없다며 이교와 군인 각각 1명이 돌아가며 지키도록 했다. 그리고 관속(官屬)과 민인으로 간혹 적소에 왕래하는 자를 일체 엄금했다. 하리(下 吏)가 “분부가 내려지기 전에 죄인이 적소에 도착하는 날, 이미 주인에게 말했기 때문에 고을사람들은 면회를 하거 나 연락을 할 수 없다.” 고 말했다 한다. 김귀주가 나주로 이배되자 순영에서는 형리, 장교, 사령, 군인을 각기 4명씩 임명해서 침실 밖에서 밤낮으로 지키도록 특별히 지시했다. 그러나 김귀주가 무술에 뛰어난 무반(武班)이 아니고 문약하기 짝이 없는 문인이었으며 게다가 당시 에는 오랜 유배생활로 중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조처는 지나친 측면이 있었다. 그래서 흑산도에서 돌아온 나주목사 이정회(李廷恢)는 곧바로 적소를 지키는 인원을 각기 1명으로 대폭 축소했다. 방수군(防守軍)이 출입을 통제하려고 했던 주 대상은 외부 그 중에서도 특히 서울에서 오는 유배인의 가족이나 가노 (家奴) 또는 친지였으나 나주와 그 인근 고을의 관속과 민인도 포함되었다. 김귀주와 같은 고위 관료들은 각 지방의 관 속이나 민인들과 오랜 동안 은밀한 연망(聯網)을 구축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자세히 살펴볼 예 정이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겠다. 침실이나 대문 앞에서 오고가는 사람의 출입을 통제하는 이외에도 허술한 울타리를 크게 보강하도록 했다. 하루는 우리 고을 수령이 영장(營將)과 더불어 성의 북쪽으로 놀러갔다. 책실(冊室) 등 여러 사람과 기생이 모두 따 라갔다. 돌아오는 길에 영장과 함께 성곽을 따라 걷다 주인가 서쪽 담장의 한 모퉁이에 이르러 한참 동안 서서 보다 가 담장이 빽빽하지 않다는 이유로 군대를 동원, 대나무를 베어 빽빽한 감옥의 울타리를 만들었다. 이정회의 후임으로 임명된 오재문은 부임하자마자 영리하고 기찰을 잘 하는 이교 20명을 뽑아 방수군을 크게 보강했 다.7) 이어서 야간에 몰래 담을 넘거나 혹은 터진 담장 사이로 왕래하는 자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울타리를 보강을 지시하 기도 했다. 그러나 안에서 갇혀 있던 김귀주는 이 조처의 뒷면에 있는 또 하나의 노림수를 명확하게 판단했다. 그것은 적 소를 감옥과 같이 만들기 위한 조처였다. 그래서 그는 일기에 빽빽한 감옥 울타리를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후임 수령들 도 담장을 중요하게 여겨 거듭 보수를 지시했는데8) 심이지가 내린 다음의 조처를 보면 이러한 사실이 더욱 명확해진다. 수령이 또 주인을 불러 분부하기를 “듣건대 너의 집 동북쪽의 담장이 모두 낮다고 한다. 반드시 이를 높이 쌓아 감 옥의 담장보다 높게 하고 서쪽은 성곽[藩籬]과 닿아있는데 모두 높이 쌓아 한양 사람들이 몰래 들어오는 걱정이 없 도록 하라. 만약 내가 친히 가서 조사할 때 담장이 높아도 혹 감옥의 담장보다 높지 않으면 죽도록 엄형을 가할 것이 다” 라고 했다. 주인이 크게 두려워하고 겁을 먹어서 그날부터 일을 시작해서 5일 이내로 공사를 마쳤다. 서쪽 담장 은 높이가 2장 5척이요, 동북쪽 담장은 높이가 2장 1척이고, 남쪽은 집이 있어서 담이 없다. 심이지는 보수주인에게 담장을 감옥보다 높이 쌓도록 명령하고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처벌하겠다고 겁박 했다. 담장을 아주 높게 쌓도록 해서 유배인이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어 있다는 생각에 빠져들도록 유도했다. 위리안치 는 유배형 중에서 가장 무거운 조처인데 하루 종일 햇빛을 보지 못하고 통풍이 되지 않는 곳에서 생활해야 했기 때문에 7 ) [금성일록] 512쪽 하~ 513쪽 상. 8 ) 오재문의 후임인 유한갈도 담장을 보수하도록 지시한 바 있다. 위 책, 521쪽 하.. 韓国研究センター年報 vol.15. 3.

(13) 그곳에 갇힌 유배인든 심리적으로 매우 커다란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심이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김귀주가 머물던 집을 겹겹이 완전히 봉쇄하기도 했다. 이는 최쾌득(崔快得)이라는 왕대비전(王大妃殿)의 궁예(宮隷)가 왕비의 편지를 가지고 내려왔다가 수령에 의해 쫓겨난 직후였다. 궁예를 쫓아 보낸 후 주인가 대문을 즉시 봉(封)해서 폐쇄시키고 내사(內舍)의 담 모퉁이에 작은 구멍을 뚫어 겨우 물과 불만 통과하도록 했는데 이곳에 또 막아서 지키는 곳[防守]를 하나 더 설치하니 이때 이르러 방수하는 곳이 모 두 3곳이나 되었다. 한 곳은 대문 밖에 본래 막아 지키던 곳이고 다른 한 곳은 오재문이 서쪽 담 밖에 울타리를 만들 어 순라하는 곳으로 유한갈이 재임할 때 방수를 특별히 설치했다. 마지막 하나는 지금 내사의 담장에 구멍을 뚫은 곳이다. 단지 작은 구멍을 통해 불과 물만을 통하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봉쇄해서 이웃으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기 위한 조처 를 취했다. 물과 불은 생활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인데 이것을 주고받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공동체 사회에서 죄 인을 격리시킬 때 취하는 조처였다. 김귀주가 죽음에 임박하자 수령은 압박을 더욱 심하게 했다. 12일 공(公; 김귀주-인용자 주)의 환후가 심해져 거의 목숨이 다할 지경이었다. 수령이 공의 병세를 소상히 파악하 고자 한 기생으로 하여금 주인의 아내에게 몰래 탐지해 오도록 하고 즉시 장교와 아전들로 하여금 보수주인의 이웃 에게 특별히 신칙해 말하기를 “죄인이 거처하는 집에 만일 물과 불을 주고받으면 반드시 때려죽일 것이다.” 라고 했 다 한다. 보수주인의 5촌 조카 나성렬(羅成烈)이 와서 전했다. 심이지의 후임으로 부임한 이원배(李遠培, 1725~?)는 김귀주의 죽음이 임박하자 그의 병세를 소상히 파악하려 하는 한편 보수주인과 그 이웃에게 여러 측면에서 압박을 가해 불과 물을 서로 주고받지 못하게 했다. 혹시라도 이웃 사람들 이 도와 김귀주의 생명이 연장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②음식과 의복 유배인이 받은 제일 큰 고통 중의 하나는 끼니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가족을 동반한 유배의 경우에는 이러한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형편상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대부분 보수주인이 마련해 주는 것을 먹 어야 했다. 보수주인은 뒤에 살펴보는 바와 같이 그래도 비교적 여유 있는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지정했지만, 유배인에 게 제공되는 식사는 거칠기 짝이 없었다. 김귀주가 나주에 도착하자 관에서는 그의 보수주인을 양인(良人) 고만륜(高萬崘)으로 정해 주었다. 며칠 후 감영의 지 시로 방수군을 보내어 적소를 지키게 하는 한편 보수주인이 유배인에게 어떠한 식사를 제공하는지를 세세히 살펴 보고 하도록 했다. 특히 오재문은 이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우리 수령이…… 또 병자(김귀주 - 인용자 주)의 식사가 어떤지 묻자 적소를 지키던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나의 밥 상을 살펴보았다. 일찍이 밥상에 닭다리 하나가 놓여있어서 방수군이 이를 보고하자 수령이 노하여 “고만륜이 죄인 을 잘 대접하니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이 놈을 반드시 목 베어 죽이겠다[溫死].” 라고 했다 한다. 방수군이 어느 날 밥상에 닭다리가 오른 것을 보고하자 수령은 고만륜을 목 베어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중병을 앓고 있는 유배인의 밥상에 닭다리 하나 올려놓은 것을 가지고 노발대발해서 보수주인을 죽이겠다고 겁박하는 오재문의. 4. 韓国研究センター年報 vol.15.

