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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형식의 검토

ドキュメント内 <B9DFC7A5B9AE2033B1B32DBCF6C1A42E687770> (ページ 60-63)

李奎報의 뺷東國李相國集뺸, 뺷東文選뺸, 뺷高麗史뺸에는 對元講和 이전에 고려가 몽골의 장수와 서기관 또는 황족에게 송부했던 문서에 관한 기록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表> 참조. 이하 관계 문서를 정리번호에 따라 “문서01”과 같이 부르겠다.)

먼저 발신 명의와 書式에 대하여 확인해 보자.

(1) 발신 명의

문서01・02는 고려에 갑자기 쳐들어 온 거란 집단을 쫓아서 1218년에 비로소 모습을 나타냈 던 몽골군 장수에게 보낸 문서이며, 錄文의 타이틀과 附記에 의하면 尙書省(尙書都省)이 발신 명 의이다. 1811년에 사망한 李文鐸의 墓誌銘에는 對馬에서 보낸 「牒」에 尙書省이 答信을 보내려 고 했으며, 「邊吏」에 대하여 파격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중지했다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필요 에 따라 尙書省이 외국에 문서를 보내는 사태는 원래부터 상정되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상기 이외에 실례는 확인할 수 없으며, 고려의 관부가 외국의 관부・관인과 문서를 주고받을 때는 중 앙의 禮賓省과 按察使・防禦使 등의 지방 담당관을 발신 명의로 하는 牒(統屬關係가 없는 관청 사이에 사용)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3) 對馬의 사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앙의 상급관 청인 尙書省이 직접 문서를 발행하는 것은 그만큼 안건과 교섭 상대의 중요성을 의미한다. 첫 대면인 몽골 장수에게 尙書省 명의로 응대했던 일은 미지의 교섭 상대를 중시하는 이례적인 표 현이며, 환언하면 신중한 경계자세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서07・12는 왕족 淮安公 侹을 발신 명의인으로 한다는 것이 錄文 타이틀에 기록되어 있다.

전자는 그가 몽골에 파견되었을 때 道中保護에 대한 禮狀이며, 후자는 몽골의 장수 唐古가 「令 公」 앞으로 보낸 金線을 당사자인 權臣 崔怡가 수령하지 않고 淮安公 명의로 답장을 작성했던 것이다.4) 이 경우는 모두 사적인 성격이 강한 書狀이라고 생각된다.

이에 대하여 다음 문서는 발신 명의가 고려왕(당시는 高宗)이라는 사실을 비교적 명료하게 알 수 있는 사례이다. 먼저 문서06은 「國銜」(국가로서의 자격) 문서가 「나」라는 1인칭으로 기록되 어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왕조를 대표하는 국왕의 명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일한 「國銜行」인

3) 森平, 2007, 106-108쪽, 참조.

4) 뺷高麗史뺸 권129, 崔忠獻傳附 崔怡傳 ; 뺷高麗史節要뺸 권16, 高宗 9년 5월.

문서05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다.

문서17에는 「所論予及崔令公出來事」([몽골측이] 논하는바 나와 崔令公 출두에 관한 문제)라 고 되어 있으며, 몽골로부터 권신 崔怡와 함께 출두하라고 명령을 받은 「나」가 高宗이라는 사실 은 명백하다. 문서21도 「나」라는 1인칭으로 기록되는 한편, 「遣親弟新安公代我身」(친동생 新安 公을 보내 나를 대신한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왕의 동생 新安公의 형인 高宗 명의로 작성되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일하게 「나」라는 1인칭으로 기록되었고, 「親弟新安公」이라는 문장이 보 이는 문서22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서13에서는 몽골의 공격 통고에 대한 고려 백성의 동요를 설명하고, 「予亦不能無懼」(나 역 시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했으며, 고려가 達魯花赤(몽골의 감시관)을 살해한 사건 에 관한 견책에 대하여 「予亦一一不能知之」(나도 [상세한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회답 하고 있다. 또 문서18에서 「나」는 「大官人을 보내 글을 皇帝闕下에게 올린다」(遣以大官人, 奉書 于皇帝闕下)라고 적고, 다시 문서20에서 「나」는 「사신을 보내 토지의 사소한 물산을 皇帝闕下에 게 바친다」(以土地輕薄所産, 遣使介奉進于皇帝闕下)라고 적었다.

이들 「나」는 왕조의 통치에 책임을 지고, 국가를 대표하여 몽골과 교섭하며, 遣使・進獻을 행 하는 주체이며 바로 국왕 자신이다. 문서11에서 몽골의 지시를 「有司에 명하여」 실시했다고 언 급한 것도 국왕의 행위일 것이다. 문서15・16・19도 「나」라는 1인칭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발신 명의는 국왕이었다고 이해하여도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문서25・27은 국왕문서였다는 것 이 뺷高麗史뺸 世家 地의 글에 명기되어 있다.

