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기 조선에서의 한글운동에 관한 연구 동향과 그 비판적 검토
미쓰이 다카시(三ツ井 崇)
머리말
‘국(민)어’의 형성은 근대 국민국가 형성의 한 요건이었다. 한 언어가 ‘국 어’로서의 자격을 얻으려면 그 언어가 문장어로서의 규범을 획득하여 네이션 (nation)을 대표하는 통일적인 표준형이 만들어져야 한다. 또 그것은 그 언어 의 화자에게 모어(mother tongue)에 기초한 언어의 통일을 뜻하는데, 구체 적으로는 철자법 정리, ‘표준어’ 확정, 사전 편찬 등 일련의 실체적 정비를 거 치게 된다. 언어와 국민국가 형성과의 관계에 주목한 많은 연구자들이 그 과 정을 언어의 ‘근대화’라고 파악해 온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과정은 ‘국 민’ 혹은 ‘민족’ 통일을 위한 것으로 이해돼 왔고, 문자 그대로 근대에 특유한 현상이었다는 것을 먼저 전제할 필요가 있다.
한 국가가 식민지를 영유할 때 종주국(宗主國)측의 ‘국어’와 식민지측의 언 어 사이에 서열이 매겨져, 전자가 후자를 억압하거나 쫓아내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러나 그 ‘국어’가 피지배자측의 속어(vernacular language)를 토대 로 한 것이 아닌 이상, 필연적으로 양쪽 언어 사이에는 긴장 관계가 생기게 된다. 종주국 언어가 일상 생활 속에 군림하게 되면 피지배 언어는 정치적 지 위 향상을 지향하게 된다. 그 하나의 수단이 바로 언어의 규범화(=근대화) 였다. 그래서 그 시도는 규범화 자체가 내포하는 근대성만이 아니라, 동시에 식민지하에서 민족이란 유대를 창출한다는 정치적 의미를 또한 가지게 된다.
근대 조선과 일본의 관계사에 있어서 이 과정은 조금 복잡한 형태로 나타 났다. 종래 식민지 조선의 역사와 언어 문제와의 관련을 다룬 대부분의 연구 에서는 일본어를 통한 지배의 측면에만 주목한 때문인지,1 조선어를 둘러싼
『言語文化』11-1:55-83ページ 2008.
同志社大学言語文化学会 ©미쓰이 다카시(三ツ井 崇)
동태를 상세히 검토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 동태란 조선어의 규범화 과 정이 식민지 정책과 얽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가리키지만, 실은 그러한 인 식도 최근에 와서야 가능하게 된 것이다.2 1990년대 이후 국민국가론, 일본
‘제국사’ 연구의 성과가 자리를 잡게 되고, 이연숙(イ・ヨンスク), 야스다(安 田敏朗) 등 사회언어학자가 일본의 ‘국어’ 형성, 일본 ‘제국’ 안의 ‘언어 편제’
등의 시각에서 식민지 조선의 언어 문제를 언급하자,3 사회언어학, 문학, 역 사학 등의 분야에서 이 시기의 언어정책, 운동, 사상 등에 대해 관심을 기울 이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검토의 여지가 많은 것 같다. 필자는 이러한 연구 동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역사학의 입장에서 주로 조선어의 규범화 운 동(=한글운동)과 총독부의 정책 사이에 이루어진 상호 규정적 관계의 역사 적 의미를 고찰해 왔다.4 특히 운동과 정책의 실태를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하 여, 조선총독부와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긴장, 충돌, 갈등 등을 있는 그대로 그려 내어 그 역사적 의미를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 왔다.
오늘날 이러한 주제는 역사학에서보다는 주로 문학, 사회언어학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 연구는 주로 담론 분석이 중심이고, 정책이나 운 동의 실태를 사회적, 정치적 배경 속에서 위치짓는다는 점에서는 아직은 불 충분하며, 그런 의미에서 제대로 된 역사 서술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주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 연구자 김철에 의한 다음 과 같은 발언은 무시할 수 없다.
식민지 시기 민족 저항 운동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 조선어학회의 한 글 운동 같은 것이 그[=제국 아래에 민족을 분절화시키며, 결과적으로 제국을 안정시킨]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 조선어학회는 식민지 기간 내내 단 한번도 총독부 권력과 대립한 적이 없었습니다. 대립했다 기보다는 오히려 한글 운동에서 조선어학회의 방침을 관철시키기 위해 총독부와 항상 긴밀하게 협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어학회와 대립 하는 다른 민간 단체를 견제하기 위해서도 총독부 권력이 필요했고, 게 다가 한글의 전면적인 보급을 위해서는 학교나 신문 같은 기구를 장악 해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도 현실의 정치 권력을 등지고는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 관계가 1920~1930년대에 계속되다가 1938년이 되면 조선어가 학교에서 수의(隨意) 과목이 되고 곧이어 공 적 영역에서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는, 말하자면 조선어의 존립 자체가 위기에 처하는 상황이 옵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조선어학회는 이 상황 에 대한 의미 있는 어떤 행동도 보여주지 않습니다.5
오랫동안 “조선어학회의 조선어문운동은 한글운동이라고 이름지어져, 일 본제국주의의 조선어 탄압 정책에 저항하는 반일 민족운동으로서, 혹은 한자 문화와 일본문화를 거부하고 민족문화의 자주성을 환기시키는 민족의식운동 으로서, 민중의 문화 수준을 끌어올리는 민족문화운동으로 전개되었다”6라 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던 상황에서, 김철에 의한 위와 같은 평가는 완전히 역 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김철의 평가가 타당한 것인지는 별 문제로 하더라 도 국민국가론의 유행 이후 자리잡고 있는 민족주의 비판을 기초로 한 한글 운동사 연구의 한 도달점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오늘날, 일본의 이른바
‘혐한(嫌韓)’ 언론에서도 이 시기 언어정책이나 한글 보급의 의의에 관한 서 술이 나오고 있는데(후술), 한국에서도 위의 김철에 의해 제시된 것과 같은 한글운동사의 상(像)이 한국사 교과서 기술에 채용되고, 한편에서 그에 대한 구태의연(舊態依然)한 반박 논리만이 횡행하는 등의 동향7을 보이고 있으므 로, 이것은 이제 역사인식의 문제로서도 충분히 검토할 여지가 있는 주제라 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식민지기 한글운동의 실태와 그 역사적 성격을 둘러 싼 검토를 중심으로 하여 오늘날의 연구 동향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몇 가지의 새로운 논점을 제시함으로써 식민지기 언어정책, 운동사 연구의 충실(充實)화를 꾀하기 위한 간단한 제언을 하기로 한다.
1. 식민지기 조선에서의 한글운동과 조선어 교육정책
(1) 조선어 규범화정책의 전개 과정
조선 시대 말기에는 갑오개혁(1894년) 때 조선어 철자법의 정리가 공식적 으로 국가적 과제로 인식되게 되었다. 특히 대한제국기인 1907년에 교육행 정을 담당한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가 설치되어, 조선어를 규범화하려는 시도
가 정책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조선어로 공적 문서를 작성하려는 시도는 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 으며, 갑오개혁 때 공포된 칙령 제1호 <공문식>(1894년 11월)의 규정8은 이 미 시작돼 있던 움직임을 명문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때 ‘문명’에의 희구가 기왕의 한자와 한문이 갖고 있던 위신을 한글(‘언문’) 에 맡기기 위한 가치의 전환이 이루어진 셈이다.9 아울러 ‘국문’의 교육과 연 구, 한글 미디어가 확산되면서 사회적으로 그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넓혀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1910년 한 국병합(韓國倂合) 이후 약 10년간에 걸친 ‘무단정치’기에 있어서 조선인들의 언론 활동은 ‘신문지법’, ‘보안법’(1907년), ‘출판법’(1909년) 등에 의하여 엄 격하게 규제되었으며, 조선인들의 조직적 활동도 거의 불가능했다. 조선어 연구도 이 영향을 받아 진전을 보지 못하였고, 한국병합 전부터의 과제였던 조선어 철자법의 정리라는 과제는 조선총독부로 ‘계승’되었던 것이다. 여기 에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규범화 정책이 시작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철자법 규정은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1912년),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 대요>(1921년), <언문철자법>(1930년)으로 작성, 개정되어 갔지만, 총독부(학무국)측의 주된 목적은 조선어 교과서 편찬을 위 한 철자법 방침을 세우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의도, 통용 범위, 사회적 위치 등 의 변화에 따라 각 철자법 규정의 성격은 변용되어 갔으며, 단지 교과서 편찬 이란 교육정책사적인 사실의 틀 안에서만 파악하기는 힘들어졌다. 다시 말 해, 일본인 관리에 대한 조선어 장려정책과, ‘문화정치’ 하에서의 조선 지식 인들의 조선어를 통한 언론 활동 등을 상호 규정적 관계에서 파악하지 않으 면 그 본질을 잡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조선어 규범화 문제에 민감했던 조선 지식인들은 조선어 교육정책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으며, 대 표적인 조선어 연구자 집단인 조선어연구회는 <언문철자법> 심의의 자리조 차도 운동 실천의 장으로 삼아 자신들의 주장을 철자법 규정에 반영시키려 고 노력하였다. 이와 함께 조선어연구회는 한글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개칭한 후에도 민족계 신문/잡지, 문학자, 교직 관 계자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동향에 대항하려고 그 이전부
터 조선어연구회의 학설에 반대해 온 박승빈(朴勝彬)을 중심으로 한 조선어 학연구회가 조직되어(1931년), 조선어학회의 철자법안에 대한 반대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필자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총독부의 1930년의 철자법 개 정이 1930년대 이후 본격화된 한글운동의 전개 양식을 크게 규정한 것이 아 닐까 하는 점이다. 그 이유는 후술하겠다.