(14) 유배죄인에 대한 규제와 감시. 처사가 옹졸하기 짝이 없지만 어찌되었든 수령이 이처럼 위협하자 보수주인은 그 이후로 김귀주에게 감히 고기를 대접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재문의 최종 목표는 김귀주를 굶겨 죽이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이를 주인에게 노골적으로 직접 말할 수 없었기 때 문에 아랫사람들에게 위협하는 말을 자주 흘려 보수주인의 귀에 들어가도록 유도했다. 2월부터 고을 수령이 주인을 단속해서 나에게 식사를 후하게 대접하지 못하도록 했다. 또 군산(群山)의 사례처럼 하 려 했으나 직접적으로 말하기를 꺼려 매일 아랫것들에게 말하기를 “고만령이 얼마나 부자인지 모르지만 양식도 댈 수 없는 세 사람에게 공공연하게 식사를 제공해서 장차 가산(家産)이 바닥나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구나. 이 사람이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장차 의금부의 죄인이 될 것이며 지은 죄가 아무리 가벼워도 순영 의 죄인은 면하지 못하겠구나.” 라며 중언부언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이야기 해 주인의 귀에 들어가게 했다. 주인이 이 소리를 듣고 놀라며 겁을 먹고 어찌 할 바를 몰라 파산하고 아내를 내보내 도망치도록 하고 자신은 사 내종의 집에 홀로 기식(寄食)하며 박인서 등에게 여러 포대의 곡식을 빌려서 스스로 찧어 밥을 지어먹도록 했다. 만 일 관에서 곡식을 빌려주지 않으면 박인서가 솔잎을 많이 모아 죽음을 면할 계책을 세웠다. 계획이 이미 결정되었 으나 주인이 착해서 차마 우리를 버리고 가지 못하고 시일을 끌면서 감당했는데 이때의 일은 매우 급박했다고 할 수 있다. 어찰이 한 번 내려오자 수령은 양식을 주지 않으려는 의사를 다시 비치지는 않았다. 아마 후환이 있을까 염려 했기 때문이었다. 군산의 사례란 고군산(古群山)에 유배된 송덕상(宋德相, 1710~1783)의 아들 송환주(宋煥周, 1735~?)를 굶겨 죽인 사건을 가리킨다.9) 송덕상은 송시열의 현손으로 1753년(영조 29)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고 홍국영의 비호로 예조참의와 이조판서 등에 올랐다. 그러나 1780년(정조 4)에 홍국영이 왕비를 독살하려던 사건에 연루 되어 삼수부(三水府)로 유배되었다가 병사했다. 그의 아들 송환주와 송환정(宋煥程)도 이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고군산 과 방답진(防踏鎭)으로 유배된 바 있었는데 전라순사 조시위가 위도첨사(蝟島僉使)를 사주해서 송환주를 굶어죽게 했 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것은 조시위가 노론시파(老論時派)이고 송덕상과 김귀주 등이 그와 적대적 관계에 있는 노론벽파(老論辟派)였기 때문에 부풀려진 소문일 가능성이 있지만 김귀주는 사실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 나주목사 오재문(吳在文) 은 노론시파로, 유배중인 김귀주를 감시하고 괴롭히기 위해 자원해서 수령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김귀주는 오재문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을 괴롭히고 또 보수주인을 겁박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동료들로부터 수령의 말을 전해들은 보수주인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피해가 자신의 아내에게까지 미칠 것을 염려 해서 우선 고의로 파산하고 아내를 집에서 내보내어 도망치도록 하고 자신은 사내종의 집에서 홀로 기식했다. 또 김귀주 를 수행하고 있던 박인서에게 딱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이제부터는 스스로 식량을 조달해서 끼니를 해결하도록 권 유했다. 박인서는 할 수 없이 먼저 관에서 양식을 빌려보고 만일 관에서 지급하지 않으면 솔잎이라도 모아 생계를 꾸려 갈 계획까지 세웠다. 다행히 어찰이 내려오자 수령이 양식을 지급하지 않으려던 태도를 바꾸어 양식을 지급해주어 급박 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원칙적으로 유배인의 식사는 보수주인이 제공했으며 그가 먹는 양식은 관에서 지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관에서 지급하는 양식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유배인들은 자기 집에서 조달하기도 하고 또 안면 이 있는 유배지 인근 고을의 수령으로부터 부조를 받기도 했다. 김귀주의 집에서도 여러 차례 양식을 보냈는데 수령들이 9 ) 송환주의 유배지가 [정조실록]에는 古突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古群山의 誤記이다. [승정원일기] 정조 7년 1월 26일과 27일의 기록을 보면 송환주는 만경현 고군산으로 그리고 그의 동생인 宋煥程은 순천부 防踏鎭으로 유배되었다.. 韓国研究センター年報 vol.15. 5.

