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蒙古가 두 차례 침략을 전후하여 방법을 바꾸어가면서 줄기차게 시도했던 외교교섭을 모두 무시하였고, 전쟁의 사태를 피하기 위한 고려의 권유와 설득에도 불응하였으며, 일체의 외 교적 대응을 하지 않고 있었다. 蒙古에의 연대 투쟁을 호소하는 삼별초의 통첩에 대해서도 묵묵 부답이었다. 일본은 외교상 ‘無對應’으로 일관하였던 셈이다. 그 배후에는 어떠한 국내사정이 있 었던 것일까?
일본 국내에서는 蒙古의 강대한 세력과 대륙에서의 침략전쟁에 대해서 적어도 蒙古國書가 到 來한 당시에는 대체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蒙古國書가 도래하자 公家・武家가 보인 당혹과 위기감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이 일은 국가의 珍事이자 大事이다. 만인이 경탄할 수밖에 없
다”33)든가 “이것(첩장)을 보고 公家와 武家가 크게 놀라 返牒을 보내야 할지 아닐지, 牒使를 목
베어야 할지 아닐지 諸道의 의견서와 公卿의 僉議가 분분하였다”34)는 말에 단적으로 드러나 있 다. 民間에서도 “당시 天下無雙의 놀라운 일은 다만 이 일뿐이다”35)라고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 이고 있었다. 10세기 이후 오랜 동안 주변 국가와 국교를 맺지 않고, 국제적 긴장상태에 놓인 일이 거의 없었던 일본으로서는 외교적이든 군사적이든 국가 존망의 위기에 대처해야 하는 새로 운 상황에 직면한 것이었다.
鎌倉幕府는 九州의 大宰府로부터 보내온 蒙古國書를 高麗國書와 함께 京都 朝廷의 後嵯峨
32) 文永8年(1271) 9月 15日 祈願文, 뺷鎌倉遺文뺸 第14卷 10880號.
33) 뺷深心院關白記뺸 文永5年(1268) 2月 8日條(뺷大日本古記錄 深心院關白記뺸, 岩波書店, 1996).
34) 뺷八幡遇童訓뺸, 뺷伏敵編뺸 卷1, 15쪽.
35) 至元5年(1268) 正月日 高麗國牒狀案, 뺷鎌倉遺文뺸 第13卷 9845號.
上皇에게 올리는 동시에, 1268년 2월 蒙古에 대한 경계령을 西國地方의 御家人들에게 내리고 있다.36) 여기에 원칙상 조정이 外交權을 장악하고 대외적으로 國王〔天皇〕으로서 일본을 대표 하고 있던 것, 그리고 幕府가 日本國의 守護를 본래적인 職務로 하는 軍事權門37)으로서 경계태 세를 갖추고 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막부는 경계령에서 “蒙古人이 凶心을 품고 本朝를 엿보려 고 牒使를 보낸 것이다”38)고 말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 幕府가 애당초 蒙古國書의 到來를 侵略 의 前兆로 받아들였다는 견해39)가 있지만, 이런 경우 당연히 취할 수 있는 경계태세로 보는 것 이 합당할 것이다.
한편, 蒙古國書에 처음 접한 公家貴族들은 後嵯峨上皇이 주재하는 院評定에서 ‘返牒의 有無’ 를 둘러싼 논의를 거듭한 끝에 “蒙古國書가 禮를 缺하고 있어서 회답하지 않는다”40)고 결정하 였다. 그런데 이러한 조정의 방침은 1269년 9월 제 4회 사신이 온 것을 계기로 바뀐다. 조정은 이번에는 返牒을 보내기로 하였는데, 그 취지는 종래 중국과의 通好가 中絶되었기 때문에 蒙古 의 通好 요구에 응하기 어렵다는 것과 함께, 蒙古의 군사적 위협에 대해 그 不義를 호소한다는 것이었다.41) 菅原長成가 기초한 文永 7년(1270) 정월 일자의 「贈蒙古國中書省牒」은 日本國太政 官으로부터 蒙古의 中書省 앞으로 보내는 형식으로, “귀국과는 일찍이 인물의 교통이 없었으니 본조가 어찌 好惡가 있겠는가. 由緖를 돌아보지 않고 凶器를 사용하려고 하니 和風이 다시 불어 도 疑氷이 여전히 두텁다. 어찌 帝德仁義의 경지를 칭하면서 民庶殺傷의 근원을 열려고 하는 가”42)라는 道義的 비판의 색채를 띤 것도 그 때문이었다. 조정은 이러한 返牒을 작성하여 막부 에 보냈으나 막부는 이것을 억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여기서 조정은 왜 返牒을 보내려 했고, 막 부는 왜 그것을 억류했는가가 검토 대상이 된다.