그러나 중일전쟁기 이후 조선어에 대한 억압이 강화됨으로써 이러한 한글 운동의 성격도 변용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조선어에 기초한 언어생활의 장 이 극히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스스로 마련한 조선어 교육의 자리 를 소멸시켜 가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1942년의 조선어학회 사건에도 보였 듯이 한글운동을 그 이유에 관계없이 완전한 탄압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2) 민족 ‘갱생(更生)’의 활로로서의 ‘문명화’
한국병합 후에는 공문서, 재판 용어를 비롯한 모든 공적 영역에서 일본어 가 채용되고, 조선인의 생활 영역에 일본어가 들어왔다. 보통학교에서는 ‘국 어’도 조선어도 1938년까지는 필수 과목으로 존재하기는 했지만, 조선교육 령(1911년)의 제정 과정에서는 “언문 급 한문” 전폐가 의식돼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어를 문자 그대로 공용어로 하고 공문서도 모두 일본어로 한다 는 조선교육조사위원회의 결정안이 발표되기도 했다.10 결과적으로 제국교육 회 평의원회 결의에서는 “언문 급 한문” 전폐 사항은 삭제되었지만,11 이 사 실은 식민지기 첫 단계에서부터 ‘국어’와 조선어(및 한문)가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사실, ‘조선어 (급 한문)’ 과목은 ‘국어’ 교육에 부수된 것으로 규정되어, 조선어는 ‘조선어 (급 한문)’, 수신, 농업 교과서의 역문 외 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초등 교육 이외의 영역에서는 경학원(經學院)에서 ‘교 육에 관한 칙어’의 조선어, 한문역이 그 사업으로 전개되며(1916년),12 관보 의 ‘조선역문’과 『매일신보』등에서 조선어가 이용되고 있었다. 또 교원, 경찰 을 중심으로 한 일본인 관리를 대상으로 조선어 학습이 장려되기도 하여,13 지배자측에서도 조선어는 통치자들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이 용 가치가 있었다.
한편, 한글운동을 전개한 조선 지식인들에게 개화기 이후 계속 과제가 돼 있었던 한글 개량 작업이 민족의 ‘재흥’, 혹은 ‘갱생’이란 문맥에서 의식되기
시작했다. 3·1 독립운동 후 한글운동이 활발해진 1927년 ‘정음 반포 제481 주 기념일’에 즈음해서 발표된 「한글운동의 의의와 사명」이라는 『동아일보』
사설에서는,
多幸으로朝鮮全體의更生運動의一部로서民衆의손으로차저내게된金玉 이다시日本語라는 强靭한敵手를맛나게되엇스니 그前途의對한悲觀을 禁키어렵게되엇다그러나 한이러한敵手의出現에依하여 한글은그內在 的力量의輕重을證할時期를맛낫고 한글運動自體가政治的重要한 意義 를 게된것이다 衰退하엿던民族이再興하려는 에잇서서 言語及文字 的復興運動이 그民族의甦生力과正比例함을 愛蘭猶太等의例로볼수잇 는것이니 한글運動은朝鮮民族運動의一部로서重大한役割을가지게된것 이다 非但日本語에對한 朝鮮語의生存競爭으로만아니라 한글의整理普 及改良等이 國家的權力에依하지아니면아니될것이 大部分임을생각할
에 그政治的意味는더욱濃厚하여지는것이다14
라고 하여 한글운동의 정치적 의의가 강조되었으며, 좀더 구체적으로는 “民 衆敎養運動 는 文盲打破運動의武器로서의價値”15와 조선어 근대화의 필요 성이 강조되었다. 이렇듯이 “衰退하엿던” 조선민족의 “再興” 혹은 “更生”이 란 문맥에서 조선어 문제는 명확히 자리매김되었고, 또 그러한 의식은 이후 의 한글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어연구회를 모체로 발족한 조선 어사전편찬회의 취의서(1929년)에 나오는 다음의 표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류의 행복은 문화의 향상을 따라 증진되는 것이요, 문화의 발전 은 언어 및 문자의 합리적 정리와 통일로 말미암아 촉성되는 것이다.
[……] 일찍이 문화 발전에 뜻있는 민족들은 언어 및 문자의 정리와 통 일을 급무로 하지 않은 자가 없으니, 과거의 모든 문명 민족이 제각기 자기 어문의 표준을 확립하기 위하여 표준 언어와 표준 문자를 제정하 며, 동시에 표준 사전을 편성하여 어문의 통일을 도모하였고, [……]
오늘날 세계적으로 낙오된 조선 민족의 갱생할 첩경은 문화의 향상
과 보급을 급무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문화를 촉성하는 방편으 로는 문화의 기초가 되는 언어의 정리와 통일을 급속히 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16
민족 ‘갱생’을 위한 언어의 통일은 조선민족의 “문명민족”화임을 밝히고 있지만, 그 배후에는 거꾸로 조선어의 현황은 “孤立的인 分散的 現象”이 “古 代나 野蠻社會에서 볼수있”듯이17 ‘문명적’인 상태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는 비관적인 의식이 존재한 것이다. 앞의 『동아일보』사설에도 나왔듯이 “日 本語라는 强靭한敵手”를 눈앞에 두고 언어적 ‘문명화’와 그것에 의한 민족
‘갱생’이 자치나 독립으로 이어진다는 신념을 담론 수준에서 표시한 것이라 하겠다. 언어에 의한 ‘문명화’의 이데올로기는 이미 병합 이전부터 보인 것이 었지만, 식민지하에서 이런 식으로 강조됐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식민지 상황 으로부터의 탈각을 뜻하며, ‘문명화’는 급무로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운동은 어떤 툴(tool)로써,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이 물음은 한 글운동의 근간에 있던 민족 ‘갱생’, ‘문명화’ 등의 담론이 같은 시기의 어떠한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성립하였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다가가 기 위해서도 중요한 것이다. 다음 절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검토하겠다.
(3) 얽히는 생각들: 조선어 교육이란 장(場)의 양의성(兩義性)18
민간 차원의 한글 보급은 언론계를 포함한 민족운동 전반에 걸친 총독부 권력으로부터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규모가 컸음에도 불 구하고 계속적이고 안정적인 활동이 반드시 보장돼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주목해야 할 영역은 총독부의 교육정책일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조선총독부가 어떤 이유에서이든 조선어의 규범화 과정 에 관여했다는 사실은 규범화 그 자체의 역사적 평가를 어렵게 하고 있는 것 만은 사실이다. 총독부가 규범화에 나서게 된 것은 그 주관이 학무국이었다 는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조선인 학생들에 대한 조선어 교육의 수단, 즉 조 선어 교과서 편찬 때문이었다. 그 효시가 1912년 철자법인 셈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현장에서 가르치고 있던 교사들의 과제 의식을 채울 만한 것이 아 니었고, 뿐만 아니라 보통학교 교육 이외의 영역에서는 거의 무시되고 있었
다. 이러한 상태는 3·1독립운동 후의 교육 제도와 교과서 개정 사업에 따른 첫 번째 개정(1921년 철자법) 때에도 해소되지 않았다.