(15) 매번 이를 차단했다. 그 이유는 식량이나 옷가지 사이에 서신을 숨겨 들어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3월에 가노(家奴) 해석(海石)과 천갑(千甲)이 옷과 양식을 가지고 왔으나 관에서 그들을 쫓아버렸다. 우리 고을 수령이 옷과 양식을 빼앗아 들이도록 해서 동헌 위에 두고 겸인(傔人)에게 옷 꿰맨 곳을 모두 뜯고 양식 이 든 자루를 검사하여 그 속에 편지가 들어있는지 여부를 파악토록 했다. 후에 꼼꼼히 봉한 봉투에 들어있는 편지 가 나오자 두 사내종을 군관청(軍官廳)에 가두고 순영에 보고했다. 순영에서 쫓아 보내도록 명령하자 이에 장교와 군인을 선발해서 두 사내종을 멀리 전주(全州)까지 쫓아 보냈다. 중죄를 저지른 유배인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가족이나 친지와 서신을 왕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귀주는 흉역(凶逆) 곧 대역죄인이라는 이유로 서신 교환조차 못하도록 했다. 가족이나 친지와 주고받는 서신의 내용이 기껏해야 안부를 묻 고 병세 등을 알리거나 서로 위로를 전하는 등의 일상적인 것이었으나 이마저도 못하게 했다. 그러니 자연히 편지를 옷 가지에 숨기고 양식 자루에 넣었던 것이다. 눈치 빠른 수령이 이를 알아채고서 철저한 검사를 통해 이를 찾아 압류하고 함께 가져왔던 옷과 양식마저 돌려보내 결국 끼니 잇는 것도 힘들고 철이 다 지나도록 옷조차 갈아입지 못하게 했다. 사내종들이 가버린 후 주인이 내가 봄옷으로 갈아입지 못한 것을 민망히 여겨 겨울옷에서 솜을 빼고 세탁한 후 바 느질을 해서 입도록 해주었다. 집을 지키던 장교들이 멀리서 보고 수령에게 달려가 “죄인이 입은 옷이 전에 사내종 이 가져온 새 옷과 같습니다.” 라고 고했다. 수령이 크게 의아해 하고 사내종을 쫓아 보낼 때 호송했던 장교[押去將 校]를 불러 조사하여 마침내 실제와 다르니 그만 두었다. 보수주인은 김귀주가 철 지난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다 못해 겨울옷에서 솜을 빼어내고 세탁한 후 바느질을 다시 해 서 입도록 했다. 이러한 모습을 멀리서 본 방수군은 혹시 새 옷을 가져와서 입은 줄 착각하고 이를 수령에게 보고했다. 수 령은 담당 장교를 불러 사실을 조사한 후 새 옷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중죄인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사형을 면하게 했으면 그들이 먹고사는 것을 최소한이라도 보장해야 했다. 중죄 인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 자체가 왕의 은덕이기 때문에 살아남은 자를 굶어죽이거나 혹은 병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 은 왕의 은덕에 손상을 입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당쟁이 치열해지면서 어떻게 해서든 정적(政敵)을 제거 하거나 핍박하려 했기 때문에 유배인을 의도적으로 굶기거나 병이 나도 치료조차 못하게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③서신 왕래 조선시대 문인학자들이 남긴 문집을 보면 유배지에서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그것은 비록 유배객 이라 하더라도 서신 왕래를 금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김귀주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역죄인이라 는 이유로 서신 왕래도 철저히 통제되었다. 10월에 가노(家奴) 천갑(千甲)이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관에서 쫓아 보냈다. 적소를 지키던 아전이 관에 달려가 죄 인 집안의 사내종이 내려왔다고 아뢰었다. 수령이 군인을 가노의 숙소에 보내어 함께 자도록 하고 다음날 그를 10 리 밖으로 쫓아냈다. 이때 이후로 가노들이 감히 편지를 가져오지 못하고 오직 옷과 식량만을 지니고 왔다. 수령이 좌수(座首)를 보내어 가져온 자루를 수색하도록 해서 편지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비로소 옷과 양식 들여보내는 것 을 허락했다.. 6. 韓国研究センター年報 vol.15.

(16) 유배죄인에 대한 규제와 감시. 위 일기는 1784년(정조 8) 10월의 일기인데 그 내용으로 미루어 이전에는 서신 교환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편지를 가지고 왔다는 이유로 가노를 쫓아 보냈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옷과 식량만을 가져왔는데 좌수가 이것들을 철저히 검사한 후 편지가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옷과 식량을 적소에 들여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나주로 이배된 초기의 일로, 당시 수령이었던 이정회는 김귀주에게 그다지 까다롭게 굴지 않았다. 때문에 순사 조시위로부터 낮은 근평(勤評)을 받은 후 다른 일이 겹쳐 파직되고 말았다. 신임 수령 오재문이 부임한 이후부터 서 신 왕래가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던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서신 왕래에 대해 수령이 이와 같이 민감하게 반응한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김귀주가 가족이나 친지들과 주고받는 편지 내에는 역모와 관련된 정보가 있다고 예 상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김귀주가 절해고도인 흑산도나 남쪽 땅 끝에 가까운 나주에 유배되어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서 울에 남아있는 노론벽파를 조종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서신 왕래를 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노론벽파를 조정하는 내용의 편지를 자신들의 손에 넣기만 하면 마침내 김귀주를 사형시킬 수 있다고 생각 했다. 이들이 옷 꿰맨 자리를 모두 뜯어보고 양식 담긴 자루를 샅샅이 살펴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수령이 얼마나 문제의 서신을 찾아내는 데 집착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일기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죄인이 거처하는 집 문 밖을 지나치던 상한(常漢)이 집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요사이 편지를 지니고 적소에 온 사 람이 있느냐?” 묻자 방수군이 이를 잡아 관에 일러바쳤다. 관에서 그를 심문하자 그는 “저는 장흥(長興)에 사는 최 모(崔某)로 저의 아비 만(萬)이 예전에 장흥에서 살다 지금은 한성의 이현 참판댁(泥峴 參判宅- 나를 가리킨다) 동 네에 삽니다. 일전에 일로 장흥에 내려왔는데 제가 마침 출타(出他)해서 만나지 못했고 귀가해서 보니 부친이 계시 지 않았습니다. 이웃에게 들으니 제 부친이 “내가 지금 팔금도(八金島)에 들어가면 상경이 조금 늦을 것이니 나주 적소(謫所)에 가서 서울 가는 인편이 있는 지 물어서 그 편에 편지를 부치러 가겠다.” 고 말했다 합니다. 제가 이 소 리를 듣고 부친을 보기 위해 달려서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고 대답했다. 