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정의 51세 이전의 생애에 대해서는 주요 사항만 아래의 표로 정리하고, 51세 이후의 삶에 대해서만 문장으로 기술하기로 한다.
2) 王世貞 <归太仆赞序> : 「不事雕飾而自有風味, 超然當名家矣.」(《弇州續稿》巻150), 黃淳耀 <徐宗題制義序>:「弇 州晩年頗好唐宋而不薄歸熙父, 則亦自公發其端.」(《陶菴全集》巻8)
3) 孫鑛: 字 文融, 號 月峯. 萬厯 甲戌 進士. 官은 南京兵部尙까지 지냈다.
4) 孫鑛 <與余君房論文書>:「自空同倡爲盛唐漢魏之說, 大歴以下悉捐棄. 天下靡然從之. 此最是正路無可議者. 然天下事 但入正路即難, 即作人亦如此. 久之覺束縛不堪, 則逃而之初唐. 已又進之六朝. 在嘉靖中最盛. 然此路實隘而不弘近, 遂 有舍去近體, 但祖漢魏之論. 然有言之者鮮, 行之者則以此一路枯淡, 且說物情不盡耳. 近十餘年以來, 遂開亂道一派, 昨 某某皆此派也. 然此派亦有二支: 一長吉、玉川, 一子瞻、魯直. 某近李、盧, 某近蘇、黃. 然某猶有可喜, 以其近於自 然. 某則太矯揉耳. 文派至亂道, 則極不可返, 邇來作人亦多此派. 此實闗係世道, 良足歎慨. 然弇州晩年諸作, 實已透漏 亂道端倪. 蓋氣數人情至此不得不然, 亦非二三人之過也.」(《孫月峰集》卷九)
隆慶 3년
隆慶 4년 湖州
44세, 5월~6월 杭州、嘉州、․湖州 三府의 장마와 홍수, 기근 에 효과적으로 대처함.
45세, 정월 山西按察司按察使(正三品)로 승진함, 10월에 모친 사망으로 귀향
隆慶 5년 太倉 모친 喪中
萬曆 원년 武昌 48세, 湖廣按察使를 제수 받음.
萬曆 2년 隕陽
49세, 9월, 右副都御史(正三品) 로 승진.
萬曆 3년 江陵
50세, 御使(正三品), 3-4月 張居正의 처남이 포함된 강릉 시 위 생원들 처벌, 5月 <地震疏>를 올려 張居正을 비방. 180권 의 《四部稿》편집
萬曆 4년 51세, 《四部稿》판각
위의 표를 보면 왕세정은 가정 26년부터 35년까지 10년 동안 중앙직으로 북경에서 근무하고, 양계성과의 친분 및 嚴崇에 대한 저항으로 지방직으로 전출되었다가 3년 후 그 관직마저 사직 하고 낙향하여 15년 동안 고향에서 지내다 융경 2년 43세에 재기용되어 8년에 걸쳐 6년 동안 지방직으로 타향을 돌아다니다 귀향한 것이다.
이제 그 이후의 생애를 보기로 하자. 萬曆 4년 가을에 王世貞은 南京 大理寺卿 (正三品) 을 제수받았으나, 그 직책에 부임하기도 전에 南京給事中 楊節의 탄핵을 받았다. 神宗은 이 탄핵 을 받아들여 발령을 취소하고 다른 직책으로 부를 때까지 대기하라 하였다.《明史》<王世貞 傳>에 의하면 神宗은 張居正 때문에 楊節의 탄핵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張居正은 정권을 잡자 王世貞과 進士 同年인 관계로 그를 자기 사람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나, 王世貞이 달가워하 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萬曆 3년 荊襄地震 當時에 <地震疏>를 올려 그를 불편하게 만들고 또 妻男件도 유감으로 느끼고 있던 차에 楊節의 탄핵을 접하자 즉각 그를 파면하도록 한 것이라 고 한다.