‘문화정치’기가 되자 조선인들에 의한 한글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 작했다. 운동의 주된 담당자가 현직 교원들이었다는 것은 이미 몇몇 연구에 서도 지적됐지만,19 한글운동의 영향력은 교육 현장에까지 침투하였다. 나아 가 신문, 잡지 등 조선어 활자 미디어의 성장과 이 시기에 시작된 일본인 관 리에 대한 조선어 장려 정책의 전개 등과 함께 조선어 철자법 문제는 관민 양 측에서 급속히 주목받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정 철자법은 다시 비판을 받게 되고 그 위신을 한층 더 높일 필요성이 대두한 것이다. 그 위신을 얻기 위해서는 내용에 대한 지지를 얻을 필요가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시기 조선어 교육정책에 관해서 는 일부 교원 경험자가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었다.
[……] 여기서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이 하나 있다. 다름이 아니라 [학무]당국은 필수 과목의 하나인 조선어과(朝鮮語科)를 왜 의붓자식 처럼 또는 ‘어찌되어도 괜찮다’식으로 다루는가 하는 것이다. [……] 조 선어가 조선인들에게 불필요하다고 근본적으로 부정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미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바인 필수 과목으로 인정한 이상 마땅히 이 선도, 발달을 기도하며 소기의 목적을 이룩하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20
위의 글은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교원 경험이 있었던 이완응(李完應)의 말이다. 그는 이어서 “현 제도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로서 “학무당국자에게 는 좀더 조선과 조선인의 장래를 감안하여 조선어의 통일을 기도하며 그 건 전한 발달을 이루려고 노력하시기를 바란다”21고 주장했다.
조선어가 필수 과목임에도 불구하고 그 질이 너무나도 낮다는 이 비판은 그 당시의 조선어 교육의 실태가 조선인들의 기대와는 얼마나 거리가 있었는 지를 알려주는 것이었고, 총독부(학무국)는 그러한 비판에 대해 조선어 교육 의 ‘개선’을 가시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그 대책이 바로 언문철 자법의 재개정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총독부는 이 시기에 사회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조선어연구회의 힘을 빌려 대규모 개정에 나선 것이 고, 그 결과로 1930년 철자법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많은 교원들은 자기가 그 때까지 지지해 온 조선어연구회의 안이 대폭 채 용돼 있는 것을 이유로 새로운 철자법에 준거할 필요성을 주장해 나갔다. 교 육 현장에서의 보급은 조선어연구회측에서도 자신들의 안의 위신을 올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조직도 개편하여, 운동의 추진력을 한층 더 높여 갔다. 그런데 이러한 동태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졌다. 이하에서는 그 의미를 분석해 보겠다.
먼저 다음의 글을 보기로 한다. 이 글은 1930년 철자법 심의의 자리(1929 년 5월 30일)에서 학무국장 사무취급 마쓰우라(松浦鎭次郞)가 한 인사말의 일부이다.
무릇 언어란 국민문화의 진보에 따라 변천해 나가는 것이며 이것을 표현하는 철자도 이것에 수반하여 개량되기에 이르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습니다. 고(故)로 문명 제국(諸國)에 있어서는 시운의 추이 와 학리의 진보에 따라 언어 표현의 철자를 개량하고 국민의 사용에 알 맞게 하고 있는 것은 이제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 조선어의 변 천에 수반한 언문철자법의 개변에 이르러서는 언문 사용자의 독자적 인 견해에 기초하여 이를 행하는 상태에까지 이른 까닭에 오늘은 귀일 할 바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현상에 있는 언문철자 법을 적당히 정리하고 통일하는 것은 언문의 보급, 발달을 위해서도, 혹 은 조선문화의 진전을 위하여도 실히 긴요한 일이라고 여겨지는 것입 니다.22
이 발언에서는 언어와 ‘국민문화’와의 관계성의 논리가 조선어와 ‘조선문 화’ 사이의 관계성에도 그대로 적용돼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하면 학 무당국측에서 조선어는 내셔널한 존재라고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 어, ‘조선문화’, 나아가 조선민족의 일체성을 상기시키는 마쓰우라=학무국의 이 발언은 심의 석상에서 눈 앞에 앉아 있는 조선인 지식인들의 협력을 얻기 위한 표면적인 말이었음은 명백하다. 그리고 학무국이야말로 조선어, ‘조선
문화’의 향상을 위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까지 암시하고 있다. 그러 나 학무국 단독으로 조선어의 ‘충실’화를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상황에서 학 무국이 명실 공히 조선어 ‘통일’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조선 지식인, 그 중에도 조선어연구회원들의 반발을 피해야 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앞에 인 용한 이완응의 글은 아주 전략적인 말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철자법 심의 의 자리는 교육 현장에서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많은 조선 지식인들도 무시할 수 없는 장이었다. 학무국도 그런 분위기를 잘 알면서 용의주도하게 심의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미 사회적으로도 교육 현장에서도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조 선어연구회원들을 심의의 자리에 부르고 철자법 규정 내용에 그들의 의견을 많이 채용한 것은 그들의 조선어 교육에 대한 기대감이나 언어 내셔널리즘 을 동원함으로써 ‘내선융화(內鮮融和)’의 구호 그대로 “관민이 서로 흉금을 터놓고 협력 일치하여 조선의 문화를 향상시키고 문명적인 정치의 기초를 확 립하”23는 상태를 총독부측에서 마련했음을 의미했다. 조선 지식인들은 그런 형식에 대해 갈등을 느끼면서도 그것은 운동의 효과적인 실천을 위해서는 피 할 수 없는 선택지라고 보았다. 결국,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총독부 정책 을 보완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나아가 위의 동태는 1930년대 이후의 한글운동의 형태를 재편성하는 계 기가 되었다. 1920년대 이후 계속 조선어연구회와 총독부의 철자법에 반대 해 온 박승빈을 지지한 그룹이 1931년 조선어학연구회를 창립, 조선어학회 와의 대립의식을 보다 더 선명하게 하고, ‘한글’파에 대항한 ‘정음’파 세력의 결집을 꾀하면서 조선어 규범화의 분위기를 한층 더 환기시키는 역할을 맡았 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총독부 철자법의 영향은 학무국과 조선어학회 와의 관계에서만 보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선어학연구회의 반대 운동도 1930년대 철자법이 교육 현장으로 침투해 가는 것에 대한 위기감 때문에 전 개된 측면이 있었다. 조선어학연구회를 모체로 1934년에 설립된 조선문기사 정리기성회(朝鮮文記寫整理期成會)에서는 1936년 10월 1일에 철자법 개정 요구를 학무국에 진정했는데, 그 요망서에서 심의원의 인선에 대해 불만을 표명하기도 했다.24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특정한 세력만이 아니라 한글운동 전체가 조선어 교육정책의 논리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
서 한글운동의 담당자로서 복수의 주체의 존재를 항상 상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4) 조선어학회 사건의 성격
위의 분석을 전제로 하나 더 검토해 봐야 할 주제가 조선어학회 사건 (1942년)의 성격이다. 이 사건에 관해서는 이미 논한 바가 있으므로25 여기 서는 상세히 거론하지 않겠다.
사건의 성격을 판단할 때 자주 인용되는 자료의 하나가 예심종결결정문이 다. 거기에는 조선어학회 활동이 “민족 고유의 어문의 정리, 통일, 보급을 꾀 하는 하나의 문화적 민족운동임과 동시에 가장 심모원려(深謀遠慮)를 포함 한 민족독립운동의 전진 형태”의 하나이고 학회 그 자체는 “표면 문화운동의 가면 아래 조선 독립을 위한 실력양성 단체”였다고 되어 있다.26 종래의 조선 어학회 이해는 이러한 평가를 토대로 하고 있었는데,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 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앞에서 언급한 사례에 관해서 조금 더 검토가 필요 하다는 말이다.