우리 고을 수령이 이 소식을 듣고 마치 대단한 보물[奇貨]을 얻은 듯 즉시 교졸(校卒)을 보내어 최만(崔萬)과 그 이웃을 잡아다가 문을 걸어 잠그고 주위를 물리친 후 최만 부자를 엄히 매질하면서 사실을 캐물었다. 최만에게 형 벌을 가하는 정도가 더욱 심했다. 또 능장(稜杖)으로 마구 때려서 피부가 찢어지고 뼈가 부러졌으며 피가 샘처럼 솟 구쳐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 여러 차례였다. 그러나 가히 쓸 만한 정황을 얻지 못하자 여러 달 엄히 가두 고 수차례 형신(刑訊)을 하여 기(氣)가 다해서 다시 말할 기운조차 없었다. 수령이 어쩔 수 없어 비로소 풀어주자 그 아들은 아비를 가마니로 싸서 피눈물을 흘리면서 짊어지고 갔다. 그 후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사람들은 다들 반드 시 죽고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라 했다. 사건의 발단은 최만이라는 상한이 서울에 있는 자신의 집에 소식을 전하기 위해 김귀주의 적소에 들러 인편을 알아보 겠다고 한 말 한마디였다. 이 한마디가 결국 자신과 아들 및 이웃의 운명을 바꾸어 놓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음모를 찾아내겠다고 혈안이 된 수령에게는 귀가 번쩍 뜨이는 제보였다. 그래서 최만과 그의 아들 및 이 웃을 잡아다가 혹독하게 매질하며 문초했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올 음모는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불쑥 내뱉은 말 한마디가 결국 자신을 사경으로 이끌고 아들과 이웃을 곤경에 빠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④가족 친지 및 외부인 접견 수령은 서신 왕래를 금하면서 아울러 사람 접견도 금했다. 서신 왕래 자체가 결국 사람을 만나서 주고받는 것이기에 사람의 왕래를 금하면 자연히 서신 왕래도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만나서 대화를 하도록 하면 서신을 통한 의견 교환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주고받기 때문에 접견을 금지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韓国研究センター年報 vol.15. 7.

(17) 수령이 말하기를 “사람이 왕래하며 대화를 하는 것은 서찰을 주고받는 것보다 나쁘다. 너 또한 나라의 백성이니 나 라의 흉인(凶人)을 어찌 감히 두둔하고 막을 생각을 하지 않는가? 당연히 너의 죄를 엄히 다스려야 하나 잠시 그렇 게 하지 않는 것은 전일 친숙한 안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후에 만일 착실하게 막지 않으면 나는 마땅히 너를 죽일 것 이다.” 라고 했다. 또 “네가 나의 말로 죄인에게 분부해서 너의 죄악이 지극히 무거우나 지금 실오라기 같은 너의 목 숨이 보전되는 것은 나라의 은혜이다. 어찌 감히 집안사람들과 서신을 통하느냐? 이후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 것 이 옳다” 고 말했다 한다. 김귀주를 다시 흑산도로 돌아가게 하거나 아니면 여죄를 밝혀내어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던 오재문으로 서는 제일 먼저 보수주인을 잡아다 놓고 죄인 단속을 철저하게 하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으름장부터 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고만륜을 불렀는데 알고 보니 이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이전에 자신이 무안현감으로 재임한 적이 있는데 마침 친구 홍상성(洪相聖)이 나주로 유배되어 고만륜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오재문이 홍상성에게 자주 왕래하 면서 보수주인이었던 그와 알게 되었는데 기이한 운명으로 이젠 고을 수령과 보수주인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오재문 역시 유배당한 친구를 찾아가 자주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접견 금지가 관례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 다 잘 알았다. 그래서 더욱 억지를 부리고 강압적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우선 가족의 면회를 불허한 것부터 살펴보자. 김 귀주의 병환이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안 그의 두 아들은 1786년(정조 10) 2월 16일에 유배지로 달려왔다. 물론 큰 아들 김노충은 전년 7월에 한 차례 왔으나 김귀주를 상면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 후 사내종 천갑을 통해 약을 보냈지만 거 절당했기 때문에 두 형제가 급박하게 내려왔던 것이다. 16일 노충 형제가 와 외점(外店)에서 20여 일간 머물다가 들어와 만나보지 못하고 돌아갔다. 아들은 문밖에 도착해 곧바로 들어오려 했다. 내가 방금(防禁)이 심히 엄해서 보고하지 않고 곧바로 들어올 수 없으니 잠시 외점에 머물면 서 관가의 허락을 기다려 거취를 결정하자고 했다. 적소를 지키던 무리들이 즉시 달려가 관에 알렸는데 수령은 “순 영에 즉시 치보(馳報)해서 순사의 처분을 기다려 처리하겠다.” 고 대답했다. 며칠 되지 않아 수령이 잡혀가고 남평 수령이 겸관(兼官)이 되어 적소를 지키던 장교와 아전에게 전령을 내려 “내가 일찍이 금오랑(金吾郞)을 역임해서 왕법(王法)에 대해 조금 아는데 병들어도 약을 쓰지 못하고 친족과도 통하게 해서는 안 된다. 주인이 만일 죄인을 잘 대우하면 마땅히 불을 피우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이 지시를 벽에 써놓고 이에 맞추어 거행토록 하라.” 고 했다 한다. 오재문은 김귀주의 아들 형제가 내려왔다는 보고를 듣고 즉시 순영에 치보해서 순사의 처분에 따라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그것은 오재문이 면회 불허의 책임을 순사에게 떠넘기려는 의도에서 나온 계책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표류인(漂流 人) 처리를 잘못해서 순사가 함께 조정으로부터 추궁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10) 이를 독단적으로 처리하기 어려워 순영 에 보고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오재문은 표류인 처리를 잘못한 것으로 드러나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나주목사가 공석이 되자 인근 고을의 수령인 남평현감이 겸관으로 파견되었는데 그는 아들의 면회를 더욱 엄히 금지 했다. 그는 의금부 도사를 역임한 자신의 경력을 내세우며 김귀주와 같은 유배인에게는 병이 나도 약을 주지 못하며 또 친족과 소통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 당시 김귀주의 정적인 노론시파가 정국을 주도하는 시기이고 또 그를 극형 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관리들이 많은 형국이었기 때문에 순사나 수령이 김귀주 가족의 접견을 선뜻 허락해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잠시 겸관으로 파견된 인근 고을의 수령들은 책임 회피에만 급급했다. 10)표류인 처리 문제는 [승정원일기] 1786년(정조 10) 2월 13일, 3월 11일, 3월 17일 기사 참조. 당시의 순사는 이재학이다.. 8. 韓国研究センター年報 vol.15.