이와 같이 발신 명의가 錄文의 타이틀과 附記에 명시되지 않은 외교문서는, 실제로는 국왕 명의의 문서였다는 것이 확인・추정되는 케이스가 많으며, 거꾸로 국왕 명의가 아닌 것이 확인・

추정된 것은 없다. 문서02・07・12처럼 국왕 명의 이외의 외교문서를 옮겨 적는 경우, 통상은 발 신 명의가 錄文 타이틀 등에 명시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발신 명의가 부기되지 않고, 또한 문서 내용에 판단재료가 발견되지 않는 문서03・04・08~10・14・23・24・26・28・29도 국왕 명의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2)

書式

문서01에 관해서는 「尙書省牒」이라는 기재가 있으며, 統屬關係가 없는 관청 간에 이용하는 牒이 사용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편찬사료 地의 글의 서술이며, 官文書를 나타 내는 일반명사에 불과할 가능성도 있다. 한편, 문서02에서는 錄問의 문언에서 대등관계에서의

書簡文인 致書(서두가 「某謹致書(于)某」가 된다)5)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서01의 「牒」 도 실체는 致書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당초에는 또는 별도의 서식을 사용하면서, 나중에 致書 로 변경했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칭기스 칸(Činggis Qan)의 동생인 카사르(Qasar)의 아들 예그(Yegü)대왕에게 국왕 명의로 보

낸 (내지는 보낸 것으로 보이는) 문서24~26(26에서는 官人에게 보낸 것도 포함한다)도 부분적인

錄文에서는 서식을 판명할 수 없지만, 뺷高麗史의 글에서는 이들의 발송을 「致書」로 서술하 고 있다. 그러나 고려왕에 대한 金나라 황제의 「詔諭」와,6) 머리말 부분에 「高麗國王昛謹奉書于 日本國王殿下」라고 적은 1292년의 對日國書7)처럼 명백하게 致書가 아닌 외교문서의 발송에 관 하여 뺷高麗史뺸 地의 글에서는 「致書」로 표현한 케이스가 있다.8) 편찬사료의 地에서 문언으로 서식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다. 뺷高麗史뺸에 보이는 다른 사례(문서27~29)는 단순히 「書」 라고 되어 있을 뿐이고, 書狀 일반을 지칭하는 경우와 구별이 곤란하며, 역시 서식을 뜻하는 術 語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한편, 전체의 절반이 약간 못되는 문서04・08~18에 관해서는 「右啓」 내지 「某啓」(淮安公 명 의의 문서07・12)로 서두를 달고, 「不宣」 「再」 「謹啓」 등으로 끝을 맺는 서식이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중국에서 말하는 에 해당한다. 고려가 참고했던 의 제도에서 는 황태자(실제로는 황태자 이외의 왕도 포함)와 官府의 長에 대한 上申文으로 규정되어 있지만9), 일반 官人들끼리 의 上行文書로서, 또한 私人 간에 공손한 뜻을 표시하는 길흉의 인사와 일상의 안부를 묻는 경 우, 기타의 서간문으로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10). 외교에서의 사용은 隋나라 말기에 唐 高祖 李淵이 처음 자립하던 당시에 突厥可汗에 대하여 사용했던 예 및 渤海王이 일본에 대하여 사용했던 예가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공손한 뜻을 나타내는 개인 간의 통신문으로서 啓의 성격 을 응용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渤海에 관해서는 일본에 대하여 臣禮를 피하면서도 辭를 천하게 여기고 우호관계를 맺으려는 의도를 지적할 수 있다11).

宋 司馬光의 뺷溫公書儀뺸 권1・私書에서는 私文書에 있어서 啓事(사물을 진술할 때 쓰는 글)의 서식으로서 啓의 한 형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는 割註).

5) 致書에 관해서는 中村, 1991, 299~330쪽 ; 中村, 1996, 153~162쪽 ; 中西, 2005 참조. 6) 뺷高麗史뺸 권14, 睿宗 14년 2월 정유.

7) 일본 金澤文庫東京大學史料編纂所에 복사본이 남아 있다(錄文竹內, 1982, 298~300쪽).

8) 金澤文庫對日國書에 관해서는 뺷高麗史뺸 권30, 忠烈王 18년 10월 경인조에 기록이 있다. 9) 조선왕조에서 국왕에 대한 上申文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추이를 이어받은 것이다. 10) , 1998, 243~246쪽 참조.

11) , 1998, 246~250쪽. 또한 石井, 2001a ; 石井, 2001b, 551~556쪽 참조.

具位姓

右某啓 [述事云云] 謹奉啓事陳聞 [陳賀陳謝隨時] 伏惟 尊慈俯賜 鑑念不宣謹啓

        日 具位姓    啓上

<表>에 올린 문서의 錄文에서 「右啓」라고 쓴 것은 아마도 冒頭의 「具位姓 某」가 빠진 것으

로 보인다. 다음 행의 「右某啓」에서 「某」도 빠진 것이 되지만, 후술하는 1267년의 啓式 對日國 書에서는 冒頭에 「高麗國王王 禃」으로 되어 있으며, 2행째에 「右啓」로 적었다. 교전기의 대몽골 문서 중에 「右啓」라고 쓴 것은 모두 王文書일까? 그와 같이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1267년의 케이스와 마찬가지로 「高麗國王姓諱右啓」(/는 改行을 의미한다)로 적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冒頭를 「某啓」로 기록한 것은 淮安公 명의의 문서뿐이지만, 唐代의 啓에서는 일반적인 표기법이며, 예를 들면 渤海의 對日文書 속에서 「武藝啓」 등으로 적고 있다. 뺷溫公書儀뺸 私書에 서는 時候啓狀(時候의 인사장)과 別簡(첨부장?)・手簡(일반적인 서간)에서 「某啓」로 적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平交・稍卑에 대하여 사용하는 케이스도 보인다. 국왕의 啓와 人臣의 啓에서 冒 頭가 다른 것은 國王의 啓가 왕조를 대표하는 國書임에 비하여12), 淮安公의 啓는 전술한 것처럼 사적인 禮狀이라는 차이에서 유래하는 것인가? 뺷溫公書儀뺸에서 「啓事」와 기타의 「某啓」 형식의 용법 구분이 혹은 이 차이에 대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右啓」로 적는 는 현재까지 代에는 확인할 수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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