조정의 ‘返牒’은 실은 어떻게든 蒙古와의 전쟁을 회피하려는 公家側 의도의 발로였다. 1271
년 9월 제 5회 사신 趙良弼이 일본에 와서 회답을 요구하며 “오는 11월을 기한으로 여전히 회답
이 없으면 兵船을 보내겠다”는 最後通牒을 발했을 때, 조정측은 “사태가 몹시 급하게 되었다.
일이 종국에 이르렀으니 탄식할 만하다”라고 당황해하며 막부가 억류했던 예전의 返牒 초안을 36) 龍肅, 뺷蒙古襲來뺸, 至文堂, 1959, 27-31쪽.
37) 黑田俊雄, 「中世の國家と天皇」, 뺷岩波講座 日本歷史뺸 6 中世2, 1963 (同, 뺷日本中世の國家と宗敎뺸, 岩波書店, 1975, 수록).
38) 文永5年(1268) 2月 27日 關東御敎書, 「追加法」436(佐藤進一・池內義資編, 뺷中世法制史料集뺸 第1卷, 岩波書店, 1955, 227쪽).
39) 川添昭二, 뺷蒙古襲來硏究史論뺸, 雄山閣出版, 1977, 27쪽.
40) 뺷深心院關白記뺸 文永5年(1268) 2月 8日, 10日, 14日, 17日, 19日, 25日, 26日條 및 뺷鎭西要略뺸 文 永5年條, 뺷伏敵編뺸 卷1, 31쪽.
41) 蒙古來使記錄, 뺷鎌倉遺文뺸 第14卷 10380號.
42) 贈蒙古國中書省牒, 뺷本朝文集뺸 67, 뺷伏敵編뺸 卷1, 39쪽.
약간 수정하여 서둘러 보내려 하고 있다.43) 1269년 말 조정이 返牒을 보내기로 한 것도 동년 2월 對馬島에 도착한 제3회 사신들과 島民과의 충돌,44) 그때 잡아간 島民 2인을 송환하면서 회 답을 요구하는 등 蒙古의 거듭된 ‘尋問’45)에 따라서 對外的 危機意識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조정은 蒙古의 통호 요구는 완곡히 거절하면서도, 전쟁 사태를 미연에 막기 위해 외교적 수단을 강구한 것이었다.
조정은 이와 동시에 고려에 대해서도 「大宰府守護所牒」을 보내려 하였는데, 거기에서는 지난 번 사신과 對馬島民과의 충돌 사건에 대해서 오히려 정중히 사과하고, 使行의 어려움에 대해 동 정을 표하며 식량을 제공하고자 한다는 등 매우 宥和的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46) 일본 국내에 서 이 返牒을 ‘和親’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47)은 단순한 誤傳이 아니라, 이 返牒이 외교적・평 화적인 문제해결을 지향했던 것에 기인한다. 요컨대 조정측은 몽고・고려와의 외교교섭을 통해 전쟁을 회피하려 했던 것이며, 返牒에 대한 蒙古側의 반응을 살피려 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막부는 왜 조정이 보내려 한 返牒을 억류했던 것일까? 조정의 返牒 방침에 대한 막 부의 조치에 대해서는, 사정을 설명하지 않고 결국 “(蒙古)牒狀의 体가 無禮하므로 返牒할 필요 가 없다”고 하여 사신을 그대로 돌려보냈다고 전해진다.48)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막부가 ‘牒狀의
体’를 문제삼고 있는 점이다. 이것을 전통적인 國際意識이나 慣習에 의한 태도49)로 보는 것은,
그러한 意識의 張本인 조정이 返牒을 택한 것을 고려하면 설득력이 없다. 또한 軍事・警察을 담 당하는 정권으로서의 ‘武斷的・劃一的’ 태도50)의 반영으로 보는 것은 막부의 狀況認識을 度外視 하는 武人體質論的 평가에 가깝다. 그밖에 당시 南宋側으로부터의 情報나 民族主義的인 중국 禪僧들의 宗敎思想의 영향을 지적하는 견해51)도 있으나, 朝廷側도 그러한 情報와 思想을 접한 흔적이 있다52). 따라서 이 문제는 일본의 政治體制 즉 朝廷과 幕府의 관계 및 幕府權力의 성격
43) 뺷吉續記뺸 文永8年(1271) 10月 24日條.
44) 뺷五代帝王物語뺸 龜山, 뺷新校 群書類從뺸 第2卷.
45) 뺷師守記뺸 貞治6年(1367) 5月 9日條 ; 뺷史料纂集 師守記뺸 第9.
46) 贈高麗國牒, 뺷本朝文集뺸 67, 뺷伏敵編뺸 卷1, 39-40쪽.
47) 조정의 ‘반첩’에 대해서 “이번에는 반첩을 보내며, 또한 화친을 해야 한다고 한다”(文永7年(1270) 5 月 26日 東嚴慧安敬白文, 뺷鎌倉遺文뺸 第14卷 10630號)라는 巷說이 퍼진 것도, 기본적으로는 ‘반첩’ 이 외교적・평화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던 것에 한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48) 뺷五代帝王物語뺸 龜山.