종결문에서는 1930년의 철자법 성립 이후 조선어학회가 강습회에서 “언 문의 강습을 구실 삼아 조선 민중의 민족의식의 환기, 앙양을 기도하”고, 학 회 내부에서 “강습에 즈음하여 언문의 역사상을 설명하고 언문이 조선민족 과 불가분한 관계인 것, 언문을 연구함이 즉 조선의 민족정신을 유지하는 소 이(所以)임을 강조함으로써 수강자의 민족의식의 환기, 앙양에 노력”함을 합 의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27 그러나 전술했듯이 1920년대 말에 있어서 적 어도 학무당국은 “언문이 조선민족과 불가분한 관계인 것”을 인정하고 있었 다. 전시체제기에 이르러서 총독부가 일찍이 용인하고 한글운동의 성과를 적 극적으로 이용했다는 사실은 은폐되고 말았고, 반면 한글운동의 ‘저항’적 성 격만 강조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조선어학회의 조선어문운동은 한글운동 이라고 이름지어져,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어 탄압 정책에 저항하는 반일 민족 운동으로서, 혹은 한자문화와 일본문화를 거부하고 민족문화의 자주성을 환 기시키는 민족의식운동으로서, 민중의 문화 수준을 끌어올리는 민족문화운 동으로 전개되었다”라는 식의 일반적인 해석은 1942년 당시 총독부 권력 측 에서 의도적으로 조작된 논리를 그냥 답습하는 것이 된다. 물론 이 사건 때문
에 한글운동의 큰 흐름이 끊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위에서 말한 1930년대까 지의 총독부와의 긴장 관계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식민지기의 언어정책과 언어운동의 추이를 잘못 판단하여 정태적인 이미지로 역사를 그 려내고 말게 될 것이다.
2. 한글운동사에 관한 최근 연구 동향과 그 비판적 검토
(1) 총독부 <언문철자법>과 한글운동: 후경화(後景化)되는 정책에 대한 시점 이미 머리말에서도 한글운동사에 관한 한 평가를 소개했지만, 이하에서는 한글운동사 이해를 위한 몇 가지 논점을, 최근 연구 동향에 대한 검토를 통해 서 제시하기로 하겠다.
근년에 와서 식민지기 한글운동의 성격에 관한 연구가 한국에서, 주로 문 학 분야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 대표적 논자로서 이혜령(李惠鈴)의 연구 성과들을 들 수가 있다.
그의 관심은 한글운동이 “언어는 균질화된 교환매체라는 인식하에, 그것 의 유통과 보급을 위한 매체(media)로서 학교·교회·신문사, 나아가 근대국민 국가와 같은 시스템을 요구했다”28는 것을 확인하는 데 있다. 그리고 “식민지 권력 그러니까 조선 총독부는 한글운동에 있어서 늘상 적대자로 인식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언문철자법의 개정, 거기에 근거한 각급 학교 교과서의 개 정 등 총독부의 전면적인 행정력은 조선어문통일을 정당화하는 실제적인 권 위의 근거로 참조되었다”29고 평가한다. 이러한 전제 아래 1930년 철자법 심 의의 자리에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 회원이 참석한 경위와 관련하여, 총 독부 주도의 조선어 교육의 장은 그 자체가 출판, 성경 등과 같은 언어운동의
“도구적 합리성”을 보장하는 미디어의 역할을 한 것이라고 파악한다.30 이러 한 지적의 배경에는, 조선어 내셔널리즘을 위험시하고 있었던 조선총독부가 조선어 규범화의 수행자였다는 ‘역설’, 즉 “[수행]주체의 이질성”이 해방 후 한글운동사 서술에서 ‘은폐’돼 왔다31는 사실을 고발하려는 의도가 내재돼 있 음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또 그는 “제3회 언문철차법개정 논의는” 총독부에 의한 차별교육으로 인 한 동맹휴학 문제, 교육언어 문제 등 “학교교육 현장에서의 갈등과 불만, 그
리고 그것을 조직적 운동으로 이끌어낼 만큼 전반적으로 높아진 학생들의 의 식을 또 다른 배경으로 삼고 있다. 언문철자법개정은 조선어를 둘러싼 학생 들과 교사들의 요구를 수렴하는 한 방식이었던 것이다”32라고 하면서 그 당 시 조선어 교육의 상황과의 작용 관계를 지적하고 있다. 그런 작용 관계를 분 석하는 데 필자는 앞에서 교원들의 역할에 대해서 지적한 바가 있다. 그러나 그는 “조선어 교원으로서 교육현장에서의 개별적인 실천이 아니라 조선총독 부 학무국이 그 매개가 되었다는 사실이 핵심적이다”33라고 평가한다. 그것 은 한글운동이 “학교·교회·신문사, 나아가 근대국민국가와 같은 시스템을 요 구했다”라는 전제와 연결되지만, 마지막으로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는
“그 메커니즘의 도구적 합리성을 적극적으로 이용”했지만, “또 한편으로 한 글운동이 부딪힌 벽은 도구적 합리성의 추구가 수행주체의 동일성을 보장하 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고 결론짓는다.34
사실 1930년 철자법 심의 직전의 『조선일보』사설에서 “2千3百萬人의 自 然의 方言인 朝鮮語의 綴字法改正은 누구에 의하여 鞅掌됨은 別問題로 하고 라도 그의 民族文化上의 影響되는 作用이 결코 無關心을 許치 않”35는다고 갈등을 나타낸 것은 “한글의整理普及改良等이 國家的權力에依하지아니면아 니될것”을 자각하고 있었던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혜령의 분석은 “도구적 합리성”과 “벽”을 지적하면서 1920년대 말부터 30년대 전반의 한글운동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지적하는 결과가 되 었다.
조선 지식인이 추구하려고 했던 “도구적 합리성”은 식민지 권력에 의해 마 련된 것이었으며, 한글운동이 부딪친 “벽”도 그래서 존재했음은 명백하다.
그만큼 통치권력측의 동향도 자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는데, 그에 대한 기술 은 아주 빈약하다.
그와 관련해서 학무국이 1910년대부터 계속 <언문철자법>작성에 관여해 온 이유에 대해서도 거의 검토하고 있지 않다. 오늘날 일본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경향의 하나인 역사수정주의자들의 담론을 보면 조선어 교육이나 근대 화에 대한 일본(인)의 관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말이 많이 나오고 있다. 예 를 들면 니시오(西尾幹二)는 일본에 의한 조선 ‘근대화’의 ‘공적’을 말하는 문 맥에서
지금 한국이 채용하는 글자인 한글은 15세기에 만들어진 인공적인 말 인데 그 때까지는 한자와 한문을 정서로 한 양반 계급에게서 멸시를 받 았고 무시된 글자였기 때문에 실용화에는 이르지 못했었다. 일본 총독 부 시대에 처음 한글을 보급하고 소학교[보통학교] 교육에 도입했다는 사실을 현대 한국인들은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36
라고 하고 황웬숑(黃文雄)은 “한글이 한국의 온 국민에게 가르쳐지기 시작한 것은 한일합방 후”라면서 “한글은 철자법이 복잡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축 적이나 체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총독부는 1911년부터 일선(日 鮮)의 학자를 모아서 연구와 보급을 진행했다. [……] 1911년 7월에 ‘언문철 자법 연구회’를 발족시키고 현대 서울말을 표준으로 ‘보통학교용 언문철[자]
법’을 결정, 교과서로서 채용했다”고 말한다.37 이러한 논조가 생긴 이유는 1910년대 이후 조선어 교육정책과 한글운동의 실태가 충분히 밝혀지지 않 았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한 상태에서 “도구적 합리성” 을 강 조한다면 위에서 본 일본의 담론을 비판하기가 무척 어려워진다. 1910년대 이후 정책과 운동이 어떤 긴장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 그리고 이혜령이 지적 한 “벽”은 식민지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위치시킬 수 있는가를 새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역사화(歷史化) 되지 않는 ‘협력’과 지배 권력에의 시점
머리말에서 든 김철의 말은 위에서 언급한 이혜령의 연구를 전제로 한 것 이었다. 김철의 발언 내용을 조금 더 자세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이하에서는 그의 논문「갱생(更生)의 도(道) 혹은 미로(迷路): 최현배의 『朝鮮民族更生의 道』를 중심으로」(2005년)에 따라서 그의 의견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주지하듯이 최현배는 한글운동의 중심 인물의 하나이며, 열렬한 민족주의 자였다. 종래 그에 관한 담론에서는 저항민족주의의 존재가 자주 지적된 바 있는데, 김철은 “한국 민족주의의 역사에서 외솔 최현배는 이른바 저항 민족 주의의 고난과 위엄을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이다. 아니 기호라기보다는 차라 리 하나의 신화이다”38라고 하고, “일제 식민지 시기의 역사상(歷史像)에 대
한 이른바 ‘저항사적 관점’으로부터 이 논문은 최대한 거리를” 둔다고 표명 한다.39 그는 이런 전제하에 최현배의 『朝鮮民族更生의 道』를 다음과 같이 분 석한다.
