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2월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 정부는 미국에 한 쌍의 팬더를 선물하였 다. 1949년에 중국이 탄생한 이후 팬더를 선물 받은 나라는 소련과 북한뿐이었던 탓에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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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에 대한 선물은 중국의 대외전략의 전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같은 해 9월 일본 에 팬더를 선물한 행위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193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팬더가 인기를 끌고 있었으며 1949년 이 후도 각 동물원이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1972년의 미중화해를 계기로 약 20년 만에 팬더를 맞이하게 되었던데 반해 일본은 그러한 팬더에 대한 역사적 문맥을 가지고 있 지 않다. 그로 인해 미국의 입장에서는 과거 1941년에 ‘우호의 증거’로 선물 받은 팬더의
‘부재’는 중국과의 ‘비우호’를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1972년의 팬더 기증이 미중의 ‘우호’를 연출한다는 점은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웠는데 반해 일본의 입장에서 팬더가 ‘우호의 상징’이 라는 점은 위에서 서술한 팬더가 일반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도 드러나듯이 반드 시 자명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에 아래에서는 일본에서 최종적으로 어떻게 팬더가 ‘우호 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는지를 고찰해 보겠다.
팬더에 대한 관심이 낮았던 일본에서 구체적으로 유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한 때는
1960년대 후반부터인 듯하다. 중국 외교부가 공개한 문서를 검토해 보면 우에노동물원은
1954년 2월, 중일 및 일소 무역을 담당하던 도쿄 시나가와의 ‘후루타카산업(古鷹産業)’에 중개를 의뢰하여 중국에 동물 교환을 요청했으나 당시 우에노동물원이 중국에 요구한 동물 은 팬더가 아니었다.(중국 외교부 공문서관, 105-00271-02(1)) 하지만 1954년이라는 시기 는 베이징동물원조차 아직 팬더의 사육을 시작하지 않았던 때로 설령 우에노동물원의 동물 전문가 중에 팬더에 관심을 가진 자가 있었다 치더라도 중국에 팬더의 교환을 요구하는 것 은 현실적인 선택지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 일본의 동물원은 명백히 팬더 유치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1966년, 우에노동물원의 3대 원장에 취임한 今 泉英一는 원장 취임사에서 “세계에서도 소련과 중국의 동물원만 보유 중인 자이언트팬더
(흑백얼룩곰)를 반드시 중국과의 협상을 통해 우에노로 데려오고 싶다”라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요미우리신문」, 1966년 4월 2일)
그로부터 3년 후인 1969년에는 요코하마의 ‘게이힌조수무역(京浜鳥獣貿易)’ 河野 通敬 사장이라는 인물이 팬더를 일본에 선물해 주도록 중국 정부와 협상을 벌이고 있다. 河野 사장은 1969년 2월, ‘중국의 동물 연구와 동물원 견학’이라는 명목 아래 일본과 아직 국교 가 없던 중국에 홀로 도항허가를 받아낸다. 河野 사장은 광저우(廣州), 난징, 베이징의 동 물원을 돌면서 각 동물원에서 팬더를 보았다. 이어서 河野 사장은 당시 베이징에서 ‘중일문 화교류협회’의 상임이사를 맡고 있던 사이온지 긴카즈(西園寺公一)의 소개로 중국 외교부 의 왕샤오윈(王暁雲) 국장을 만나 “일본의 아이들에게도 부디 중국의 팬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대해 왕샤오윈 국장은 “현재의 사토 정권 하에서는 무리 다”며 河野의 요청을 거절하였다고 한다.(「요미우리신문」, 1972년 11월 15일)
일본에서 팬더의 인지도를 상승시킨 천황의 유럽 순방 직후인 1971년 10월 말부터 11 월 상순에 걸쳐 미노베 료키치(美濃部亮吉) 도쿄 도지사는 북한 및 중국을 방문하였다. 우 에노동물원의 나카가와 시로(中川志郎) 사육과장이 1971년 1월 11일자 「요미우리신문」
의 취재에 답한 바에 따르면 이 방중 때 미노베 도지사는 팬더의 양도를 중국 측에 요청했
으나 ‘개체수가 적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고 한다. 당시의 미노베 도지사의 중국 방문은
사토 에이사쿠 정권의 내각관방장관이었던 자민당의 호리 시게루(保利茂) 의원이 중일국교 정상화를 타진하기 위한 서한을 미노베 도지사에게 부탁한 이른바 ‘호리서한’ 사건으로 밝 혀졌다. 저우언라이(周恩來)와 회담을 가진 미노베 도지사는 당시 국교정상화는 ‘사토 총리 로는 무리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훗날 회상하고 있다.(지지통신사 정치부편, 1972: 77-78 쪽)
그 후 1972년 1월 10일에는 베이징동물원을 견학한 사회당의 도이 다카코(土井 多賀 子) 중의원도 팬더를 “중일우호의 사절로 일본에 양도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베이징동물원 측은 “앞으로 이야기의 진전에 따라 다르다”라며 바라던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요미우 리신문」, 1971년 1월 11일)