(18) 유배죄인에 대한 규제와 감시. 며칠 후 무안현감 이백형(李百亨)이 또 겸관이 되어 관아에 와서 머물렀다. 아이들이 순사의 처분이 오기를 몹시 기 다렸으나 4-5일이 지나도록 끝내 소식이 없었다. 대개 저들이 허락하기가 난처해 중간에서 애매하게 처리해 날짜 가 지나가도록 해서 스스로 떠나도록 하려는 계책이었다. 아이들이 겸관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관에 들어가 하소연 을 하려 했으나 방수이교 (防守吏校) 수십 명이 일시에 길을 막고 그 이유를 달려고 겸관에게 고하니 이백형이 그 경위를 묻지 않고 곧바로 보고한 장교 김원신(金元信)를 잡아들여 “이와 같은 거래를 네가 감히 어떻게 하느냐” 고 꾸짖고 곤장 8대를 사납게 내리쳤다. 이로부터 아이들이 감히 관아에 들어가 하소연을 할 생각도 못하고 또 들어와 서 보지도 못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에는 전라순사마저 표류인을 적절하게 처리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감봉처분을 받았다.11) 따라서 순사도 김귀주 아들의 접견을 허락하기 어려웠으며 겸관으로 파견된 인근 고을의 수령들도 어떤 처분을 내리기 곤란한 상황이었다. 결국 그들의 선택은 중간에서 우물쭈물 시간을 끌어서 스스로 면회를 포기하기 하도록 하는 것이었 다. 김귀주 아들이 직접 겸관을 만나 하소연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처럼 겸관들은 시간을 끌며 김귀주 아들이 스스로 면회를 포기하고 돌아가도록 유도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김 귀주 아들이 어떻게든 면회를 하려고 기다렸기 때문이다. 얼마 후 새로 부임한 나주목사 유한갈은 이들이 돌아갈 수밖에 없도록 하는 방법을 강구했다. 그것은 보수주인에게 이들의 식사를 제공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처였다. 아침저녁 식사를 위해 밥상을 들고날 때 서신을 몰래 주고받을 수 있다는 구차한 구실을 붙여 이를 못하게 저지했던 것이다. 수령이 보수주인을 불러 “죄인 아들의 아침저녁 식사는 어느 곳에서 하느냐” 고 물었다. 주인이 “소인의 집에서 접 대하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수령은 “아침저녁으로 밥상이 들고날 때 반드시 서신을 몰래 주고받을 우려가 있 으니 차후로는 절대로 식사를 해주지 마라” 고 지시했다. 이로부터 주인가에서 감히 접대하지 못했다. 다른 곳의 주 인도 그 말을 듣고 겁에 질려 집을 비우고 피해버렸다. 아이들이 배고픔이 심하여 지탱하지 못했다. 데리고 내려온 사내종 판동(判童)이 읍촌을 다니며 구걸해서 혹 밥을 구하고 혹 양식을 구해서 먹였다. 사내종 천갑 역시 때때로 땔감을 가지고 와서 음식을 만들었는데 이와 같이 하기를 10여 일에 이르러 내가 이 소 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전하기를 “이와 같이 하다가 부자가 함께 죽을까 염려된다. 속히 올라가거라.” 고 했다. 그러 나 아이들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또 박인서로 하여금 꾸짖어 말하기를 “부자가 함께 죽으면 도리가 아 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더욱 도리가 아니다.” 라 하니 아이들이 문밖에서 절하고 울면서 갔다. 길가 에서 이를 보던 사람뿐만 아니라 방수배(防守輩)도 여럿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보수주인에게 식사를 제공하지 못하도록 하니 다른 주인들도 미리 겁에 질려 집을 비우고 피해버렸다. 할 수 없이 사 내종들이 읍촌으로 밥을 구걸하러 다니거나 혹은 땔감을 얻어와 겨우 식사를 마련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오래 버틸 수 없었다. 김귀주가 이를 보다 못해 나서서 아들에게 돌아가라고 했지만 아들은 순순히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다시 수 행인 박인서를 통해 크게 꾸짖자 할 수 없이 아들은 적소 밖에서 절을 하고 울면서 되돌아갔다. 그러나 큰 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달려올 수밖에 없었다. 김귀주가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번에도 면회가 허락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아들의 입장에서는 임종해야 하기 때문에 달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윤7월 공(김귀주를 지칭한다-인용자 주)의 큰아들이 환후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달려왔으나 관에서 여러 11)[정조실록] 1786년(정조 10) 2월 12일 참조.. 韓国研究センター年報 vol.15. 9.