‘민족의 갱생’을 절규하는 이 긴 논문에서 그[=최현배]는 ‘민족’을 둘러 싸고 있는 ‘제국’의 존재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일본’이나 ‘일 본인’이 언급되는 경우는 더러 있어도 그것은 대개 조선과의 비교를 위 한 예증으로 거론될 뿐, 제국의 권력이 식민지를 원천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어떤 암시도 찾아보기 어렵다. [……]
한마디로, 그것은 제국으로부터 민족을 분절(分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민족의 문제’가 이러한 쇄말적인 생활상의 문제들로 분절됨으로 써 ‘민족’은 제국의 영토 안에서 그 자신만의 고유하고도 특수한 영역, 즉 생활개선이나 의식 혁명의 실천장(場)으로서 그 영역이 제한되고 따 라서 명료해진다. 그리고 이 고유한 영역의 확보를 통해 제국과 민족 사 이에는 명료한 경계가 그어진다. ‘갱생’이란 당연히 이 ‘민족’의 경계 안 에서 이루어져야 할 터이니, [……] 민족은 제국의 영토 안에서 ‘특수한 것’으로 분절되면서 명료해진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제국의 체제를 유지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영역 구분인 것이다.40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제국주의에서 민족을 분절화시키면서 고유의 영 역을 확보함으로써 “민족과 제국은 처음부터 서로를 떠받치는 존재가 아닐 수 없었”41으며, 그 ‘분절화’ 메커니즘을 표시하는 재료로서 조선어연구회-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을 사례로 제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김철은 1930년 철자법 심의 때의 그들의 ‘협력’에 관해서는 이혜령의 “조선어학회의 실천적 인 권위는 총독부 학무국의 제3회 언문철자법 개정을 계기로 식민권력에 개 입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성공적으로 관철시킴으로써 얻어졌다”42는 평가를 그대로 인용한 다음에 아래와 같이 말한다.
[……] 분절화의 메커니즘과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조선어학회의 한글 운동이 식민 권력과의 일정한 협력 관계 아래서 수행되었다는 사실 보
다는 그 운동이 “식민지적 언어 상황의 본질적 국면을 문제삼지 않았 다”는 것, 즉 표기법이나 철자법 등의 문제에 집착하는 것으로 일관함 으로써 ‘조선어’를 제국의 언어 편제 속에서 하나의 지방어로 특수화하 고 분절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은 1930년 대 후반 조선어 자체의 존립이 근본적으로 위협받고 있는 상황을 은폐 하면서, 운동의 주안점을 “한자 사용 여부, 신어(新語)의 창출이나 고어 (古語)의 부활, 외래어의 수입 문제, 표준어와 방언의 문제” 등으로 쇄 말화 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이었다. 실상 한글운동을 철자법 문제나 순 한글 표기 등의 문제로 분절하는 것은 조선어학회의 초창기부터의 일 관된 운동 방식이었다. 내선공학(內鮮共學)이나 조선어의 수의(隨意)과 목으로의 전환이라는 1930년대 후반의 상황에서도 조선어의 분절화, 즉 조선어를 ‘아일랜드나 인도처럼 영(英)제국 아래의 지방어’, 또는 ‘실 용어, 공용어가 아닌 라틴어 같은 고전어’ 등으로 위치 지움으로써 제국 의 언어 편제 내에서 민족어의 영역을 특수화·지방화하는 방식은 바뀌 지 않았다.43
위의 글에서 김철의 “쇄말화”했다는 분석은 그의 오리지널한 견해가 아니 라 이혜령의 소론에 따른 것이었다. 이혜령은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이 성공 한 이유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논한다.
[……]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운동방식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또 하나 의 이유는 식민지적 언어상황의 본질적 국면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는 데 있다. 즉 한글운동은 식민지배가 낳은 언어상황의 근본적인 사태인 이중언어의 상황, 특히 학교교육현장에서 갈수록 그 존립 여부가 의문 시 되었던 상황을 은폐해야만 가능했던 운동이다. 단적으로, 조선어학 회의 한글운동은 조선어교육과 관련하여 유독 교과서의 철자법문제에 만 관심을 기울였으며, 교육용어의 문제나 조선어교육의 존폐를 결정짓 는 내선공학(內鮮共學) 실시와 같은 식민지 교육정책에 관해서는 함구 했다.44
위에서 본 몇 가지 평가 하나하나에 대해서 지적하고 싶은 점이 없지는 않 으나, 여기서는 한글운동사를 이해하기 위한 제언으로 몇 가지 문제점을 지 적하는 데에 그치기로 한다.
첫째, 앞에서 지적했듯이 식민지하 조선어 교육정책의 추이에 관해 충분히 논의하지 않은 채 1930년 철자법 심의 때의 ‘협력’만이 주목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협력’을 요청한 정책의 논리는 외면되고, ‘협력’의 방향이 마치 조선 어연구회로부터의 일방적인 것인 양 잘못 인식하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 리고 그 결과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에 의한 한글운동만이 전경화(前景 化)되고 운동의 다양성이나 동태성에 대한 시야는 결여되었으며, 더 나아가 구태의연한 역사상을 토대로 한글운동을 평가하는 논의들이 활보하게 되었 다.45 1910년대 이후 조선어 교육정책과 한글운동의 연장선상에 1920년대 후반 이후 동향을 위치지을 필요가 있음에도 그런 시도가 거의 보이지 않는 것도 문제이다.
둘째, 조선어학회의 활동에 대한 평가도 “쇄말화”된 것이라고 하여 한글운 동의 의의를 무력화하고 있는데, 그것은 1920년대 말 당시 조선 지식인들이 표명한 한글운동에 대한 사명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문명화’의 논리를 바탕으로 “衰退하엿던民族”의 “再興”을 지향한 그들의 운동이 어떤 성과를 거두고, 반면에 어떤 한계에 직면했던가.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에도 주목하 면서 이 문제의 답을 찾아야 하는데, 이혜령이나 김철의 평가는 조선어 규범 화의 주체의 동일성/이질성이라든가 한글운동이 총독부의 언어 지배를 근 본적으로 전복시키지 못했다는 데에 머무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쇄말화”를 강조함으로써 지배 권력의 힘을 지나치게 인정하고 말았고, 역으로 일본의 언어 지배가 절대적이고 전지전능한 것이었다는 착각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 려되는 것이다.
셋째, 필자가 권력과의 거리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결코 조선어 ‘말살’을 강조하는 종래의 평면적인 사고방식 때문이 아니다. 식민지기 한글운동사와 식민지 조선어 교육정책사의 특징을 ‘협력’의 사실과 그것을 유인한 지배 권 력의 작용 양태로 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필자는 이혜령이 말하는 해방 직후의 동향46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혜령은, 1945년 9월초 조선어학회가 그 산하에 ‘국
어 교과서 편찬위원회’를 설치하여, 초·중등 교육용 및 교사용 국어 교과서와 지도서를 인쇄·발행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곧, 조선어학회는 미군정청 하 에서 초·중등 국어 교과서를 만들어 냄으로써 한글운동의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이 시기의 한글 운동의 가장 두드러 진 특징은 민간 단체인 조선어학회의 활동이 국가적 차원에서의 정책적 실행 과 동의적인 의미를 가졌다는 데 있다”47는 황선영의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 이고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한글운동 (및 조선어 교육정책사) 의 성격은 식민지기와 해방 후는 정책적 차원이 관여했는가 하지 않았는가라 는 점에서 단절이 있다는 것인데, 과연 그럴까.
해방이 되자마자 조선어가 ‘국어’로서의 지위를 확보했다면 그것은 이미 1920년대에 표명된 민족 ‘재흥’, ‘갱생’의 조건을 이 시점에서 겨우 얻었고,
“强靭한敵手”였던 일본어를 추방하기 시작하게 됐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중 요한 논점은 “한글의整理普及改良等이 國家的權力에依하지아니면아니될것”
이라는 과정의 문제이며,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던 ‘권력’의 문제가 아닐까 생 각된다. 식민지기의 경우, 위에서 확인했듯이 한글운동은 총독부의 교육 지 배를 배경으로 전개된 것이고, 그러한 권력 작용의 장이야말로 한글운동의 형태를 규정한 것이었다. 해방 후의 경우, 조선어학회가 한글운동의 정통성 을 확보한 것도 미군정청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면, 거꾸로 식민지기 한글운동사의 특징은 그 배경에서 동향을 규정한 지배 권력의 주체와 성질에 서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협력’의 사실도 권력의 구체적인 작용 관계 속의 한 사실로서 역사화되어야 한다. 이미 역사 교과서 기술에도 채용되고, 논란 마저 불러일으키는 논점이기 때문에 그 작업은 한층 더 조심스럽게 이루어져 야 할 것이다.