49) 田中建夫, 「東アジア通交關係の形成」 뺷岩波講座 世界歷史뺸 9, 岩波書店, 1970, 543쪽. 50) 村井章介, 「高麗・三別抄の叛亂と蒙古襲來前夜の日本」, 168쪽.
51) 川添昭二, 뺷中世九州の政治と文化뺸, 文獻出版, 1981, 110-111쪽.
52) 京都의 正傳禪寺 주지인 東嚴慧安은, “蒙古國은 性情이 교만합니다. (중략) 삼가 敵國의 원래 의도 를 생각컨대, 일본의 군병을 몰아 여러 나라의 국토를 항복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라는 의견서를 조정 관계자로 보이는 인물에게 제출하고 있다(東嚴慧安意見狀, 뺷鎌倉遺文뺸 第14卷 10559號).
을 통해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蒙古國書는 어디까지나 ‘日本國王’인 天皇 앞으로 보내진 것이고, 막부가 그것을 조정에 上 奏하여 중대한 國際事件에 대한 대응을 (설령 형식적이라고 해도) 맡긴 것은 朝廷(天皇)의 存在 意義가 대외적 위기 속에서 확인된 것을 뜻한다. 조정의 ‘返牒’은 국가 통치권자로서의 당연한 권한의 발동이고, 국가의 重大事를 스스로 담당하려는 의식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 로는 막부에 의해 억류되었지만, 조정이 막부의 의사와는 별도로, 아니 그것에 反하면서까지 ‘返
牒’을 보내려 한 것은 對外問題를 계기로 하여 조정의 爲政者意識이 높아진 것을 보여주는 것이
다.53)
대외적 위기상황하에서의 조정의 이러한 움직임은 그 방침이 어떻든 外交面에서 막부의 主導 權을 제약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만일 返牒을 계기로 蒙古의 사신과 첩장이 도래하여 조정과 蒙古의 접촉이 활발해지게 된다면 막부가 고립화될 우려도 있다. 그 때문에 막부는 조정의 외교 권 발동을 억제하고, “牒狀이 무례하므로 返牒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大義名分에 입각한 강경 한 정책을 택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이 名分論的 强硬策은 조정의 ‘返牒’ 즉 ‘外交權의 發動’을 억지하는 데 정당성을 제공하고, 軍事權門인 막부가 武力에 의한 國家守護를 내세워 外交上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유효했을 것이다. 蒙古에 대한 군사적 대응을 요구하는 입장의 논리적 귀
결이,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일은 모두 武家에게 賦課하십시오. 武家는 朝家의 第一의 重寶입
니다”54)라는 말처럼, 바로 막부에 의한 國政의 主導였던 것이다.
한편, 당시 幕府權力의 최고 실력자가 北條氏의 家督인 北條時宗이었다는 사실도 이 강경책 의 배경의 하나로 주목된다. 이미 時宗의 生父인 北條時賴의 시대부터 막부의 실질적 최고권력
은 ‘執權’이라는 公職에 있는 것이 아니라, 北條氏 本家의 長인 ‘得宗’(도쿠소)로 옮겨지고 있었
다.55) 그러나 北條氏는 본래 막부의 御家人과 同列의 身分으로, 得宗는 將軍이 갖는 御家人 支 配의 正統性을 결여하고 있었다.56) 따라서 외국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하여 군사적 대결을 피하려
53) 조정에 대한 막부의 힘의 우위를 결정지은 1221년 承久의 亂 이후, 특히 1246년 宮騷動을 계기로 하여 조정은 막부의 강한 간섭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그 결과 탄생한 것이 後嵯峨上皇이 주재하는 院評定制였다. 그 후 後嵯峨院政下의 조정은 內外의 重大事에 관해서 막부의 의향에 따랐다고 지적 되고 있다(上横手雅敬, 「鎌倉幕府と公家政権」, 岩波講座 뺷日本歴史5 中世1뺸, 岩波書店, 1975, 58-6 0쪽 및 網野善彦, 뺷蒙古襲来뺸, 小学館, 1974, 48-51쪽). 그러나 蒙古國書의 到來라는 종래에 없던 새로운 사태에 직면하여 조정이 나름대로 주체적인 움직임을 보인 것이 주목된다.
54) 東嚴慧安意見狀, 뺷鎌倉遺文뺸 第14卷 10559號.
55) 村井章介, 「執權政治の變質」, 뺷日本史硏究뺸 261, 1984, 17쪽.
56) 幕府體制의 頂点인 將軍이 되기 위해서는 身分的 尊貴性을 갖추어만 했지만, 北條氏는 小國 伊豆의 在廳官人 출신이라는 낮은 신분이었다(同上, 27-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