(19) 명의 장리(將吏)를 동원하여 나주 경계 밖으로 쫓아냈다. (이 이하는 박인서가 쓴 것이다.) 공의 큰아들 노충(魯忠) 씨가 지키던 사람을 불러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하게 부탁해서 얼굴이라도 보고 헤어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수령에 게 말했으나 수령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노충씨가 친히 호소하려 했으나 수령이 이를 듣고 진영(鎭營)에 급히 알 려 진영과 나주의 장리, 향소(鄕所), 관노(官奴) 등 수백 명을 동원하여 반절은 적소를 둘러싸고 나머지 반절은 노 충씨를 쫓아내도록 했다. 노충씨가 누워 일어나지 않자 향소 이운오(李運五)는 그의 목을 잡고 병교(兵校) 장맹손(張孟孫), 이방 조경설 (曺敬卨) 등은 양손을 잡고 그 나머지 이졸들은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 순식간에 성 밖으로 몰아냈다. 즉시 말에 태우고 채찍을 가해 쫓아냈다. 노충씨가 기절하여 땅에 엎어지고 의식이 아득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장교와 아 전의 무리들이 마상(馬上)에서 버티기 어려울지 알고 이에 한 사람이 고삐를 끌고 4-5인이 좌우에서 부축해서 밤 새 달려 장성 땅으로 쫓아냈다. 죽음에 임박하자 김귀주는 그동안 써오던 일록조차 작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갑자기 일록에서의 호칭이 ‘나’ 에서 ‘공’ 으로 변하게 되었다. 김귀주의 아들이 임종을 위해 달려왔지만 수령은 그를 강제로 내쫓았다. 임종했을 때 벌어질 수 있 는 불의의 사고를 미연에 막기 위해서 취한 조처였지만 가혹한 처사였다. 유배인을 접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들뿐만 아니라 집에서 심부름 온 가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는 이미 위에서 해석과 천갑이 옷과 식량을 가져왔다가 쫓겨난 사례를 살펴본 바 있다. 다만 이들이 내왕했을 경우, 혹시 김귀주 와 몰래 상통하지 않을까 염려해서 그들이 돌아갈 때까지 아주 철저하게 감시를 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의 기록을 통 해 알 수 있다. 매번 가노가 왕래하면 수령은 자신 몰래 연락하지 않을까 우려하여 문득 기찰장교를 파견하여 돌아가는 사람의 뒤 를 몰래 밟고, 적소를 지키고 순찰하는 등의 업무를 예전에 비해 매우 엄하게 했다. 유배인과 상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가족이나 가노뿐 아니었다. 유배지의 관속이나 주민과 도 서로 만나지 못하도록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도 살펴본 바 있다. 즉 김귀주가 흑산도에서 나주로 이배되 었을 때 당시 나주목사 이정회는 임무 수행도중 물에 빠져 죽은 1번 입도도사(入島都事) 정택윤(鄭宅潤)의 시신을 건지 기 위해 흑산도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가 나주의 관아로 돌아와 살펴보니 그간 적소를 지키는데 너무 많은 인원을 배 정했기 때문에 서둘러서 이를 감축시켰다. 아울러 고을의 관속과 민인들이 적소에 왕래하는 것을 일체 금지하도록 지시 했다. 적소를 지키는 사람들이 대부분 외지 특히 서울에서 오는 사람만 통제하고 같은 고을의 관속이나 민인은 서로 안 면이 있기 때문에 단속하지 않을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수령은 이처럼 이들의 왕래를 엄금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조선후기는 연망(聯網) 사회였다. 김귀주와 같이 중앙정부의 고위 관료를 지낸 인물은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이 각 지 역, 각 계층의 구성원들과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정보와 선물 등을 주고받는 연망을 가지고 있었다. 즉 나주 고을의 향 리나 군관 및 일반 백성과도 대대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었다. [금성일록]에는 비록 김귀주의 사례 는 아니지만 중앙관리와 지방관속 사이에 맺어진 연망 관계를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실려 있다. 즉 당시 순사인 조시 위(趙時偉)와 나주의 이방 조경달(曺敬達)과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나주의 이방 조경달은 조가(趙家)의 사인(私人)이다. 조시만(趙時晩)과 조시술(趙時述)이 이전에 나주 목사가 되 었을 때 연이어 신임을 받아 조씨의 사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다년간 이방의 자리에 있는 등 중국의 창씨(倉氏)와 고씨(庫氏)처럼 대대로 요직을 차지했다. 후에 오재문이 목사가 되자 순찰사 조시위가 얼굴을 마주 대하고 부탁해. 10. 韓国研究センター年報 vol.15.

(20) 유배죄인에 대한 규제와 감시. 서 이방을 연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주의 아전 출신인 조경달은 조시만, 조시술, 조시위 등 풍양조씨 출신의 중앙관리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 다. 이들이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은 조시만과 조시술이 나주목사로 부임했을 때, 조경달이 그들의 신임을 받는 것이 계기가 되었다. 또 그 이후 계속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서 결국 ‘사인’ 이라 칭해지기까지 했다. 이러한 관계를 ‘단골(丹骨)’ 관계라 불렀는데 당시 전라순사였던 조시위가 나주목사로 새로 부임하는 오재문에게 조경달을 부탁해서 이 방의 자리를 연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관계는 관속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과도 맺어질 수 있었다. 그러한 사례가 바로 수령 오재문과 김귀주의 보수주 인인 고만륜의 관계였다. 오재문은 고만륜과 직접적인 인연은 없었지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오재문의 친구인 홍상성 이 나주로 유배당했을 때 고만륜이 그의 보수주인이었기 때문에 알게 되었으며 이러한 인연이 지속적으로 대를 거듭해 서 맺어지면서 일종의 연망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대부분의 중앙 관리들은 자신이나 자신의 친척 또는 그들의 조상이 수령으로 재임했거나 혹은 유배당 한 것을 계기로 지방 각 지역의 사족이나 아전 및 일반 백성들과 여러 형태의 연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김귀주도 나주의 관속이나 민인 사이에 이러한 연망을 가지고 있은 사람이 있을 수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이 적소에 출입하지 못하 도록 엄격히 통제했던 것이다. 나주 인근 고을에 재임하던 수령들 역시 통제의 대상이었다. 김귀주가 오랫동안 중앙 관리를 지냈기 때문에 관리생활 을 하는 동안 다양한 부서에서 여러 형태의 연망을 구성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 나주 주위에 있는 고을의 수령 중에는 김귀주와 여러 형태의 연망을 구성했던 인물들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출입을 각별하게 통제했다. 하루는 이방이 몰래 보수주인을 불러 “순영의 신칙(申飭)이 바야흐로 매우 엄하니 적소의 일거수일투족을 네가 만 약 조금이라도 숨긴다면 너는 순사또(巡使道)의 손에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다. 만일 능히 하나도 감추지 않고 사 실대로 보고한다면 사또가 너를 보상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어서 죄인이 적소로 온 후에 고을의 수 령들이 선물을 보내거나 안부를 물은 일이 있는지와 본가의 사람이 누가 내려온 일이 있는지, 타인으로 누가 방문 한 적이 있는지 등을 물었다. 주인이 “적소의 양식은 죄인이 올 때 약간 돈으로 가지고 왔을 뿐이며 각 고을에서 먹 을 것을 보내준 적이 전혀 없고 본댁에서 온 사람도 없으며 다른 사람도 역시 방문한 자가 없다. 만일 이러한 일이 있다면 어찌 감히 속이겠는가?” 라고 대답했다 한다. 위의 기록에 나오는 이방은 조경달인데 그가 보수주인에게 적소와 왕래하는 사람으로 인근 고을 수령뿐만 본가와 타 인까지 거론하며 왕래와 선물 수수 여부를 물었지만 주대상은 수령이었다. 식량을 비롯하여 유배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넉넉하게 보내줄 수 있는 사람들은 인근 고을의 수령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방은 순사의 명령을 들먹거리며 보 수주인을 엄하게 추궁했던 것이다. 만일 김귀주가 나주 인근 고을의 수령들과 소통해서 자신들이 부당하게 탄압하고 있 는 적소의 여러 현황들을 서울에 있는 같은 당파에게 전달되고 이것이 널리 퍼질 경우에는 사건이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광주목사 정일환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광주목사 정일환(鄭日煥, 字: 兼之)은 남쪽 지방의 선비로 이름을 얻은 자이다. 그가 나의 적소에 가까이 있는 것을 꺼려서 순사가 그를 쫓아내려 흠을 잡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치적이 도내에서 제일이어서 감히 손을 대 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고을 수령이 순영을 왕래하는 길에 광주에 들어갔다. 광주목사가 나와 맞이해서 서로 이야 기를 하다 “나주의 유배객이 아직도 있는지?” 를 물었다. 우리 고을 수령이 아직도 있다고 대답하고 인하여 그 말을. 韓国研究センター年報 vol.15. 11.