되풀이하지만 중요한 것은 운동이 이룬 성과나 피하지 못했던 한계가 그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던 식민지 언어정책과 운동의 실태에 대한 분석으로부 터 도출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한글운동에 대해 여 러 국면에서 작용하고 있었던 식민지 권력의 실태(교육 지배, 언론 통제, 민 족운동 단속 등)와 조선 지식인들의 대응에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3) ‘제국’이란 시각
위에서 인용한 김철의 논의의 주지는 한글운동이 일본 ‘제국’ 안에서 ‘민 족’의 영역을 확보하고 안정성을 얻으려고 한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평가와 는 상관없이 식민지 언어 문제를 ‘제국’의 구조 안에서 파악하려고 하는 시각 은 일본의 언어정책사 연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일본에서 언어 문제에 ‘제국’이란 시각을 도입한 연구로는 야스다의 일련 의 연구를 들 수 있다.48 야스다는 일본 제국 안의 언어 문제를 식민지에서 구 축된 ‘국민국가적 언어편제’, 기타 점령지에서 구축된 ‘제국적 언어편제’로 나누면서, 식민지 조선의 언어정책이나 ‘국어’ 이데올로기를 전자에 위치시 켰다. 그에 의하면 ‘국민국가적 언어편제’는 식민지 언어 환경이 근대 일본에 서 형성되고 있던 ‘국어’의 논리로 포섭되어가는 장이라는 것이고, ‘문명’ 언 어로서의 ‘국어’와 ‘야만’, ‘미개’, ‘불결’함을 상징하는 식민지 언어라는 대립 구조를 만들었다고 한다.49 그러나 거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대부분이 ‘국어’
보급의 논리일 뿐, 한글운동의 논리는 거의 검토되어 있지 않다. 이미 식민 지기 조선어의 ‘근대화’를 둘러싼 논점을 정리했을 때 지적한 바가 있는데,50 대립 구조를 강조하는 데 역점이 있기 때문에 지배 권력과 조선 지식인 사이 의 미묘한 밀고당김에 대한 상상력은 보이지 않는다. 야스다는 “언어와 민족 성이 결합될 수 있다는 관점을 소지해 버린 이상, 국민국가나 근대 제국의 다 언어성(多言語性)은 그들이 정치화되지 않도록 관리 대상이 된다”51라고 하 는데, 식민지 조선의 경우는 한글운동을 비롯한 조선어의 민족성을 찬양하는 움직임이야말로 “관리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구체적 사례로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일본어와 조선어의 이중언어 상태에서 조선어가 차별적 인 지위에 처해 있는 데에 기인한 반일학생데모와 조선어학회 사건뿐이다.52
‘국어’를 통한 포섭 논리에 대한 기술은 무척 자세한 반면, 식민지 언어 상황 에 대해서는 단편적이고 정태적인 기술에 머무르고 만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야스다 혼자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제국’이란 관점과 그것 에 대한 식민지 연구자의 한계에 기인하는 부분도 있다. 고마고메(駒込武)는
‘제국사’ 연구의 특징을 “복수의 식민지, 점령지와 일본 내지의 상황과의 구 조 연관을 횡단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것”, “내지의 상황이 식민지 지배를 규정했다는 측면과 더불어, 식민지의 상황이 내지에 준 임펙트를 해명하는 것”, “정치사나 문화사 (혹은 정치사로서의 문화사)의 영역을 중시하는 것”,
“‘일본인’, ‘일본어’, ‘일본문화’라는 범주를 자명한 것으로 보지 않고, 그 형 성과 변용의 역사적 과정에 착목하는 것”의 4개로 정리하면서. “‘동화정책’
대 ‘민족해방투쟁’이란 이항대립적인” 틀에 구애되지 않고, “여러 차원에서 의 상호 작용에 주목하면서 식민지정책에 내포된 내적 모순이나 지배자와 피 지배자의 인터페이스(interface)에서 생긴 여러 문제들을 더욱더 입체적으로 해명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53 그리고 그는
제국사라는 문제 설정에는 ‘일본인에게 식민지 지배가 어떤 의미를 가 졌던가’, ‘일본사 연구에 식민지 연구는 어떤 의의가 있는가’ 하는 물음 이 좋든 싫든 간에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필시 필요한 물음일지 모르겠 다. 그러나 그 곳에 머무르는 한, 어떤 의미의 자기중심성을 피할 수 없 을 것이다. 제국사 연구는 ‘조선인들이나 대만인들에게 식민지 지배는 어떤 의미를 가졌던가’라는 물음에의 깊은 생각을 결여할 때 아주 쉽게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조선사’, ‘대만사’ 연구로 회수되고 말 것이다.54
라고 ‘제국사’ 연구의 ‘함정(陷穽)’을 지적하고, “‘일본사’라는 제도에 가려져 있는 사실 관계나 해석의 가능성을 발굴하면서 ‘조선사’, ‘대만사’ 연구의 성 과에 연결시키는 것도 또 중요하지 않을까. 어디까지나 과도적인 것을 본질 로 하는 가교적(架橋的) 작업으로서 제국사 연구적인 관점도 유효하지 않을 까 생각하고 있다”55라고 말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제국사’ 연구의 특징의 하나로서 “‘일본인’, ‘일본어’, ‘일본문화’라는 범주”의 “형성과 변용의 역사 적 과정에 착목하는 것”이 지적됐는데, 동시에 그와 연결시키는 형태로 ‘조 선인’, ‘조선어’, ‘조선문화’의 형성과 변용에 대해서도 파악하여 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식민지 조선의 언어정책사나 한글운동사의 해명도 그러한 작업 의 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야스다의 소론에는 그 시각이 아주 빈약하다. 물 론 그러한 야스다의 문제점에 대해서 조선사 연구자들도 오랫동안 직시해오 지 않았다는 것도 문제시되어야 한다. 어쨌든 그 역사화의 작업이 제대로 이 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아직도 “과도적”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 이 현실일 것이다.
그런데 야스다의 시각의 문제성은 해방 전후의 동향에 대한 이해에도 나타 나고 있다. 일찍이 제국 내에서의 식민지 본국과 식민지와의 법제, 문화, 사 상 등의 ‘연쇄’에 관해서 지적된 바 있으나, 야스다는 이 도식을 언어 지배의 문제로 배치하여, 베네딕트 앤더슨의 ‘배전(配電) 시스템’56이란 비유로써 설 명하려고 한다. 언어 면에서의 ‘배전 시스템’의 구축(構築)은 “언어의 공시적 구축”=언어의 근대화와 그 결과물 및 그것을 지탱하는 언어의식을 가리키 지만 야스다는 그 전제로 “지배적인 ‘배전 시스템’이 식민지로 이식되어, 그 시스템의 영향 아래에서 대항적인 ‘배전 시스템’이 형성된다”고 하며, “제국 지배가 붕괴된 후에 여러가지의 역사적 조건하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식민지 지배하의 여러 조건을 억지로 망각하는 기색을 보이면서 새로운 ‘배전 시스 템’이 선택되기에 이른다”고 한다.57 야스다는 또 근대 일본과 조선에서 이러 한 메커니즘을 통해서 ‘배전 시스템’의 ‘적대적’ 구축이 있었다고 하는 전제 에서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의 활동을 ‘조선어’란 ‘배전 시스템’의 정비라 고 보고 다음과 같이 논한다.
[……] 총독부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조선어를 ‘구축’]하려는 논의가 높아지면 무언가의 대책을 세워야 하게 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조선 어’라는 ‘배전 시스템’을 축으로 하면 독립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어학회 사건이란 일이 있었다. [……] 이 학회는 1930년 대를 중심으로 사전 편찬, 방언 조사, 표준어 사정, 정서법 제정, 문자보 급운동 등을 행했다. 이것들을 ‘조선어’란 ‘배전 시스템’의 정비로 볼 수 도 있다.