王世貞은 고향으로 돌아간 뒤 弇山園6)에 묻혀 三萬餘卷의 藏書를 읽고 정리하며 때때로 찾 아오는 名士들과의 교류로 소일했다. 이 무렵 그의 명성은 은퇴 전보다 더욱 더 높아졌다.
萬曆 6년 10월에 王世貞은 應天府尹에 부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부임길에 南京의 御史臺 에서 자기를 탄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뱃길을 돌려 고향으로 돌아갔다.
萬曆 7년 (己卯, 서기 1579년, 王世貞 54세) 南京 給事中 王良心․福建都御史 王許之 등이 연 이어 王世貞을 사치스럽고 더럽고 제멋대로라고 탄핵하는 上訴文을 올렸고, 神宗은 이를 받아 들여 王世貞에게 歸鄕하여 다음 발령을 대기하라고 하였다.
이 무렵에 王世貞은 王錫爵과 왕래하며 그의 딸 王燾貞7)을 스승으로 모시고 道敎를 신봉하 였다.
萬曆 9년 (辛巳, 서기 1581년, 王世貞 56세) 여름에 給事中 牛維垣과 御史 孫承南이 曇陽子
5) 李攀龍, 謝榛,吳維嶽․王宗沐․袁福徵 등등
6)隆慶 6년부터 王世貞은 小祇林에 樓閣을 더 짓고 나무를 더 심고 바위 등으로 더 장식하여, 그곳은 東吳에서 제일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그는 《山海經》에 나오는 ‘弇山園’이라는 명칭을 취하여 ‘小祇林’을 ‘弇山園’ 이라고 개칭했 다.
7)王燾貞 : 王錫爵의 딸로 號는 曇陽子이다. 그녀는 嘉靖 37년 (서기 1558년) 생인데, 다섯 살 때부터 觀音大士像과 비슷한 모양으로 종이를 오려 벽에 붙여놓고 그것을 향해 절을 하고 아침마다 이불 속에서 콩알을 만지며 아미타 불을 100여 마디 외운 다음 일어나곤 했다고 하는데, 후에 성장하여 朱眞君 (道敎에서 造物主를 指稱하는 말) 을 섬기며 道經이라는 禪語를 써내곤 했다고 한다. 王世貞은 萬曆 8년 4월부터 당시 22세인 그녀를 스승으로 섬기며 王錫爵과 함께 ‘曇陽館’ 을 지어주는 등 열성적 信徒가 되었다. 江西로부터 入覲하였다가 잠시 고향에 들렸던 그 의 동생 王世懋도 曇陽子의 제자가 되었다. 曇陽子는 이 해 가을 9월 9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王世貞은 그녀의 사후에 王錫爵의 부탁을 받고 <曇陽大師傳>(《弇州山人續稿》卷 78) 을 썼다.
件으로 王錫爵과 王世貞 兄弟를 誣妄하다고 탄핵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의 동생 世懋도 사직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弇山園에서 半里 정도의 거리에 있는 城의 서남쪽에 ‘澹圃’ 라는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萬曆 10년 6월에 張居正이 죽었고 가을에 王世貞의 아들 士騏가 鄕試에 壯元及第하였다.
萬曆 11년 王世貞은 五子篇․二友篇․末五子篇 등을 다시 썼다.
萬曆 12년 正月에 王世貞은 應天府尹으로 起用되었다. 2월에는 南京刑部右侍郞으로 승진되 었으나 그는 사직을 원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귀향했다.
萬曆 15년 (丁亥, 서기 1578년, 王世貞 62세) 10월에 王世貞은 南京 兵部右侍郞 발령을 받 고 辭免을 원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듬 해 3월에 부임하였다. 그의 동생 世懋는 萬曆 15년에 병으로 南京 太常寺卿을 사퇴하고 귀향하였다가 萬曆 16년 6월에 죽었다.