(21) 순사에게 가서 일러바쳤다. 그때 소론(少論) 수령 5-6명이 순영에 모여서 순사와 더불어 “이는 커다란 망발이다.” 라고 말했는데 죄인을 유배객이라 칭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고을 수령이 사람을 물리치고 혼자서 순사를 보고 광주 목사를 헐뜯기에 여념이 없었고 순사는 그의 이야기를 모두 받아들였다. 6월의 고과(考課)에서 그를 최하에 두었다. 대개 우리 고을 수령이 어찰을 모욕한 이후 그에 대한 말을 극히 꺼려서 광주목사가 가까이 있으면서 적소의 소문 을 전해 듣고 한성 안에 퍼뜨리지 않을까 두려워해서 순사를 종용해서 그를 제거하려 했다. 위의 기록만 가지고 정일환이 김귀주에게 우호적이었는지 아니면 적대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김귀주를 어 떻게 해서든 절해고도로 위리안치시키거나 사사(賜死)하려는 당시의 전라순사나 그를 따르는 수령들과는 분명히 입장 이 달랐다. 더군다나 그가 나주에서 가까운 광주목의 수령이었기 때문에 순사의 입장에서는 매우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 래서 순사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를 다른 자리로 보내고 싶었지만 근무 성적이 도내에서 제일이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나주목사 오재문이 순영을 왕래하면서 일부러 광주에 들러 그의 약점을 캐어 가지고 왔다. 죄인을 유배객 으로 불렀다는 것 등이 그것이었다. 오재문과 함께 있었던 몇몇 수령들이 망발이라며 정일환을 비난하고 또 오재문이 이 외에도 그의 약점이 될 만한 것들을 상세히 알려주자 순사는 이에 근거해서 정일환의 근무성적을 최하로 평가했다. 이에 따라 정일환이 파면되거나 다른 자리로 교체되었음은 말할 것이 없다. 순찰사와 나주목사가 정일환을 꺼린 이유는 만일 그를 통해 김귀주를 부당하게 탄압하는 사실이 서울에 알려질까 두 려워했기 때문이다. 비록 김귀주와 함께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주동자들이 당시에 대부분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해 정치적으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 하더라도 김귀주의 뒤에는 정순왕후가 있었다. 따라서 김귀주에 대한 부당한 탄압 사실이 알려진 경우, 사건이 어느 쪽으로 진행될 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러한 소식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순사와 나주목사는 안간힘을 썼다. ⑤약품과 치료 오랜 유배생활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해서 자주 발병했다. 더군다나 아래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운동조차 못하게 감시 를 하면 자연히 병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유배인들은 본가로부터 약품을 조달해 복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랫 동안 흑산도에 유배되었다가 나주로 이배된 김귀주는 이미 병이 깊었다. 그래서 그의 본가에서 약을 보내곤 했다. 병오년 2월 14일 사내종 천갑(千甲)이 약을 가지고 내려왔다 관에 체포되어 갇혔다. 천갑이 문 밖에 도착하자 적소 를 지키던 무리들이 즉각 체포하고 급히 관에 보고했다. 수령은 장교와 아전이 함께 가서 약물을 압수하고 사내종 을 잡아 가두되 적소가 알지 못하도록 은밀히 하라고 분부했다. 본가에서 조달하는 약을 이와 같이 차단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현지에서 구입해 사용해야만 했다. 병으로 괴로워하는 김귀주를 보다 못해 그의 곁에 있던 박인서가 약을 얻으러 약국으로 달려갔다. 그랬더니 장교가 어떻게 알았는지 뒤쫓아 와서 박인서를 끌고 갔는데 후에 이 소식을 들은 수령은 박인서의 외출을 막지 못했다고 방수군들을 처벌했다. 2월 사이에 나의 병이 중해져서 박인서가 약을 지으러 약국에 갔는데 집 지키던 장교[防守將校]가 이를 어떻게 알 고 군인을 이끌고 가서 잡아왔다. 박군이 장차 관아의 문에 들어가서 수령에게 말하려고 하자 집 지키던 무리[防守 輩]들이 이를 막았다. 그래서 이러한 사연을 관에 고발했더니 도리어 우리 수령은 방색(防塞)을 엄하게 하지 않았다 며 이교(吏校)들에게 각각 사나운 곤장 7대씩을 때렸다.. 12. 韓国研究センター年報 vol.15.