조선어학회 주요회원 33명이 1942년부터 1943년에 걸쳐 치안유지 법 위반으로 검거당한 것이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학회의 학술 활동을 총독부가 독립준비로 인정한 것이다. 그것은 1943년의 예심종결결정 문에서 조선어학회를 “표면 문화운동의 가면 아래 조선 독립을 위한 실 력양성단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도 명백하다.58
그리고 야스다가, 해방 후에 활약한 조선어학회 계통의 지식인의 언어사상 에 근대 일본어의 ‘배전 시스템’이 복사되고, “언어와 규범, 그리고 내셔널리
즘 등에 관한 사고의 틀조차 각인시켰다”59고 해방 후로의 유용(流用)을 지 적한 점은 흥미롭다. 그러나 그러한 메커니즘이 현상으로 설명되기는 하지만 배후 관계, 경위, 회로 등에 관한 지적은 하나도 없다. 그 이전에 식민지기 동 향에 관한 기술에는 문제가 더 많다. 위의 인용문 중의 “총독부의 힘에 의지 하지 않고 [……]”라는 부분은 앞에서 인용한 이완응의 조선어 교육정책 비 판을 “총독부의 힘에 의지해서 ‘조선어’를 구축하라”는 담론으로 이해한60 다 음에 나온 말이지만, 그 당시 한글운동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총독부 교 육정책과 무관하지 못한 상황이었음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게다가 그의 소론에는 총독부 권력과의 관계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조선어’란 ‘배전 시스템’의 정비 과정인 한글운동의 성격에 관해서조차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 외에도 조선어학회(사건)의 성격도 통치 권력 측에서 조작된 논리를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등, 그의 논의에는 문제점이 너무 많다.
결론을 대신하여
이 논문에서 내리고 싶은 결론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역사를 있는 그 대로 그려내자는 것이다. 이하에서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해 몇 가지 제언을 하는 것으로 본 논문의 마무리로 삼고자 한다.
첫째, 조선어 교육정책, 운동의 다이나미즘에 대한 상세한 검토가 필요하 다. 그것은 정책 자체를 평가할 뿐만 아니라 교육정책의 말단에서 조선어 규 범화의 필요성을 통감하면서 활동한 조선인 교사들의 역할에 주목하는 것이 기도 한데, 그것은 곧바로 운동사의 평가에도 연결이 될 것이다. 원래 한글운 동에 대해서는 1920년대 이후의 민간 차원의 조직적 활동이나, 아니면 일부 지식인에만 주목해 왔지만, 조선인 조선어 교사들은 1910년대 이후 계속 조 선어의 규범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61 그들을 주목하는 것은 정책 과 운동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그려 내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둘째, 한글운동의 형식을 규정한 총독부의 여러 정책에 관한 언급이 필요 하다. 그 가운데서 요즘 주목되는 언론통제정책이나 이미 많은 연구가 축적 된 민족운동 단속 등 주로 경찰 권력에 대한 시점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조 선어로 된 언론 매체가 겪어야 했던 규제가 한글운동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
쳤는지는 아직 상세히 검토가 안 돼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또한 근대 이데 올로기인 문자생활의 정착을 계몽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언론이나 집회 등의 자리의 리얼리티와 그에 대한 경찰 당국의 규제 사이의 관계도 밝 힐 필요가 있다.62
셋째, 한글에 대한 가치의식이나 한글운동 자체를 지리적으로 확산시킨 요 인이 무엇이었던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1930년대에 한글보급운동이 활 발히 전개되었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한 사회적 기반은 어떻게 형성되었는 가. 여러 국면 가운데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조선어의 규범화와 함께 전개된 운동 중의 하나가 ‘가갸날(한글날)’ 기념 행사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글의 전통을 찬양하는 운동이었는데, 1920년대 후반 이후 지방 유지들은 그 행사 에 동조하면서 가갸날 기념과 조선어 규범화의 필요성을 계몽해 나갔다. 한 글운동이 널리 전개되고 가치의식도 공유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움직임이 있었음도 외면할 수가 없다.63
넷째, 한글운동의 이데올로기가 사회의 문자생활화를 통한 문명화에 있었 지만, 그 반면에 존재하고 있었던 비(非)문자 영역의 동향과 역할에도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식민지기 조선인들은 문맹률이 아주 높았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에서는 문자를 전제로 하지 않는 소리의 문화, 특히 구술문화의 영역이 널리 존재하고 있었다. 문자화의 논리가 근대적 이데올로기임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리의 영역을 단순히 전근대적이라고 빼놓기는 곤란하다. 이 미 음독(音讀)이란 방법이 계몽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라디오와 같 은 근대 미디어도 소리 문화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조선어의 규범화 문 제에 관해서 보면 라디오, 음반 등 미디어의 역할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64 소리가 가진 정보 전달기능이 컸던 것은 총독부 당국이 잡지, 신문, 도서만 아니라 음반이나 라디오 방송 등에 계속 감시의 눈을 떼지 않았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다.65 또 하나의 문제는 그런데도 문명화의 논리를 관철시키기 위해 서 한글운동이든 총독부 교육정책이든 조선인의 높은 문맹률에 직면하여, 서 로가 서로의 논리로써 조선인의 식자화(識字化)를 추진하려고 했다는 것이 다. 조선어 규범화 문제도 이 점과 관련이 있음은 새삼 말할 나위도 없을 것 이다. 특히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총독부 농촌진흥운동하의 교육정책의 논 리와 민간의 한글보급의 논리가 충돌하여 후자의 논리가 배제된 것은 주지하
는 바와 같다.66
위에서 몇 가지 과제를 제시했다. 그 외에도 많은 과제가 있을 것이다. 이 상과 같이 분석하고 과제를 제시한 것은 필자가 일본의 언어 지배와 한글운 동, 그 주변의 문제들을 식민지기 정치사, 운동사, 사회사의 문맥으로 환원시 키고 싶기 때문이다. 본고가 그것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 다.
【주】
1 물론 일본어를 통한 언어지배의 의미가 중요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이 문 제에 대해서는 三ツ井崇「日本人はハングルを廣めたか」(田中宏/板垣竜太編『日 韓 新たな始まりのための20章』東京: 岩波書店, 2007년)/미쓰이 다카시「일본인 은 한글을 보급했나?」(다나카 히로시, 이타가키 류타 엮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 국문화교류센터 옮김,『한국과 일본의 새로운 시작』뷰스, 2007년)를 참조하기 바 란다.
2 1945년 이후 한국(사) 연구에서 지배적이었던 조선어 ‘말살’론, 사회언어학자 에 의한 조선어 ‘근대화’론, 혹은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에 의한 ‘시혜’론의 문 제점에 대해서는 三ツ井崇,「植民地期の朝鮮語問題をどう考えるかについての一 試論: 朝鮮總督府「諺文綴字法」を事例として」(『植民地敎育史硏究年報』第3號, 2000년); 『植民地下朝鮮における言語支配の構造: 朝鮮語規範化問題を中心に』
(2001年度一橋大學大學院博士學位論文, 2002년); 「植民地期朝鮮における言語 運動の展開と性格: 1920~30年代を中心に」(『歷史學硏究』第802號, 2005년)를 참조하기 바란다.
3 대표적인 저서로서, イ·ヨンスク,『「國語」という思想 : 近代日本の言語認識』(東 京: 岩波書店, 1996년)/이연숙, 고영진/임경화 옮김, 『국어라는 사상: 근대 일 본의 언어 인식』(소명출판, 2006년), 安田敏朗, 『帝國日本の言語編制』(横濱: 世織 書房, 1997년); 『「言語」の構築: 小倉進平と植民地朝鮮』(東京: 三元社, 1999년) 등을 들 수 있다.
4 三ツ井崇,「朝鮮總督府「諺文綴字法」の歷史的意味: 審議過程の分析を通して」
(『一橋研究』第25巻第1號, 2000년);「植民地期の朝鮮語問題をどう考えるかにつ いての一試論: 朝鮮總督府「諺文綴字法」を事例として」(앞의 글) ;『植民地下朝 鮮における言語支配の構造: 朝鮮語規範化問題を中心に』(앞의 글); 「「ハングル」
に敗れた朝鮮語綴字法: 朴勝彬と朝鮮語學硏究會をめぐる二, 三のこと」(『ことば と社會』第6號, 2002년); 「朝鮮語學會の朝鮮語規範化運動と朝鮮語學會事件」(『東 アジア研究』第35號, 2002년); 「植民地下 朝鮮에서의 言語支配: 朝鮮語 規範化問
題를 中心으로」(『韓日民族問題硏究』第4號, 2003년); 「植民地期朝鮮における言 語運動の展開と性格: 1920~30年代を中心に」(앞의 글).
5 박지향/김철/김일영/이영훈, 「해방 전후사의 새로운 지평」,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2, 서울: 책세상, 2006년, 626~627면. 인용문 중의 [ ]는 인용자에 의한 주이다. 이하 같음.