王世貞은 동생이 죽은 직후와 7월에 사직을 간청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萬曆 16년에 王世貞은 <爲光復孔廟舊典訂定從祀諸儒以昭聖化以慰衆心疏>8) 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그는 嘉靖 이래 孔廟에서 佾舞와 籩豆(祭器)를 줄인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宰我와 子貢을 十哲의 대열에서 빼내어 兩廡로 내려앉히고 대신 有若과 南宮으로 충원해야 하며, 范仲淹도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이 해에는 南京 兵部尙書 吳文華가 南京의 九卿을 이끌고 司禮監 張鯨9)을 처벌하기를 청 원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 상소문을 王世貞이 썼다.10)
萬曆 17년 (己丑, 서기 1589년, 王世貞 64세) 3월에 神宗에게 親政을 권유하고 張鯨 등을 더 이상 重用해서는 안 된다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 상소문도 역시 王世貞이 썼다.11) 王世貞 은 이 해 6월 4일에 三品이 考滿되어 都城을 향해 출발하였으나 淮安에 도착했을 때 南京 刑 部尙書로 발령이 났다는 명령을 듣고 길을 돌려 귀향하여 형부상서로 취임했다. 9월 24일에 南京․廣西道監察御史 黃仁榮은 王世貞의 임기만료(考滿)에 대한 보고가 잘못되었다며 王世貞을 탄핵했다12). 조정에서는 王世貞이 前職在任時 過誤가 없으므로 大計13)에서 탄핵을 받은 것과 동일시 할 수는 없다는 해석을 내리고 王世貞으로 하여금 계속 직무를 계속하도록 하였다. 그 러나 王世貞은 隱退하고 싶은 생각이 굳어져 辭退를 청원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 지 않았다.
萬曆 18년 (庚寅, 서기 1590년, 王世貞 65세) 정월에 王世貞은 다시 辭職願을 올렸다. 3월 15일에 허락하는 공문이 내려오자 그는 그 다음 날 즉시 고향을 향해 출발하여 4월에 집에 도 착했다. 집에 도착한 후 그는 문을 닫아 걸고 손님을 거절하고 詩文도 별로 짓지 않으며 지내 다가 동짓날에 僧侶 한 사람과 偈에 관해서 談笑하다가 世上을 떴다.
그의 著書로는 《弇州山人四部稿》와《弇州山人續稿》및 《弇山堂別集》․《嘉靖以來首輔傳》․
《觚不觚論》․《讀書後》․《輯王氏書晝苑》등이 있다.
위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보면 만력 4년(51세)에 은퇴한 왕세정은 장거정이 죽을 때까지 기용되지 못하다가 장거정 사후 만력 12년(59세)에 잠시 기용되었으나, 이미 도교를 신봉하기
8)《弇州山人續稿》卷 143
9)張鯨 : 太監 張宏의 名下로서 同廠을 관장했다. 그는 성격이 굳고 과단성이 있어서 神宗은 그를 편애하였다. 그는 뇌물을 많이 받는 등 권력을 남용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萬曆 16년에 집중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탄핵을 받았다.
10)《弇州山人續稿》卷 143, <會劾司禮張鯨疏>
11)《弇州山人續稿》卷 143, <披誠獻言仰裨聖德聖政疏>
12) 王世貞은 副都御史․大理卿․應天尹․侍郞 등의 正三品을 역임했으므로 前俸을 합하면 기간이 충족되었기 때문에 刑 部尙書로 승진되었던 것인데, 黃仁榮은 탄핵을 받은 적이 있으므로 그의 前俸은 합산하면 안 된다는 논리로 그를 탄핵했다고 한다.
13) 明代에 3년에 한 번씩 地方官에 대하여 행하는 考察로 京官에 대한 京察에 상응하는 말.
시작한지라 벼슬 생활에 의미를 못 느껴 곧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살다가 만력 15년(62 세)부터 만력 18년(65세)까지 마지막 4년은 또 충실한 유가적 관원의 자세로 되돌아가 司禮監 환관 張鯨을 퇴출시키기 위해 정열적으로 활동한 모습을 보여 주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