이러한 경위를 고려해 볼 때 일본의 언론 및 정계는 ‘팬더 유치의 실패’를 점차 ‘사토 정권 하의 일본과는 국교정상화에 응하지 않겠다는 중국 측의 의사 표명’을 드러내는 구체 적인 증거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닉슨의 방중으로 미국에 팬더가 기증 된 직후인 1972년 3월 6일자 「요미우리신문」 석간에는 ‘팬더, 미국에/ 어린이- 일본에는 오지 않는 거야?/ 엄마- 사토 총리가 시원치 않아서 그렇단다’는 독자투고란의 만평도 실 렸다. 당시 ‘중국정부가 사토정권을 거절하고 있다’는 사태는 일본의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도 ‘팬더의 부재’라는 모습으로 상징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던 셈이다.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팬더가 1972년에 최초로 일본에 들어오기까지 일본사회는
‘항일전쟁의 상징’이라는 측면을 전혀 주목하지 않은 채 팬더를 받아들여 왔다. 다시 말해 훗날 팬더의 ‘광고탑’ 역할을 하는 TV 탤런트 구로야나기 데쓰코는 우연히도 팬더가 ‘반 일’ 선전에 이용되기 이전부터 팬더의 팬이었다. 1958년의 애니메이션 「백사전」에 팬더 가 등장한 이유는 아시아 시장에 팔기 위한 외화 획득이라는 목적 때문이었다. 1970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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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한 여성지 『an-an』이 잡지이름을 모스크바의 팬더에서 따 온 이유는 ‘유행’이라는 관점에서였다. 그리고 일본에 팬더 붐을 일으킨 계기가 된 1971년의 천황영국방문에서 팬 더는 오히려 ‘반일’ 분위기를 완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 기대되었다. 천황의 유럽순
방으로 갑자기 ‘팬더 대망론’이 부상하자 1940년대에는 항일전쟁의 상징이었던 과거와는
무관하게 일본사회는 오히려 팬더의 부재를 중일 간 ‘비우호’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게 되었 다. 부재가 비우호를 뜻하게 된 논리적 귀결로 1972년 9월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선물 받은 팬더는 ‘중일우호의 상징’으로 일본사회에서 환영 받았다. 이것이 실로 팬더가 ‘중일우 호의 상징’이 된 역사적 경위이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역사적으로 형성된 ‘중일우호의 상징’으로서의 ‘팬더의 기증’이라는 행위가 오늘날에 이르는 중일관계에 어떠한 중요성을 갖는지에 대하여 향후의 검토과제로 2가지의 가설을 제시하면서 본고를 마치겠다.
우선 첫째, 팬더가 ‘중일우호의 상징’으로 자리 잡으면서 중국정부는 일본사회를 향해 팬더의 ‘존재/부재’를 통해 일본 정권에 대한 ‘지지/비지지’의 의사 표명을 할 수 있게 되 었다고 보인다. 이는 중국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민의가 국정에 반영되는 국가를 대상으로 한 국제선전으로 굉장히 이용 가치가 높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72년 12월의 중의원 총선거에서 중일국교추진의원으로 활약하며 ‘팬더인형을 안고 운동한’ 후루이 요시미(古井 喜実)가 낙선한 바처럼 중일우호운동이 어김없이 국민의 투표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 다.(나카지마 미네오, 2002: 184-185쪽)그럼에도 팬더가 일본의 일반 대중들이 중국정부 의 대일평가를 가늠하는 하나의 잣대로 기능한다는 사실은 1970년대 초엽에서 2010년의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둘째, 본고에서는 충분히 논의하지 않았던 점이나 팬더는 중일 양국 정부에 ‘이익이 되 지 않는 뉴스는 보도를 억제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론들은 대중의 이목 을 끌기 위해 팬더를 대대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다. 이는 1930년대의 미국 이후 일관되 게 드러난 경향이다. 그로 인해 중국정부나 일본정부에 ‘이익이 되지 않는 뉴스’가 있을 때 팬더가 기증되면 언론들은 그러한 ‘이익이 되지 않는 뉴스’에 할애하는 지면이나 시간을 본 래보다 축소한다. 1972년의 중일국교정상화는 타이완과의 단교를 수반했기 때문에 일본국 내에서도 많은 반대파들이 있었으나 ‘팬더 붐’은 그러한 중일국교정상화에 수반한 희생이라 는 측면의 보도를 결과적으로 억제시켰다고 쉬이 상상할 수 있다. 이는 당연 중일 쌍방의 정권담당자에게도 유리하다. 중요한 외교상의 정책을 전환할 때나 상대국에 양보를 할 때 국민들 사이에 부정적인 측면이 널리 퍼지는 것을 억제하는 팬더 기증이 가지는 이러한 효 과는 2010년의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팬더의 역할은 한편 일반 대중의 눈을 속이
는 성격을 갖는다. 하지만 만약 이 성격이 양국 간 국민감정의 과도한 대립을 방지하도록 작용한다면 그것은 ‘평화’에 기여한다고도 평가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서는 쉽게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어려우므로 향후의 검토과제로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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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공문서 소장(105-00271-02(1)) 「日本東京上野動物園要求与我交 換動物事的経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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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中友好与熊猫神话
家永真幸
(東京大学大学院)<目 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