6 森川展昭, 「朝鮮語學會の語文運動」, むくげの会編『朝鮮一九三〇年代研究』, 東 京: 三一書房, 1982년, 141면.
7 이에 대한 가장 최근의 예로는 김승곤, 「거짓 기술도 이런 거짓 기술이 어디 있 을까?」(『한글 새소식』제428호, 2008년)를 들 수 있다, 그는 한국의 뉴라이트 지 식인에 의해서 조직된 ‘교과서 포럼’이 지은『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서울:
기파랑, 2008년)에 나오는, 김철의 주장과 같은 한글운동사의 기술에 대해 반론 한다.
8 “第十四條 法律勅令 總以國文爲本 漢文附譯 或混用國漢文”.
9 三ツ井崇, 「近代朝鮮社會における文字の價値付けとその文脈」, 『韓國朝鮮の文 化と社會』第6號, 2007년, 62~68면.
10 『敎育時論』第926號, 1911년 1월 5일자. 井上薫, 「日本帝國主義の朝鮮に對す る敎育政策 : 第一次朝鮮敎育令の成立過程における帝國敎育會の關與」, 『北海道 大學敎育學部紀要』第62號, 1994년, 196면.
11 井上薫, 「日本帝國主義の朝鮮に對する敎育政策 ; 第一次朝鮮敎育令の成立過程 における帝國敎育會の關與」(앞의 글), 197~198면.
12 「勅語渙發當時を語る座談會」, 『文敎の朝鮮』第62號, 1930년, 124면.
13 山田寛人, 『植民地朝鮮における朝鮮語獎勵政策: 朝鮮語を學んだ日本人』, 東京:
不二出版, 2004년.
14 「한글運動의意義와使命: 政治, 敎養, 文化上으로(一)」,『동아일보』1927년 10 월 27일자.
15 위와 같음.
16 한글 학회 50돌 기념 사업회(엮음), 『한글 학회 50년사』, 한글 학회, 1971년, 263~264면.
17 鄭寅燮, 「標準語問題」, 『한글』第3卷 第7號, 1935년, 1면.
18 이하의 기술은 주4의 문헌들을 참고로 했다.
19 이준식, 「일제침략기 한글 운동 연구: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한국사회사학회 편, 『사회변동과 성·민족·계급』문학과지성사, 1996년, 69~73면); 미쓰이 다카시,
「植民地下 朝鮮에서의 言語支配: 朝鮮語 規範化問題를 中心으로」(앞의 글), 221 면.
20 李完應, 「朝鮮の學政當局は何故朝鮮語科を度外視するか」, 『朝鮮及朝鮮民族』第 1集, 1927년, 141~143면.
21 위의 글, 143면.
22 「諺文綴字法調査會」, 『朝鮮』昭和4年 7月號, 1929년, 130~131면.
23 齋藤實, 「諭告」, 『朝鮮總督府官報』1919년 9월 10일자.
24 一記者, 「訓民正音頒布紀念日을當하야諸賢諸氏에게訴함」, 『正音』第20號, 1937년, 20면.
25 三ツ井崇, 『植民地下朝鮮における言語支配の構造: 朝鮮語規範化問題を中心に』
(앞의 글); 「朝鮮語學會の朝鮮語規範化運動と朝鮮語學會事件」(앞의 글).
26 「 判 決 文(昭 和 十 八 年 豫 第 十 一 號 豫 審 終 結 決 定)」, 『 韓 』第68號, 1977년, 102~103면.
27 위의 글, 106~107면.
28 이혜령, 「한글운동과 근대 미디어」, 『大東文化硏究』第47輯, 2004년, 253면.
29 위의 글, 252면.
30 위의 글, 285~286면.
31 위의 글, 252면.
32 위의 글, 259면.
33 위의 글, 264면.
34 위의 글, 286면.
35 「朝鮮語綴字法 改正問題: 徹底한 改正을 促함」, 『조선일보』1929년 5월 28일 자.
36 西尾幹二, 『國民の歷史』, 東京: 産經新聞ニュースサービス, 1999년, 708면.
37 黃文雄, 『台湾·朝鮮·満州 日本の植民地の眞實』, 東京: 扶桑社, 2003년, 229면.
38 김철, 「갱생(更生)의 도(道) 혹은 미로(迷路): 최현배의 『朝鮮民族更生의 道』를 중심으로」, 『민족문학사연구』제28호, 2005년, 310면.
39 위의 글, 311~312면.
40 위의 글, 319~320면.
41 위의 글, 320면.
42 이혜령, 「한글운동과 근대 미디어」(앞의 글), 255면.
43 김철, 「갱생(更生)의 도(道) 혹은 미로(迷路): 최현배의 『朝鮮民族更生의 道』를 중심으로」(앞의 글), 321~322면. 인용문 중의 각주 번호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 해서 뺐다. 이하 같음.
44 이혜령, 『한국소설과 골상학적 타자들』, 서울: 소명출판, 2007년, 418~419면.
그런데 이혜령은 이러한 분석 때문에 문학자 임화(林和)가 1936년에 발표한 「조 선어와 위기하의 조선문학」(『조선중앙일보』1936년 3월 8일~28일자)이라는 논 설을 자료로 제시한다. 임화의 담론은 그 시기 지식인들이 한글운동을 어떻게 보 고 있었는가를 판단할 때에 흥미로운 자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료의 성격을 고 려할 때 한글운동 그 자체의 역사적 평가로 이용하기에는 곤란하지 않을까 생각 된다.
45 그러한 의미에서는 최경봉의 이혜령, 김철에 대한 반론은 그 반동이라 할 수 있
다. 그는 조선어학회의 활동의 내적 저항의 논리를 강조함으로써 총독부와 조선어 학회 사이의 관계를 대립적인 측면을 강조한다(최경봉,「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활동의 역사적 의미: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에 나타난 인식 태도를 비판하며」,
『민족문학사연구』제31호, 2006년). 그러나 운동의 평가를 논리로서만 결정하는 것은 식민지 지배정책이나 민족운동이 임(臨)해야 했던 시대 상황에 대해 눈을 감 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역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덧붙여서 말하면, 주 7에서 언급한 김승곤의 글도 똑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46 아래에서 소개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혜령, 『한국소설과 골상학적 타자들』(앞 의 책), 404~408면을 참조했다.
47 황선영, 「탈식민화 과정에서의 언어적 민족주의에 대한 연구: 1945년부터 1960년까지의 한글 전용 운동을 중심으로」, 1998년도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 논문, 1998년.
48 安田敏朗, 『帝國日本の言語編制』(앞의 책); 『「言語」の構築: 小倉進平と植民地 朝鮮』(앞의 책); 『近代日本言語史再考: 帝國化する「日本語」と「言語問題」』(東京:
三元社, 2000년) 등.
49 安田敏朗, 『帝國日本の言語編制』(앞의 책), 8~9면.
50 三ツ井崇, 「植民地期の朝鮮語問題をどう考えるかについての一試論: 朝鮮總督 府「諺文綴字法」を事例として」(앞의 글) ;「植民地下朝鮮における言語支配の構造:
朝鮮語規範化問題を中心に」(앞의 글); 「植民地期朝鮮における言語運動の展開と 性格: 1920~30年代を中心に」(앞의 글).
51 安田敏朗, 「帝國化する言語: 近代帝國がもたらしたもの」, 山本有造 편, 『帝國 の硏究: 原理·類型·關係』, 名古屋: 名古屋大學出版會, 2003년, 331면.
52 安田敏朗, 『近代日本言語史再考: 帝國化する「日本語」と「言語問題」』(앞의 책), 257~260면.
53 駒込武, 「「帝國史」硏究の射程」, 『日本史硏究』第452號, 2000년, 224면.
54 위와 같음.
55 위의 논문, 225면,
56 ベネディクト·アンダーソン, 白石隆/白石さや 옮김, 『增補版 想像の共同體:
ナショナリズムの起源と流行』, 東京: NTT出版, 1997년.
57 安田敏朗, 『統合原理としての國語: 近代日本言語史再考Ⅲ』, 東京: 三元社, 2006년, 162면.
58 安田敏朗, 『「國語」の近代史: 帝國日本と國語學者たち』, 東京: 中央公論社·新書, 2006년, 242면.
59 위의 책, 254면, 60 위의 책, 241~242면.
61 三ツ井崇, 『植民地下朝鮮における言語支配の構造: 朝鮮語規範化問題を中心に』
(앞의 글) 참조.