(22) 유배죄인에 대한 규제와 감시. 병자가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을 쓸 수 없다면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 수주인이 직접 약을 구해오기도 했다. 내가 병중인데도 약을 쓸 수 없으니 주인이 이를 민망하게 여겨 사사로이 약국에서 약을 구해 가져왔다. 수령이 이 소식을 듣고 그 길을 막으려 했으나 핑계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약국이 죄인에게 약값을 받았는지 아니면 외상으 로 주었는지” 를 물었다. 하리(下吏)가 “외상으로 주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수령은 “외상으로 지급했으면 약국 사람과 죄인이 친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 했다. 그래서 이후로는 약국에서 약을 지급하지 않았다. 수령은 보수주인이 몰래 약을 구해다 준 것이 마뜩치 않았으나 그렇다고 드러내놓고 비난할 수도 없었다. 궁리 끝에 약을 외상으로 준 약국 주인을 은근히 겁박하는 꾀를 내었다. 수령은 약국 주인이 약을 외상으로 준 것을 보면 죄인과 약 국 주인이 친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겁박했다. 비록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 약국 주인으로서는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어 이후로 김귀주에게 약을 줄 수 없었다. 수령이 김귀주의 병을 치료해 준 의원을 잡아다 중형에 처하고 여러 달 가두어 결국 그가 말라 죽는 일도 벌여졌다. 내가 섬에 있을 때 여러 차례 중병을 겪었는데 문득 무안(務安)의 의원(醫員) 정지일(丁志一)을 불러다 치료를 받 았다. 신축년에 박우원(朴祐源)이 전라순사가 되었는데 병교(兵校)를 보내어 섬에 들어와 염탐을 한 후 무안에 비 밀 공문[秘關]을 보내어 정지일을 잡아가두게 했다. 그때 박인서는 영광에 갇혀있었고 나황(羅璜)은 나주에 갇혀있 었다. 죄인이 유배 중에 잡인(雜人)과 교통한다며 왕에게 비밀리 아뢰어 엄신(嚴訊)을 요청했으나 왕이 이에 대응 하지 않자 일이 유야무야 되었다. 내가 유배지를 옮긴 후에 다시 안질을 크게 앓아 눈에 백태가 끼었는데 무안에서 적소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아 주 인이 전임 수령에게 아뢰지 않고 정생(丁生)을 불러 여러 날 동안 머물러 치료하도록 한 후 돌려보냈다. 신임 수령 이 부임한 후 그 사실을 알고 무안 수령에게 편지를 보내어 호강(豪强)하다는 이유로 정생을 또 잡아 가두어 중형을 가하고 가두어 두기를 여러 달 하자 마침내 수척(瘦瘠)해져 죽었다. 1781년(정조 5)에 전라순사가 된 박우원은 김귀주가 유배되어 있던 흑산도에 병교를 파견해서 무안의 의원 정지일로 부터 김귀주가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무안현에 비밀리 공문을 보내어 정지일을 잡아가두도록 지시하 는 한편 왕에게 김귀주 등을 엄신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왕이 이에 대해 답변을 하지 않자 유야무야 되 고 정지일 등도 풀려났다. 김귀주나 나주로 이배된 후 안질을 앓아 눈에 백태가 끼자 다시 정지일을 불러 치료를 받았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안 나주목사 오재문은 무안 수령에게 편지를 보내 정지일을 잡아가두고 중형을 가하라고 요구해서 결국 정지일이 옥사 하고 말았다. 유배인의 병을 치료해 준 의원을 갖가지 구실을 다붙여 잡아가두어 결국 죽음에 이르도록 한 것은 지나친 처사였다. 그러나 오재문은 오로지 김귀주를 괴롭히거나 죽이기 위해 나주목사로 자원한 인물이기 때문에 어떠한 비난 도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3 . 유배인에 대한 감시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배인에 대한 규제를 상당히 다양히, 그리고 매우 엄격하게 하고도 또 그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제 감시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韓国研究センター年報 vol.15. 13.

(23) (1) 외출 유배형은 원칙적으로 주거를 제한하는 형벌이다. 더군다나 김귀주와 같은 유배인은 아예 외출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러나 수령 몰래 외출하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오재문은 부임하자마자 그 이튿날 보수주인 고만륜을 불러 김귀주가 언제 어디로 외출했는지 등을 에둘러 심문했다. 신임 수령이 고만륜을 불러 “죄인이 문 밖으로 나간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은가” 라고 묻자 만륜이 “평소에 죄인(김귀주를 지칭-인용자 주)이 질환이 있어서 걷지 못해 집[軒]의 난간 옆에 측간을 설치하고 측간에 갈 때에는 그의 종인(從人) 서너 명이 좌우에서 팔을 부축하며 용변을 마쳤을 때 역시 그와 같이 하니 비록 문 밖에 나가고자 해도 그 형세가 어렵다.” 고 대답했다. 수령의 유도성 질문에 고만륜은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 잘라서 말했다. 그것은 김귀주가 다리 질환으로 거동이 불편해 서 화장실을 갈 때에도 좌우에서 팔을 부축해야 할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다리가 이와 같이 불편한 상태에서 외출은 꿈 도 꾸지 못할 상황이라는 것이 고만륜의 대답이었다. 더군다나 김귀주의 경우에는 집 안팎에서 방수군이 상시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몰래 외출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2) 운동 유배인들이 주거 제한으로 적소에 갇혀 있는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운동을 해야 건강이 유지되었다. 그래서 운동을 얼 마나 하느냐는 유배자의 건강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다. 오재문은 정순왕후가 보낸 어찰을 두 차례나 돌려보내도록 유 도했다. 첫 번째 어찰은 1785년(정조 9) 4월에 김귀주의 가노가 가져왔기 때문에 사찰(私札)이 아닌가 의심하다가 여러 관속들이 감시하도록 둘러 세워 놓은 상태에서 열람하도록 허락했다. 그러자 김귀주가 어찰이 가노와 함께 옥에 갇혀 있 었고 또 여러 관속의 감시 아래에서 열람하는 것은 어찰을 욕보이는 것이라 생각해서 보지 않고 돌려보냈다. 같은 해 11 월, 왕대비전의 궁예(宮隷)가 두 번째 어찰이 가지고 왔으나 김귀주는 같은 이유로 이를 돌려보냈다. 그러자 수령은 어 찰을 돌려보낼 때의 자세한 상황을 알고 싶어 당시 이를 살펴본 아전을 호출했다. 어느 날 수령이 저녁에 다시 그날의 상황을 지켜본 담당 아전[防守吏]을 불러들여 어찰을 돌려보낼 때의 이야기를 자세히 묻고 겨울옷을 입고 있는지 여부와 하루 식사량이 어느 정도인지, 얼굴에 병색(病色)이 있는지, 마당에서 얼 마나 걷지 등을 물었다. 아전이 “병중에 어떻게 마당에 내려가 걸어 다닐 수 있겠느냐?” 고 대답했다. 좌수가 “이전 에 섬에 있을 때 측간을 갈 때가 아니면 마당에 내려가지 않았으며 이곳에 도착해서도 평상시에 방안에 있고 하늘 도 쳐다보지 않고 마루 곁에 측간을 설치했다” 고 말했다. 수령이 “위인이 본디 까다로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고 했다. 수령이 어찰을 돌려보내던 상황이 궁금한 듯 여러 가지 것들을 질문했으나 그가 담당 아전을 불러들인 뜻은 오히려 다 른 데에 있었다. 정순왕후가 보낸 간찰을 갖은 이유를 다 대어 욕을 보였으니 그 후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령은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아전을 불러 어찰을 돌려보낼 때의 여러 가지 상황을 묻고 김귀 주의 근황에 대해서도 역시 문의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마당에서 얼마나 걸어 다니는 지 등을 물어 그가 어떤 운동을 얼 마나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14. 韓国研究センター年報 vol.15.

参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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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追記〕  校正の段階で、山﨑俊恵「刑事訴訟法判例研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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